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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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봄, 일제는 전쟁의 승리에 따른 구한국 정부에 대한 강압이 효과를 보이자 완전한 통신권 강탈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우정나누기우정 사업의 암흑기
전국적인 우편망 확충과 제도의 정비를 통해 활발한 우정사업을 펼치던 우리나라는 커다란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우정나누기근대 우편제도의 도약
갑신정변의 실패로 중단된 우리나라의 근대우편제도는 10년의 긴 공백기간 끝에 1895년 우편사업 재개로 다시 시작되었다. 우편에 사용될 우표를 미국에 의뢰하여 다시 만들었고 만국우편연합에 가입함과 동시에 전국적인 우편망을 확충하여 활발한 우편사업을 벌여 나갔다. 또한, 최초로 우리나라에서 만든 우표인 이화 보통우표가 발행되었고 고종 황제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기념우표도 발행되었다.
우정나누기근대 우편제도의 도입
우리나라의 근대식 우편제도는 1884년 도입되었다. 고종 황제의 재가를 받아 개화파 홍영식(洪英植)에 의해 실시된 신식우편제도는 우편업무를 담당할 우정총국의 개설과 함께 1884년 11월부터 실시하기로 하였다. 이와 함께 사용될 우표 5종의 인쇄를 일본에 의뢰, 이중 먼저 도착한 5문과 10문짜리 우표가 11월 18일 업무개시와 함께 한성-인천 간 우편에 사용됨으로써 역사적인 신식우편제도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우정타임머신체신부 기증용 우표의 주인은 누구였나?
6·25전쟁은 국가와 국민의 수많은 재산을 앗아갔다. 통신시설도 예외일 수 없었다. 아니, 통신시설은 전쟁을 수행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이니 만큼 보다 큰 피해를 입었다. 체신부 본부 건물은 물론 서울중앙우체국, 중앙청내우체국, 영등포우체국 등 수많은 건물이 불타거나 파괴되었다. 건물뿐만 아니라 우편함이며 자전거, 자동차, 통신선로 등 많은 통신시설이 파괴되었다. 전쟁 중에 피해를 입은 시설은 그처럼 눈에 잘 띄는 건물이나 통신시설만이 아니었다. 눈에 잘 띄지 않은 우표도 큰 피해를 입었다. 6·25전쟁 전에 발행된 우표가 깡그리 사라졌다. 체신부 본부와 창고 건물이 소실되면서 그 안에 보관되어 있던 우표가 모두 불탔기 때문이다. 9·28수복으로 서울을 탈환하고 나자 시중에는 갖가지 소문이 나돌았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이 멋대로 처분했기에 시중에는 각종 우표가 범람했다고 했다. 체신부 창고가 있는 원효로에는 유엔군을 상대로 우표를 행낭째 거래하는 집이 있다고도 했다. 우정국 모 과장은 ‘UPU 창설 75주년 기념우표’ 등 100매짜리 전지를 여러 장 가지고 있다고도 했다.
우정타임머신‘우편국’이라는 명칭이 ‘우체국’으로 바뀐 사연
1895년 6월 우편사업을 다시 시작했을 때 지금의 우체국은 ‘우체사’라 불렸다. 1884년 우정총국을 설치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한성(서울)과 인천 두 곳에만 우체사를 설치하고 우편 업무를 시작했다. 바로 그 해 우체사관제를 제정하여 전국적으로 24개 지역에 우체사를 설치하기로 했다. 24개 지역이란 23개 부청(府廳) 소재지에 원산을 더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896년 말까지 세워진 우체사가 1등 우체사 11개, 2등 우체사가 13개, 지사 1개로 모두 25개 사였다. 그 뒤 1898년 임시우체사제도가 실시되면서 우체사 수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우정타임머신우편사업, 115년 만에 첫 흑자를 기록하다
우편사업은 언제나 적자사업이었다. 우체국에서 전신·전화 업무를 같이 취급하며 전기통신사업과 한솥밥을 먹던 시절에도 적자였고, 한국통신(KT)의 설립으로 전기통신사업이 떨어져 나간 뒤 체신예금·보험과 한집 살림을 하던 시절에도 적자였다.
