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이 있는 여행
아부오름의 분화구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소떼. 멀리 한라산이 아스라하다.
제주도의 가을은 억새꽃의 흔들림과 함께 찾아온다.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초원 위로 왕릉 같은 오름들이 봉긋봉긋 솟아 있고, 그 광활한 기슭과 두루뭉술한 산자락마다 떼지어 피어난 억새꽃이 설원(雪原)처럼 새하얗다. 목화처럼 만발한 억새꽃은 이따금씩 불어오는 한줄기의 가녀린 바람에도 은빛 물결을 일으키며 너울거린다. 그 장엄한 광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먼 남녘 화산섬 제주도의 가을이 무르익었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오름은 본디 동사 '오르다'에서 파생된 제주도의 사투리로서 기생화산(寄生火山, 또는 측화산) 을 가리킨다. 전체 면적이 1,820km²쯤 되는 제주도에는 모두 368개의 오름이 있다. 특히 동부 중 산간지대인 북제주군의 조천읍 교래리와 구좌읍 송당리 일대, 그리고 서부 중산간지대인 북제주 군의 애월읍 봉성리와 한림읍 금악리 일대에는 오르기도 쉽고 자연미도 빼어나게 아름다운 오름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끝없이 곧게 뻗은 제2산록도로(115번 지방도) 변의 억새밭
가을날의 멋과 낭만 만끽할 수 있 는 드라이브 코스
이토록 많은 오름들 중에서도 관광지로 개발된 곳은 북제주군 조천읍 교래리의 산굼부리 말고는 달리 찾아 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10만분의 1 지도를 한 장 들고 직접 찾아 나서야 억새밭의 장관을 감상할 수 있다. 다행히도 오름이 밀집한 중산간지대에는 잘 닦인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거미줄처럼 연결돼 있어 찾아가는 길이 별로 험하지 않다. 줄곧 광활한 목장과 억새밭 사이를 가로지르는 이 산간도로는 제주도 가을날의 멋과 낭만을 만끽할 수 있는 드라이브 코스이기도 하다.
가을 햇살 아래 은빛 물결로 일렁이는 억새밭. 뒤편에 용눈이오름이 보인다.
대표적인 억새 드라이브 코스로는 1112번 지방도(일명 비자림로)의 구좌읍 교래리~송당리 구간, 동부산업 도로(97번 지방도)의 대천동 사거리~성읍민속마을 구간, 16번 국도의 송당리~성산읍 수산리 구간, 서부관 광도로(95번 국도)의 전구간, 1116번 지방도의 안덕면 동광리~한림읍 금악리 구간, 북제주군 조천읍과 남제주군 남원읍 사이의 1118번 지방도 (일명 남조로), 한라산 중턱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1115번 지방도(제2산록 도로)의 광평 교차로~돈내코계곡까지의 전구간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오름과 오름 사이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즐기는 것도 제주도 가을 여행의 낭만 중 하나지 만, 가급적이면 몇 군데의 오름을 직접 올라보는 게 좋다. 제주도의 오름들은 대부분 비고(此高 : 실제 등산하는 높이)가 낮아서 오르기도 퍽 수월한 편이다. 그러면서도 일단 정상에만 올라서면 주변의 수많은 오름뿐만 아니라 멀리 해안과 바다까지도 한눈에 들어올 만큼 조망이 탁월하다.
바람에 하늘거리는 억새밭 너머로 짧은 가을 해가 지고 있다. 새별오름 부근의 억새밭에서 찍었다.
동광휴양펜션의 돼지갈비살 훈제 바비큐구이
독특한 자연미의 오름들
우선 동부 중산간지대의 오름 가운데서 가장 가볼 만한 곳을 하나 고른다면 아부오름(해발 301m)이 단연 첫손가락에 꼽힌다. 몇 해 전 개봉된 영화 〈이재수의 난〉과 〈연풍연가〉의 촬영지로도 널리 알려진 이 오름은 구좌읍 송당리의 건영목장 정문 옆에 솟아 있다. 비고가 30~50m에 불과하여서 오르기가 아주 수월한데다 78m의 깊이로 움푹 꺼진 분화구의 정상에 올라서면 송당리 일대의 오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다랑쉬오를(월랑봉, 382m)도 오름의 매력을 아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가지런하면서도 균형 잡힌 원뿔형의 산세에다 단아한 기품마저 느껴져서 '오름의 여왕'이라 불린다. 게다가 정상에 올라서면, 몹시 비탈진 길을 오르느라 흘린 땀과 다리품이 결코 아깝지 않을 장관이 기다리고 있다. 둘레 1.5km에 깊이가 115m 나 되는 분화구의 위용은 그지없이 당당하고,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대자연은 숨막힐 정도로 웅장하다. 또한 정상의 능선길에서는 멀리 동쪽 바다의 성산일출봉, 지미봉, 용눈이오름, 우도 등이 손에 잡힐 듯하다. 바로 아래에는 방석처럼 푹신해 뵈는 작은 오름이 내려다보인다. 이 작은 오름이 바로 아끈다랑쉬(198m, 제주 말 '아끈'은 '작은' 또는 '둘째'라는 뜻) 인데, 여자이이처럼 예쁘고 앙증맞게 생겼다.
