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세계 각지에서 영토나 국경에 관한 분쟁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다. 새로운 분쟁거리보다 이전부터 고질화되었던 분쟁이 간헐적으로 재연되기도 하고 애매하던 국경문제가 다시 표면화된 것도 적지 않다.
냉전이 종식되고 새로운 국제 질서가 구축되기까지의 과도기적 현상일까? 협력관계가 증진되고 상호 의존하는 국제사회라고는 하나 영토와 국경문제는 그 발상이 전혀 다르며, 항상 여러 문제가 복합적으로 관련되어 있어서, 현재의 국제역학관계로서는 시원하게 해결할 방도가 없다.
영토 • 국경 분쟁의 사례로서는 영국 • 에스파냐의 지브롤터, 영국 •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아르헨티나 • 칠레의 비글해협, 이집트 • 수단의 하라이브, 일본 • 러시아의 북방도서 등이 있다. 11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은 그 역사적 배경으로 보아 여러 차례의 국경분쟁이 있었으며, 러시아 • 인도 • 베트남과의 국경문제는 아직도 화약고로 남아있다.
본래 영토 • 국경 분쟁은 두 나라 사이의 문제가 일반적이었으나, 여러 나라가 관련되는 복합적인 분쟁도 일어나고 있다.
난샤(南沙)군도의 경우 영토권 문제로 과거 프랑스와 일본이 다투었으나, 제2차세계대전에 일본이 패망한 후 한때 중국이 그 영유권을 주장하다가, 1970년대 후반, 근해에서 유전이 확인되고 그 경제적 가치가 높아지면서, 이 무인군도에 중국 • 타이완 • 필리핀 • 인도네시아 • 말레이지아 • 베트남의 6개국이 각기 연고를 내세워 군도의 여기저기에 군사기지와 관광시설을 마구설치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관련된 영토분쟁에는 독도문제가 있다. 독도는 울릉도에서 동남쪽으로 92km, 죽변에서 동쪽으로. 215km, 그리고 일본 사카이미나섬에서 북쪽으로 220km 지점에 있는 절해의 고도이다.
930여년전 분출한 이 화산도는 동도와 서도를 중심으로 36개의 섬으로 이루어졌으며, 주위에는 바다제비, 섬새, 팽이갈매기 등이 서식하여 천연기념물 제336호로 지정되었다. 1900년 대 초까지만 해도 바다사자들이 떼지어 살았으며 이들을 신선으로 안 울릉도 어부들은 간산도 전설을 낳았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인들이 남획하였고, 해방 후에는 미국 공군의 폭격에 큰 피해를 입어 모두 일본 홋카이도 쪽으로 서식지를 옮겼다.
독도 주변의 풍부한 오징어어장은 울릉도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으나, 1948년 6월 3일 미국 공군기의 폭격 연습에 30여 명이 떼죽음을 당한 한이 맺힌 곳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중 우리 행정력의 공백을 틈타 일본은 독도에 일본령이라고 쓴 팻말을 세웠으며, 1952년 이승만라인, 즉, 평 화선안에 독도가 포함되자 한일간에 여러 차례 신경전이 벌어졌다. 1953년 울릉도 출신의 독도의용수비대원들은 일본이 세운 독도의 못말을 제지하고, 여러 차례 일본의 무력 도발을 실력으로 물리쳤다.
그러던중에 1954년 9월 15일, 3종의 독도보통우표가 발행되어 일본인들을 비롯한 온 세계 우표수집가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독도의 영유권문제는 한일회담이 열릴 때마다 제기된 안건이었지만, 한국 정부는 독도가 한국 영토의 불가분의 일부이며 원초적으로 이 문제가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는 태도였다.
1954년 9월 25일 주일한국대표부에서는 독도 영유권에 관한 일본 정부의 주장에 대한 한국 정부의 견해를 발표하였다. 즉, 일본 정부가 각종 문헌에서 역사적 사실이라고 인용한 근거가 불확실하고, 국제법상 독도 영유 조건을 충족하고 있다는 일본 정부의 주장이 근거없음을 세종실록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을 전거로 5항에 걸쳐 조목조목 반박하였다.
신라시대 독도는 우산도(于山島)라 불렀는데, 삼봉도나 울릉도의 異名에 지나지 않다는 일본의 주장은 독도문제의 키포인트이며, 일본으로서는 독도문제는 아직도 미결로 남아 있는 셈이다.
1980년 일본이 다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자 단 한 사람이 라도 우리 주민이 독도에 살고 있디는 증거를 보이기 위해 울릉도민 최종덕씨가 서도의 벼랑 어귀로 주거를 옮기고 울릉읍 도동 산67번지의 지번을 얻었다.
그는 수중창고를 짓고, 특수어망을 개발하여 생활의 터전을 마련하였으며, 서도 중간에는 물골이라는 우물까지 파서 초인 적인 삶을 살다 1987년에 세상을 떠났다.
지금 독도에는 1천여 그루의 소나무와 동백나무가 뿌리를 내렸으며, 정부에서는 독도에 1천 톤급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부두를 1996년까지 완공하여 독도를 관광지로 개발할 계획이다.
독도우표의 2환권(보라빛 : 제3종요금)과 5환권(청색 : 엽서요금)은 서도를 그렸고, 10환권 (녹색 : 제1종요금)은 동도를 원도로 하였다.

이 우표들은 모두 국내우편용의 저액권이며, 2환 • 5환권은 각각 500만장, 10환권은 2,000만장이 발행되었으나, 당시 일본행 항공우편의 기본요금이 25환이었으므로 상당량은 일본행 우편물에도 첩부되었으리라 여겨진다.
독도우표에 허를 찔린 일본의 반응은 엄청났다. 그해 11월 '관세정률법'에 의해 공안을 해치는 물품으로 규정되어 독도우표가 붙은 우편물은 모두 한국으로 반송키로 각의에서 의결하였으나, 한국 우정당국은 이에 대한 만국우편연합의 관계규정을 사전에 충분히 연구 검토하였기에 추호의 양보도 없었다.
일본은 차선책으로 독도우표에 먹칠을 해서 배달한다는 풍문도 있었으나, 요시다(吉田)내 각이 붕괴되고 일본 정계가 회오리바람에 휘말리면서 이 문제는 흐지부지되었고, 당사국인 일본을 비롯한 전세계에 유통된 독도우표는 영유권을 천명한 한국의 TKO승으로 끝났다.
당시 우정국 촉탁으로 있던 황우상씨는 그의 아이디어를 이석영 국내우편과장이 받아들였다고 하였으며, 법률가인 최재호 우정국장은 국제법상의 대응책을 사전에 강구하였다고 그의 회고록에 기술하고 있다.
필자는 당시 일본으로 보내는 편지에 독도우표를 자주 사용하였으나, 반송된 것은 없었으며, 독도우표에 먹칠한 봉투를 구하려고도 애썼으나, 끝내 구하지 못했다.
독도우표가 발행된 지 1년째인 1955년 9월 15일에는 독도우표 한 세트를 붙여 일본으로 기념커버를 보내어 회수한 적도있다. 금년은 독도우표 발행 40주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