우정타임머신정보통신의 날은 어떻게 제정되었나?
지난 4월 19일 ‘과학기술인·정보통신인 한마음대회’가 정부과천청사에서 열렸다. 제목만으로 본다면 과학기술인과 정보통신인들이 모여 단합대회를 개최한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했으나, 제목 위에 ‘제46회 과학의 날, 제58회 정보통신의 날’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어 그 행사가 단순한 단합대회가 아닌 기념행사임을 알게 했다.
우정타임머신서울국제 우체국은 어떻게 설립되었을까?
6·25전쟁 당시에는 국제우편만을 전담하는 우체국이 따로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서울중앙우체국, 부산우체국, 인천우체국 등 3개 우체국에 국제우편과를 두고 그 업무를 담당하게 했다. 외국에서 들어오고 외국으로 내보내는 우편물과 소포를 취급하는 국제우편은 6·25전쟁이 터지고 UN군이 참전하면서 급격히 증가했다.
우정타임머신광복 후 최초로 설립한 우체국 문경 가은우체국
8·15광복 이후의 우체국 수의 변동 추세를 살펴보면 재미있는 현상을 볼 수 있다. 광복을 맞이한 1945년에서 6·25전쟁이 진행 중인1952년까지는 우체국 수가 매년 줄고 있었다. 1945년 692개국이던 남한의 우체국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해인 1948년에는 625개국, 6·25전쟁 중인 1952년에는 587개국으로 계속 감소했다. 해방 직후의 남한 사회가 매우 혼란스러운 데다, 6·25전쟁으로 상당수 우체국이 파괴된 결과였다.
우정타임머신6·25전쟁과 군사우체국
화살과 칼로 싸우는 옛날식 전쟁이든 총과 폭탄으로 싸우는 현대전이든 전쟁을 수행함에 통신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적정을 탐지하여 알리거나 아군 간에 정보를 교환함에 있어 가장 편리한 수단이 통신이기 때문이다. 통신이 발달하지 못한 시절에는 적정을 탐지하기 위해 간첩이나 척후병을 파견했고, 그들이 수집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비둘기를 이용하기도 했다.
우정타임머신우체국을 획기적으로 늘린 임시우체사제도
198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 우체국은 부족했다. 필요한 만큼 공급한 적이 없었으니 우체국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 재정이 빈약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계속되는 정치적 불안과 전쟁 등도 우체국의 증설을 방해했다. 40년에 이르는 일제의 통신권 침탈 기간에는 국민의 생활 편익을 위한 통신시설 증설은 기대할 수 없었고, 6ㆍ25전쟁 이후에는 파괴된 우체국 시설을 복구하기에 바쁜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그처럼 다사다난했던 100여 년의 우편 역사에서 우체국을 획기적으로 늘릴 기회가 세 번 있었다. 첫 번째는 우편사업을 재개하면서 실시한 임시우체사(臨時郵遞司) 제도였다. 1898년에 실시한 이 제도는 우체국의 설치를 통신기관이 맡는 대신 지방관에게 맡겼다. 우체사는 필요한데 재원이 없자 우체사의 설치를 지방관에게 일임함과 동시에 그것의 운영마저 맡겼던 것이다. 그 결과 1897년 전국적으로 33개에 불과하던 우체사가 1899년에는 379개로 대폭 늘어났다.
