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진주
이야기가 흐르는, 진주성
진주성(사진 출처 : 진주성 관리사업소)
진주성(사적 제118호)은 경남 진주 남강 변 절벽에 자리해 있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왜적이 호남으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막아낸 성이자 논개가 적장을 껴안고 남강으로 투신한 의암이 있는 곳이다. 진주성이 언제 쌓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려 말 우왕 3년(1377) 왜구의 침입을 방어할 목적으로 성을 고쳤다는 사료로 보아 오래전부터 왜구의 침투를 막았던 전적지였음을 알 수 있다. 진주성 맞은편에는 촉석루가 있다. 지리산 자락, 남강의 벼랑 위에 우뚝 솟아 있는 촉석루는 남원 광한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우리나라 3개 누각으로 손꼽힐 정도로 그 풍경이 남강과 함께 어우러져 한 폭의 수묵화처럼 아름답다. 촉석루 바로 아래에 작은 섬처럼 떠 있는 바위가 바로 논개가 적장을 끓어 안고 빠진 곳으로 알려진 의암(義岩)이다.원래의 이름은 위암(危岩)이었으나, 논개의 충절을 되새기는 의미로 의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논개는 선조 26년(1593)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자, 왜장을 끌어안고 이 바위에서 남강에 뛰어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논개의 이야기는 전쟁의 혼란 속에서 바로 기록되지 않아 그녀의 출신과 삶, 그녀가 죽인 왜장의 이름은 명확하게 기록된 바 없다. 그녀의 순국 이야기는 임난 직후 민간에서만 전해지다가 1620년경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처음으로 언급되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진주성에는 북쪽 제일 높은 곳에서 성 안팎을 두루 살폈던망루, 북장대와 임진왜란에서 장렬히 전사한 이들을 기리는 전시장인 국립진주박물관이 있다. 외적의 침입을 막았던 요새, 진주성. 남강에 자리한 이곳은 세워진 순간부터 오늘날까지 수많은 전쟁과 죽음 그리고 삶에 관한 이야기가 유유히 흐르고 있다.
전남진도
조선시대 말 전통 정원, 진도 운림산방
진도 운림산방(사진 출처 : 진도군청 관광문화과)
진도 운림산방(명승 제80호)은 전남 진도의 첨찰산 자락에 자리 잡은 곳으로, 조선 후기 동양화의 한 분파인 남종화의 대가, 소치 허련(小痴 許鍊, 1807~1890)이 말년을 보내며 작품 활동을 했던 곳이다. 운림산방은 허련이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거처하며 그림을 그리던 화실의 당호다. 운림산방이란 이름은 첨찰산을 지붕으로 하고 사방으로 수많은 봉우리가 있는 깊은 산골에 아침저녁으로 안개가 구름처럼 피어올라 숲을 이루었다고 하여 붙여졌다. 소치 허련은 1807년 진도읍 쌍정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그림 솜씨는 어려서부터 뛰어 났고, 30대 초반 서울로 거취를 옮긴 후 추사 김정희에게 본격적인 서화 수업을 받았다. 왕실의 그림을 그리며 관직을 맡기도 했으나, 스승 김정희가 죽자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진도로 내려와 운림산방에서 그림에 몰두하였다고 한다. 운림산방은 ‘ㄷ’자 기와집으로 운림산방 앞에는 오각으로 만들어진 연못이 있다. 이 연못 가운데에는 직경 6m 크기의 원형으로 된 섬이 있으며 배롱나무가 있고, 연못에는 흰 수련이 피어나 소박한 조선시대 정원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다. 배롱나무는 백일홍나무라고도 하며 꽃이 아름답고 오래 피어 있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정원수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운림산방에 안개가 일어나고 그 사이로 배롱나무가 보일 때 그 모습은 마치 조선 시대로 돌아간 듯 몽환적이라고 한다. 운림산방 근처에 쌍계사가 있고, 첨찰산 서쪽 기슭에 천연기념물 제107호로 지정된 상록수림도 있다. 산세가 안락하게 운림산방을 감싸고 있으며, 주변이 한적하고 조용하여 산책하기 좋다.
