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눈이 오는 것은 정한 이치이기에 하나도 신기할 것이 없고 자랑할 것이 없다고 일반 우리나라 사람은 말을 하
지만, 정작 남쪽 나라 사람은 눈 구경이 큰 구경거리인지라 우리나라를 무척 부러워한다.
눈이 오면 물론 추위가 온다.
겨울철 절기로 立冬 다음에 小雪이 있고 大雪이 있다. 작은 눈, 큰 눈, 곧 많이많이 눈이 온다고 아예 철에 지시한 것은 기쁜 일이다. 이제 동지가 지나면 小寒, 곧 작은 추위가 오고 大寒, 곧 큰 추위가 이른다. 사실 소한이나 대한 절후 안팎에는 한파가 몰려와 참으로 절기이름을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겨울이 살기 좋지만, 이전 일제시대 신문을 보면 겨울 凍死가 허다하였다는 것이 번번이 보인다. 굶주리고 헐벗은 것, 곧 飢寒이 개인에게도 엄습하고 나라에도 엄습한 것이기에 동사한 樓屍 처리는 우리를 슬프게 하였던 것이다.
어찌 되었건 얼어 죽는 사람이 없는 세상에 사는 것은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천만다행이다. 그렇다고 겨울의 위력을 경시하며 겨울의 멋을 천대하라는 것은 아니다.
이전에는 눈이 오면 산골에서는 토끼몰이가 흔하였다. 내가 중학교 학생인 때, 전교생이 하루는 몽둥이 하나씩을 들고 산기슭을 포위하여 우우 소리치며 좁혀 들어가니까 토끼 너댓마리가 놀라서 위로 올라가는데, 거기에는 배구 네트를 쳐두었기에 다 잡을 수가 있었다. 이리 도망갈까, 저리 도망갈까 하며 우왕좌왕하는 토끼에게 학생이 우우 달려가면서 몽둥이를 휘두르다가 학생끼리 치고박고 싸우는 일이 생기고, 까망 교복에 흰눈이 잘 조화가 되어, 또한 청솔가지에 눈이 걸려 있는 것이 어울려서 볼 만하였다. 눈두덩이에 빠지고, 바람 불어 눈이 몰린 언덕 아래에 어느새 같이 가던 친구가 쑤욱 들어가는 순간이라니, 정작 토끼 잡기보다 잡는 그 놀이가 마냥 즐거웠다.
이런 일이 요즘 도시 학생에게 없음이 안타깝다.
눈이 살짝 녹아 질컥질컥하면 미끄러져 옷을 버리기 쉽다. 봄에 이런 녹은 눈을 지리산 근처에서는 ‘썩눈’ (썩은 눈이란 뜻인가 한다)이라 하며, 나무에 雪花가 멋지게 피면 이것을 ‘탈메’ 라 한다. 탈메 속에 들어가서 무릎까지 푹푹 빠져도 그 걷는 맛이란 겨울 등산객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정취라 하겠다.
겨울에는 지방에 흔히 있는 자생적인 接骨師인 ‘팔 빼박은 어른’ 네 집이 문전성시를 이룰때가 있다. 빙판에 자빠진 사람이 팔 빼박으러(접골치료하러) 오기 때문이다. 시골 우리 어머니께서 이 ‘팔 빼박은 할머니’인지라 나는 집에 있을 때 안내와 상담자가 된다. 다 눈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눈이 오면 아이는 좋고 어른은 불안하다. 눈이 오지 아니 하더라도 날이 추우면 아이들은 연날리며, 자치기하며, 썰매타며, 팽이 돌리며, 가지가지 추위에 합당한 놀이를 하기에 좋은데, 어른은 “문닫고 들어와라, 찬바람 들어온다. 바늘구멍에 황소바람이 들어온다.” 고 하면서 문 닫기를 강조하였다.
그렇다 해도 한옥은 의외로 따뜻한 집이다. 우리나라의 흙벽집은 초가지붕과 함께 방한이 잘 되며, 온돌은 따뜻해서 좋기에 한국인의 독특한 생활문화를 형성하였다. 누워 있을 때 등은 따습고 코 끝에는 찬 바람이 소르르 불 때 방안에 있는 감촉이란 대단한 것이다. 문풍지가 바르르르 떠는 소리까지 음악같이 들린다면 이것도 좋다. 추운 때에 천장이나 벽에 메주가 뜨고 있다는 것이 좋다. 추위가 없다면 어찌 이런 정취가 있을 것인가?
군불을 때는 기분도 좋다. 요즘에는 아이들이 군불을 멜 줄도 몰라 불쏘시개도 없이 바로 성냥불로 부지깽이를 태우려 하니, 이런 급하고도 무리한 일이 어디 있는가 말이다. 다 순리가 있거늘 말이다. 겨울에 김치가 익듯이 다 순서가 있는데 말이다.
그렇다. 겨울 추위가 없다면 어찌 될까? 설사 김치독이 얼어 터지는 한이 있더라도 겨울이 있어야 김치가 있과 김치가 있어야만 한국인의 건강이 있는 것이다.
‘걸케’ 라는 말을 아는가? 이른 봄 양지 쪽 눈이 낮에 햇볕이 들어 살짝 녹아 물기가 들다가, 해가 지면 찬 바람이 불어 눈위만 갓얼음이 되어 깔린 것이다. 이렇게 생기는 갓얼음을 걸케라고 한다. 걸케가 되는 것을 ‘걸케진다’ 고 한다. 노루를 여기에 몰아 넣으면 빠져서 고스란히 사로잡을 수가 있다. 이는 살짝살짝 걸어갈 수 있고, 어른은 푹푹 빠져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독특한 용어는 북쪽에, 또는 산간에 많이 있는데 다 설명하기 어렵다. 그저 눈이요 그저 얼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겨울에 임한 토끼에서 인생의 공부도 할 수 있다. “눈 먹던 토끼 다르고 얼음 먹던 토끼 다르다.”
이것은 다 같이 겨울을 나는 토끼지만, 다 추운 기온에 사는 것이지만, 사실 차이가 눈과 얼음에는 있는 것이니, 비슷
한 환경에 사는 사람이라도 실제로 차이가 생긴다는 미묘함을 지적한 것이다.
“양지 토끼는 못살아도 음지토끼는 산다.”는 속담은 참으로 들어 둘 만하다. 양지에 현재 토끼가 있는데, 상대편 골짝을 보니 여전히 음지요 눈이요 얼음이니까 아직 봄이 안된 줄 알고 초조하기에 제대로 못사는 것이며, 음지에 있는 토끼는 건너편 양지를 희망으로 보며 자기가 사는 곳도 그런 양지인 줄 알고 불평이 없이 잘 산다는 것이다. 상대를 보고 자기를 맞추는 현실, 상대의 불행을 자기불행으로 보는 토끼는 바로 소한 • 대한 추위에서 자란 토끼의 예이다. 상대의 행복에서 내 행복을 찾는 것도 이 온대지역의 일이다.
지금은 겨울이다. 춥다. 눈이온다. 소한 • 대한 때이다. 그래서 사람은 움추린다. 그래도 이전부터 우리는 다 슬기롭고 건강하게 잘 살아 왔다. 이런 조상의 후손인 우리는 춥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이 겨울이 있음에 감사하자. 인생의 사는 길에서 지혜를 찾아 멋지게 살자.
歲寒 然後에 松拒의 절개를 안다는 선현의 말씀대로 절조를 지켜 사람답게 살아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