짙푸른 대추 잎사귀가 점점 무성해지면서 윤기가 반들반들 흐른다. 잎이 비단보다 더 곱다. 가까이 가서 나무를 쓰다듬어본다. 소나무의 진취적 기상, 느티나무의 늠름함도 지니지 못했다. 노랑이나 다홍색으로 단풍이 드는 황홀함도 없다. 화려하기보다 소박하고 어디서나 흔하다.
대추나무는 계절을 타지 않는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와도 묵묵히 침묵만 지킨다. 신록이 어우러져 꽃들이 향을 뿜지만 겨울잠에서 깨어날 기척조차 안 보인다. 늘 혼자 명상에 잠겨 무념무상(無念無想) 자세다. 겨우 청명 (淸明) 곡우(穀雨)를 넘기면서 딱딱한 껍질에 온기가 감돈다.
무딘 가지에도 마침내 보드라운 감촉의 싹이 튼다. 느린 행동에 뒷짐을 진 채 천천히 행차하는 옛 양반네들이 떠오른다. 하여 '양반나무'라는 이름도 달았다. 단오절을 전후로 도저히 육안으로 구별하기 힘든 깨알만큼 작은 꽃들이 촘촘하게 돋아난다. 잎과 잎 사이에 피고 지기를 반복하며 봄맞이 채비를 서두른다. 그때마다 은은한 향기를 따라 꿀벌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한바탕 흥겨운 잔치가 열린다. 어쩌면 신은 너무나 볼품없는 꽃에게 가장 감미로운 꿀을 갖도록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태양이 작열하는 원색의 여름, 요란한 색상으로 달콤한 과일이 넘치는 계절이 되어도 대추나무의 수수한 차림은 전혀 눈에 띄지 않을 수밖에. 허나 여름은 갑자기 퍼붓다 뚝 그친 소나기처럼 순식 간에 스쳐 지나간다.
삽상한 가을바람이 부는 어느 날, 우연히 시선을 끄는 대추나무의 신비스런 변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따사로운 햇살, 신선한 공기, 불어오는 바람결을 마음껏 받으며 충만한 빛깔로 속속 영그는 다갈색 대추알들. 겉치레에 눈먼 인간의 모양새가 우습기라도 한 듯 도도히 솟구친다. 금방이라도 이마 위로 와르르 쏟아질 듯한 고운 대추열매의 사태(沙汰)! 하찮은 나무에서 저렇듯 수많은 열매를 맺어 자랑스럽게 펼치는 장엄함에 숙연해진다. 굳은 심지로 내공(內功)을 쌓아가는 나무다.
그래서인지 우리 몸에 백가지나 되는 이로움을 베푼다. 예로부터 대추를 '백익홍(佰益紅)'이라 한 것은 이런 연유에서이다. '대추씨 하나 물고 삼십 리를 간다'는 말이 있듯 영양가도 많다. 우선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폐백에 쓰인다. 한방에서는 해독에 통증을 완화하는 등 감초는 빠져도 꼭 필요한 것이 바로 대추다. 거기다 대추차는 불면증을 낫게 하니 이보다 더 좋은 명약이 있겠는가.
나 역시 이같이 덕(德)을 갖춘 대추나무를 조금이나마 닮을 수 만 있다면 그나마 괜찮을 터다. 늘 곁에 두고픈 사랑스런 나무다. 뜰 안에 심어 날마다 바라보면 가끔씩 우울한 내 마음에도 환하게 생동감이 넘쳐날게다. 금이 갈 듯 눈부신 파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오늘도 변함없이 대추나무는 의연히 제 자리를 지켜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