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밖에 있는 시간이 길어 계절에 민감하게 일하셨을 것 같아요. 좋아하는 계절, 혹은 특별히 싫어하는 계절이 있나요? 옛날에는 걸어서 우편물을 배달했기 때문에 겨울이 오면 동상 걸리는 집배원들이 많았어요. 지금은 방한은 잘 되는 편인데 오토바이를 타면 사고위험도 있고 오래 달리면 손발이 시린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겨울은 썩 반가운 계절은 아니네요. 그나마 여름에는 물도 마시고 얼음도 먹으며 더위를 식히지만, 겨울에는 아무리 껴입어도 한계가 있거든요. 반면 봄, 가을은 일하기에도 손색없는 날씨와 색이 예쁜 계절이라 좋아합니다.
신재선 집배원은 올해 가을, 겨울이 집배원으로 맞는 마지막 계절이다.
이제 집배원으로 두 번의 계절이 남았는데 어떤 생각 드시나요? 처음 시작하던 때가 많이 생각납니다. 저를 키워주신 할머니 생각도 나고 난생 처음 상경 길도 생각나네요. 봄, 여름, 가을, 겨울 또 다시 봄. 이렇게 계절을 보내면서 제 인생만 살아왔던 것도 아니었어요. 사랑하는 아내와 가정을 이루고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가족을 이루어 함께 맞았던 계절도 많았네요. 딸만 셋인데 아이들도 잘 커주었고, 저 또한 나름대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하니 남은 두 계절도 잘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처음에 어떻게 우체국에 들어오시게 되었나요? 한국전쟁에 참전하신 아버님이 1953년 7월 17일, 휴전 협정을 10일 남겨둔 날 전사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보훈 대상자입니다. 만 19세 때 보훈처를 통해서 우체국에 들어오면서 집배원 일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저희 집이 강원도 정선이었는데 정선에서 서울까지 오려면 기차타고, 버스타고 8시간이 훌쩍 넘는 시간이 걸렸어요. 지금으로 치면 한국에서 미국에 가는 기분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처음 동대문우체국을 오랜 시간을 걸려 어렵게 만나서인지 그 인연만큼 오랫동안 머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예전 집배업무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처음 집배원 일하던 시절에는 가방에 편지 넣으면 그때 당시 20kg정도 됐어요. 그 가방을 메고 걷고, 뛰고, 버스타고 하면서 돌아다닐 때 힘들었죠. 집배원, 경찰관, 군인은 업무 중엔 버스가 무료였어요. 운전하시는 분들 중에는 싫어하시는 분들도 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리고 예전에는 집배업무가 쉬는 날이 없었어요. 대신 구역인원에 3명 정도 여유 인원이 있어서 돌아가면서 쉬었어요. 그렇게 1년 365일 집배원은 쉬지 않고 반가운 소식을 전했었지요. 8시에 출근해서 10시까지 구분하고 큰 가방에 편지 한 짐 가지고 배달 나갔다 들어와서 다시 오후배달을 나가 5시쯤 들어와 하루를 정리했죠. 밤늦게까지 업무를 할 때는 크리스마스가 있는 12월 뿐이었어요. 12월 초부터 한 달간 크리스마스 특별소통기간이었어요. 우편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고 대학생들도 파트타임으로 많이들 와서 일했지요. 그런데 90년대 중반부터 크리스마스 카드가 서서히 줄기 시작해서 새천년 들어와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어요. 휴대폰, 이메일 등 대체수단들이 많이 생기면서 그렇게 된 것 같아요.
40년 동안 무리 없이 집배원 인생을 살아온 것이 자랑스럽다는 신재선 집배원. 기분 좋은 소식을 전하며 기뻐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자부심이 느껴진단다.
지금은 사라진 것들 중 그리운 것들이 있나요? 연말에는 연하카드, 크리스마스카드, 크리스마스 씰 같은 것. 그리고 연필이나 볼펜으로 직접 써 보내던 편지들이 이제 거의 없어졌어요. 대부분 전자우편이 눈에 많이 띕니다. 손으로 쓴 편지에는 마음이 담겨있다 보니, 편지를 보내면 답장을 기다리지요. 그 마음으로 집배원도 기다렸던 것 같아요. 그래서 늘 집배원은 반가운 사람들이었는데 요즘은 독촉장, 고지서 같은 썩 반갑지 않은 소식들을 많이 전하다보니 그때 그 손 편지나 크리스마스카드가 그리울 때가 있답니다.