전남담양
조선시대 선비의 은밀한 별서정원, 담양 소쇄원
담양 소쇄원(사진 출처 : 담양군청 문화체육과)
담양 소쇄원(명승 제40호)은 전남 담양군에 위치한 조선시대 대표적인 별서정원이다. 별서정원은 선비들이 정치 세계에서 물러나 외딴 산 속으로 들어와 지은 집과 정원을 말한다. 별서(別墅)란 주된 일상을 위한 저택에서 떨어져 산수가 좋은 별저(別邸)를 지칭하는 말이다. 담양 소쇄원은 소쇄공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기거했던 곳으로 별서정원 중에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하다.
선비 양산보는 왜 속세를 떠나 이곳으로 들어왔을까? 소쇄공 양산보의 스승은 조광조다. 양산보는 1519년 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죽자 정치에 환멸을 느껴 벼슬길을 등지고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1520년 중반,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소쇄원을 짓기 시작하였고, 이곳에서 오래도록 머물며 지역 선비들과 교류하였다고 전해진다. 소쇄원의 소쇄(瀟灑)는 양산보의 호에서 따온 것으로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다. 소쇄원 안에는 제월당과 광풍각, 오곡문, 애양단 등 10여 동의 건물이 있다. 양산보가 주로 거처했던 곳은 제월당(霽月堂)으로 ‘비 갠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오늘날 지번으로 불리는 건물 이름과 달리 멋스러움이 느껴진다. 문인이었던 양산보의 감수성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우암 송시열이 현판을 썼다고 전해지며, 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 등 당대의 선비들이 이곳을 즐겨 찾았다고 한다. 소쇄원은 대나무로 둘러싸여 있으며, 조선시대 선비의 소박함이 느껴진다. 바람이 불면 댓잎 소리가 사방을 채우고, 마루에 걸터앉아 바람 소리를 들으면 온갖 걱정과 근심이 달아날 것만 같다. 이런 곳에서 시 한 수 읊으며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여유롭게 사는 삶이란 어떠했을까? 상상만으로 지쳤던 심신이 치유되는 듯하다.
경북문경
아름다움에 취해 새도 쉬어가고 싶은, 문경새재
문경새재(사진 출처 : 문경시청 관광진흥과)
문경새재(명승 제32호)는 조선시대 영남지역에서 한양으로 가기 위한 주요 관문 중 하나였다.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들 정도로 험한 고개라는 뜻에서 ‘새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산새가 험난했던 당시에는 대낮에도 혼자서 고개를 넘지 못했고, 반드시 사람이 모이길 기다렸다가 넘었으며, 날이 저물면 밑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출발했다고 한다.새도 날아서 넘기 힘들었다던 문경새재는 오늘날 새도 쉬어가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명소로 거듭났다. 문경새재는 삼국 시대에 개척되었지만, 본격적으로 길이 정비된 것은 조선 태종 14년(1414)이었다. 당시 한양을 중심으로 온 지역을 잇는 길을 만들었는데 문경새재는 동래(부산)와 한양(서울)을 잇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문경새재는 영남대로의 역할을 톡톡히 하며,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올라가는 선비와 물건을 팔러 가는 상인 등 가족의 안위와 가문의 영광을 위해 이 고개를 넘어야 했던 수많은 사람의 염원이 깃들여 있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문경새재를 넘어 서울로 혹은 부산으로 가지 않는다. 1904년 경부선 철도가 놓이면서 문경새재를 넘어갈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1925년 수안보에서 문경으로 넘어가는 이화령이 신작로로 닦이면서 새재는 옛길이 되고 말았다. 1981년 이 일대가 문경새재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오늘날 영남과 충남을 연결하는 제1관문 주흘관, 제2관문 조곡관, 제3관문 조령관까지 6.5km 정도 산책로로 정비되었다. 산책로는 영남사람들이 서울로 가는 방향인 문경 쪽에서 수안보로 가는 방법이 있고, 반대로 서울에서 문경으로 오는 방향인 수안보에서 넘어가는 방법이 있다. 선선한 저녁에 옛 선비가 된 듯 천천히 문경새재를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새도, 우리도, 아름다움에 취해 은은한 여름밤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