그밖에 송당리와 성읍민속마을 사이의 16번 국도변에 위치한 용눈이오름(247m)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이 곳은 오름 전체와 주변 초지(草地)가 구좌읍 상도리 주민들의 공동 목장인데, 부드러운 풀밭과 오름의 등성이에서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광경이 한편의 그림이나 시보다 더 서정적이다.
서부산업도로(95번 국도)가 지나는 서부 중산간지대에서는 새별오름(519m), 이달봉(486m), 금악(금오름, 430m), 누운오름(407m), 정물오름(469m) 등이 즐비하다. 그증 새별오름이 가장 오르기에 좋다. 서부산업 도로와 가까울 뿐더러 주변의 오름들과 비양도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정상의 조망이 매우 장쾌하다. 특히 이 주변의 광활한 억새밭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제주도의 어느 곳보다도 아름답고 황홀하다. 새별오름만 오르는게 아쉽거든 금악도 한번 찾아가 볼 만하다. 금악은 정상까지 찻길이 나 있어서 걷는 수고를 덜 수 있는데다가 분화구 안의 너른 풀밭에서 소떼들이 풀을 뜯는 목가적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이처럼 제주도의 오름들은 매우 독특한 자연미를 보여준다. 특히 해마다 가을철이 되면 오름의 비탈과 기 슭마다 가없이 펼쳐진 억새밭의 풍광은 제주도의 어느 관광 명소보다도 아름답고 장중하고 감동적이다. 그
어느 오름에 올라서서 갈바람에 일렁이는 억새 물결을 바라보노라면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더 빨리 일어선다'는 김수영 시인의 시 〈풀〉이 떠오른다. 아무리 모진 바람에 휩쓸려도 다시 일어서는 억새꽃이 야말로 억눌릴수록 더 거세게 일어섰던 제주 사람들의 질긴 생명력을 고스란히 닮은 듯하다.
여행 쪽지(지역번호 064)
제주 억새밭 여행의 적기(適期)는 10월 하순부터 11월 중순이다. 그 즈음에 억새의 은빛 물결이 장관을 이루다가 11월 하순에 들어서면 모든 씨앗을 바람결에 날려보낸 억새가 앙상한 줄기만 드러낸 채 겨울맞이 채비를 시작한다.
숙식
오름이 밀집한 중산간지대는 해안지대에 비해 편의 시설이 많지 않다. 하지만 근래에 크게 늘어난 펜션(Pension : 고급 민박)이 몇 군데 있어 숙식을 해결하기는 별로 불편하지 않다. 동부 중산간지대에서는 선린지리조트(선흘리, 784-8666), 사랑터울(교래 사거리 부근, 782-0102), 명송리조트(대천동 사거리, 784-4931) 등이 이용하기 좋다. 서부에서는 제2산록도로(1115번 지방도) 변의 동광휴양펜션(792-8888)과 유수암리 마을의 솔숲에 자리한 로그캐빈(799-2070), 새별오름 바로 아래의 그린리조트(792-6100)가 권할 만하다. 제주도의 펜션은 대부분 숙박 시설이 깔끔하고 음식도 맛깔스러워서 특히 신혼부부들이나 가족 단위의 여행객들에게 안성맞춤이다.
맛집으로는 16번 국도와 97번 지방도가 지나는 성읍민속마을의 옛정의골(787- 0934), 괸당네(787-1905), 나그네식당(787-1370) 등의 향토음식점을 추천할 만하다. 흑돼지구이, 오메기술, 빙떡 등과 같은 제주도의 토속음식을 맛볼 수 있다. 그리고 동광휴양펜션에서는 기름이 쏙 빠져서 담백하고 부드러운 돼지갈비살 훈 제 바비큐구이도 맛볼 수 있다.
가는 길
1. 동부/제주시(11번 국도)→견월악 삼거리(1112번 지방도)→교래(산굼부리)→대천동 사거리→건영목장 입구→승당리 2. 서부/제주 신시가지(16번 국도)→무수천 교차로(95번 국도)→그린리조트(새별오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