40년 동안 집배원 유니폼을 입고 살아온 신재선 집배원
한동네를 오래 맡으시다보니 주민들의 정서가 변해가는 모습도 느끼실 것 같습니다. 물론 건물자체가 변했으니까 주민들도 변했죠. 전에는 중랑천 동부간선도로 개천까지 집이 있었고, 촬영소라고 하는 산꼭대기에도 집이 있었어요. 그때는 부엌이 공동부엌이라서 점심때가 되면 동네 주부들이 모여 밥을 함께 지었어요. 밥 때가 돼서 지나가면 밥 먹고 가라고도 하고 커피도 타주곤 했어요. 거절하면 굉장히 서운해 하고 그랬거든요. 그게 정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도움 받지 않아도 혼자 충분히 해결하면서 살아가니까 서로 볼 일도 적어지고, 가능하면 불필요한 접촉도 피하려고 하죠. 그 점이 좀 아쉽습니다. 그전에는 정이 담긴 가족 간의 편지들 많았어요. 특히 70년대 말에는 중동노동자들의 편지가 많았는데 그 편지를 받고 좋아하던 가족들 표정이 생각나네요.
가슴에 사물함에 항상 붙어있던 신재선이라는 이름
요즘 새로 들어오는 집배원들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낄 때가 있을까요? 집배원들 학벌이 좋아졌죠. 최하 고졸이고 대졸자들도 많습니다. 또 굉장히 열심히 합니다. 젊은 세대라고 해서 게으르거나, 덜렁대지 않아요. 예전 집배원들도 열심히 했죠. 어떤 분은 3년 동안 설, 추석, 크리스마스를 포함해서 하루도 안 빠지고 일하신 분도 계셨으니까요. 하지만 업무적인 면에서 본다면 지금보다는 예전이 쉬웠다고 볼 수도 있겠죠.
일 하시면서 기억나는 일이 있으시다면요?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건 집배업무가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라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동료애 또한 유별나요. 자신의 일로 동료들을 힘들게 하지 않으려고 애도 쓰지만 또 동료들 일을 먼저 도와주려고 무척이나 애를 써요. 정말 오래전 일이 생각납니다. 우리 큰아이가 걷기 시작했을 때 집사람이 너무 아팠어요. 작은아이가 젖먹이였는데 아내가 아이를 돌볼 수가 없으니까 제가 아이를 업고 출근을 했어요. 선배들이 구분만 해주고 그냥 집에 들어가라고 하고는 제 구역까지 두 구역씩 일을 해주시더군요. 정말 눈물나게 고마웠어요.
신재선 집배원은 젊은 시절의 모습을 나만의 우표로만들어 기념하고 있다.
집배원 유니폼 처음 입었을 때 어땠나요? 글쎄 유니폼을 입었을 때 기분은 생각이 나지 않아요. 다만 집배원 유니폼을 입은 아빠의 모습을 보고 아이들이 아버지의 직업에 대해서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봤을 때 기분이 좋았어요. 이제는 다 큰 막내딸이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데 교수님 면담 때 “아버님이 좋은 직업을 가지셨구나(좋은 일을 하시는구나).” 라고 말씀하셨는데, 딸아이가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했다고 하더군요. 아버지가 힘들게 일하니까 아마 자식 입장에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그랬던 거 같아요.(웃음)
가족 이야기 좀 해 주세요. 제가 20살이고, 집사람이 18살 학생 때 결혼을 했어요. 동구능에서 한 달에 천 원짜리 월세로 시작한 신혼생활이었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같이 나와서 일할 때 아이들 혼자 키우느라고 힘이 들 텐데도 불평불만 없이 응원해준 아내가 너무 고맙고 사랑합니다. 큰딸 혜숙이, 조금 어려운 점도 있었지만 아빠 늘 응원해 줘서 고맙고 지금 열심히 잘 살고 있으니까 앞으로도 잘살아 갈 것이라 믿어요. 둘째는 작년에 결혼했는데 지금처럼 알콩달콩 잘 살아가길 바라고요. 늦둥이 막내딸 대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분야에서 인정받고 성공하길 바랍니다.
40년 집배원 인생을 정리하는 감회가 어떠신지요? 한눈 안 팔고 여기서 40년 동안 별 무리 없이 잘 해왔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요. 며칠 전에 세어보니 39년하고 5개월 15일이더라고요. 그 긴 시간 동안 기분 좋은 소식 전하면서 기뻐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할 때도 마음이 부자가 되는 기분인데요. 이런 것도 일종의 자부심이겠죠. 어찌 보면 공직자로 나름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고, 저희 가족들도 더불어 행복하게 잘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저도 국가에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고 늘 나라가 잘되길 바랍니다. 그래야 국민들도 잘 살 수 있을 테니까요. 나라가 더 발전하고 더불어 집배원들의 처지가 지금보다 더 나아지고 사회적으로도 동정이 아닌 인정을 받고 당당하게 일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뒤 돌아보니 고마운 사람들이 정말 많아요. 선배님들 후배여러분들 제가 집배생활에서 너무 큰 도움을 받아서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할 겁니다. 평생 감사하는 맘으로 열심히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