우정타임머신체신금융사업은 어떻게 부활되었나
1981년은 체신부 사람들에게 매우 어수선하고도 바쁜 한 해였다. 한국전기통신공사(KT)의 설립을 1년 앞둔 시점이기 때문이었다. 한국통신이 설립되면 전기통신 분야의 사람들은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하기에 기대와 불안으로 마음이 설렐 수밖에 없었고, 체신부에 남는 사람들은 우체국의 일거리가 대폭 줄어들므로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사 설립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어느 날, 우정국 환금관리과장 김군회가 차관실을 노크했다. 차관 오명을 만나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정타임머신차단된 남북 간의 유일한 통로 남북 우편물 교환
1945년 8월 15일 우리 국민은 일제의 오랜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게 되었다. 광복의 기쁨은 잠시, 한반도는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38선이라는 인위적인 경계선이 그어지면서 남북 간의 왕래가 차단되었다. 철도가 끊기고 전기가 끊기고 전화가 끊기고, 그리고 사람의 왕래마저 끊겼다. 물론 우편물의 왕래도 할 수 없었다. 그처럼 남북 간의 왕래를 차단한 장본인은 북한을 점령하고 있는 소련군이었다. 8ㆍ15광복을 맞은 지 채 한 달도 되기 전의 일이었다. 오랜 세월 단일민족임을 자랑하던 우리 민족은 어느 날 갑자기 한반도의 중심부를 일직선으로 자른 38선에 의해 이민족이 되다시피 했다. 남북으로 흩어진 백성들은 서로 만나지도 못하고 소식도 전할 수 없어 답답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뭔가 극적인 돌파구를 마련하지 않는 한 우리 민족은 영영 남남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우정타임머신일본 열도를 경악케 했던 독도우표 발행
우정사업본부는 2002년에 이어 2004년 독도우표 4종을 발행했다. 2002년 8월 1일에 발행된 독도우표는 ‘내 고향 특별우표’ 시리즈로 발행되어 일반인의 시선을 끌지 못했으나, 2004년 1월 16일 독도의 자연을 소재로 한 4종 우표가 발행되자 내외의 반응이 뜨거웠다. 일본 측의 반응이 즉각 날아왔다. 일본 총리 고이즈미(小泉純一郞)가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발언을 함으로써 우리 국민의 감정을 자극했다. 일본 우익단체는 선박을 이용하여 해상 시위를 벌이며 독도 상륙을 시도하는가 하면, 일본우정공사는 민간인의 신청을 받아들여 독도 사진을 담은 우표 360장을 발행하기도 했다.일본이 그처럼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북한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북한은 ‘조선의 섬 독도’라는 제목으로 18세기 초의 조선 전도와 독도 사진을 담은 독도우표를 발행했다. 독도가 역사적으로 한반도의 땅임을 강조하기 위해 독도우표를 발행했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독도우표가 발행된 것은 그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독도우표가 맨 처음 발행된 것은 1954년이었다. 그리고 그 우표의 발행을 추진한 사람은 체신부 우정국장 최재호였다.
우정타임머신근대우정역사 체신청의 변천도
2010년 11월 1일 경인체신청이 경기도 수원에서 개청식을 갖고 업무를 시작했다. 서울체신청은 서울특별시만 관할하고 분리된 경인체신청은 경기도와 인천 지역을 관할하게 되었다. 그 동안 서울체신청은 서울과 경기도 일원을 관할하고 있어 담당 지역으로 보면 넓은 편이 아니었으나, 전국 접수우편물의 80%를 차지할 만큼 업무량이 많아 분할의 필요성이 제기되곤 했는데, 마침내 그 소망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우정이야기근대 체신역사에서 진기홍 선생의 업적
근대 우정역사에 대한 사료발굴에 있어 진기홍 선생의 업적은 매우 크다. 해방 후 초대 체신과장을 지낸 길원봉과 진기홍의 일화를 통해 그 의미를 되새겨 본다.
우정이야기하늘 맑은 날, 순직 우정인을 생각한다
태풍이 모든 걸 휩쓴다 해도, 집배원의 직업적 소명을 꺾지는 못한다. 편지 한 통, 소포 하나라도 제때 전하기 위한 책임감은 대자연의 위엄도 막지 못했다. 우편물에는 안부를 묻는 편지부터 중요한 서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집배원들에겐 이 모두가 빠르고 정확히 전해야 하는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은 같기 때문이다.
우정이야기홍영식과 갑신정변(3)
개화의 첫번째 작품인 우정총국 설치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개국일로부터 16일 뒤인 12월 4일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열기로 했다. 그 뜻깊은 행사에 불순한 음모가 끼어들었다. 뒷날 갑신정변이라 불린 쿠데타 음모였다.
우정이야기홍영식과 갑신정변(2)
셋째는 미국에 의존하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감각에서 내린 판단일 수도 있었다. 당시 미국을 바라보는 개화파와 수구파 사이에는 엄청난 시각의 차이가 있었다. 수구파는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화이(華夷)적인 세계관에 입각하여 미국을 금수의 나라로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