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명인, 명장이 되기까지
2007년 5월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대한민국 김치명인이 되던 날, 김순자 명인의 김치인생에 이보다 더한 행복은 없었다.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해.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지. 2002년에 나라에서 철탑훈장 받았을 때도 이렇게까지 가슴이 벅차지는 않았어요. 십 년 가까이 매달려 결국 이뤘으니까 그 기쁨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어요?” 사실 그녀에게 김치명인이 되는 건 둘째였다. 식품명인 지정품목에서 제외된 김치를 전통식품으로 바로 세우는 일이 우선이었다. “그 당시 농림부 한 관계자 말이 김치는 대한민국 사람 누구나 먹는 음식이라서 특별할 게 없다는 거예요. 명인을 선정하는 기준도 애매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어. 그건 천 년이 넘는 전통 김치의 소중한 역사를 모르고 하는 소리였어요.”
김 명인은 그들의 말에 반기를 들었다. 매일 밥상에 오르는데다 한국인 누구나 먹는 음식이라면 그것이 오히려 특별한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지역적 특색이 있고 역사적인 전통제조법이 있다면 김치도 식품명인으로 지정되어야 했어요. 김치를 지정품목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내 주장이 누가 듣더라도 맞는 말이었지.” 이후 김치명인 선정 기준과 관련해 속속들이 새 법안이 만들어지고, 전통식품 분야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심사위원까지 살림이 꾸려졌다. 서류심사와 현장실사, 김치시식평가 등 전 과정에서 김 명인은 최고 점수를 받으며 대한민국 김치명인 1호의 탄생을 알렸다.
김 명인의 행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듬해 ‘대한민국명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글쎄, 명장 지정품목에도 김치는 제외되어 있지 뭡니까.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이라고 어렵겠나’ 하는 생각에 또 앞장서서 나선 거예요.” 전통 전승이 핵심인 식품명인과 달리 대한민국명장은 한 분야에서 15년 이상 종사한 산업현장 최고 수준의 숙련기술을 보유한 기술자를 선정하는 데 중점을 둔다. “전통제조비법은 당연지사고, 김치산업에 있어서 고용창출, 특허, 논문, 사회공헌활동 등 다 갖춰야 했어요. 한마디로 국가경제발전에 얼마나 기여했는지가 관건이었죠.” 6년간의 긴 기다림 끝에 김치명장 선정과 관련된 새 법안과 기준이 마련되면서 2012년 9월 마침내 김 명인은 고용노동부로부터 ‘식품명장 1호’로 지정되었다.
김치는 나의 삶, 나의 운명
김 명인의 김치는 1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1800년대말 무렵 편찬된 음식 관련 고서인 <시의전서(是議全書)>에 등장하는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김치를 재해석해 전통제조법 그대로 김치를 만든다. 충남 당진의 한 종갓집에서 태어난 김 명인은 할머니에서 어머니로, 어머니에서 김 명인에게로 김치 비법이 전해져 3대째 이어진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약한 몸과 알레르기 증상을 보이던 특이체질 때문에 그녀에게 김치는 생명이자 약으로 통했다. “형제가 여섯인데 7남매 중에 유독 김치를 좋아했다고 해요. 김치 없으면 밥도 안 먹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하니까. 집안에 김치 담그는 날이면 언니나 동생들은 다 밖에 나가 노는데 나만 어머니 옆에 꼭 붙어서 김치를 담갔을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김치사랑이 대단했어요.”
그 옛날 김 명인의 집안에선 새우나 조개, 황석어가 나는 제철마다 젓갈을 손수 담갔다. 소금에 묻어 맛깔스럽게 잘 삭은 새우젓과 멸치젓, 황석어젓을 한데 섞어 생선 뼈가 아스러질 정도로 세 번 달여낸 뒤 삼베 보자기에 세 번 걸러 맑은 액젓이 되어야만 김치에 넣을 재료로 쓰였다. 익을수록 시원하고 담백한 맛을 낸다는 이유에서 배즙과 무즙, 양파즙으로 천연 단맛을 내고, 액젓과 함께 황태육수를 넣어야만 김치양념이 완성되었다. 김치를 담그는 지난한 과정이 소녀 김순자의 눈엔 더할 나위 없는 호기심으로 다가왔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때부터 김치를 음식이 아니라 하나의 기술, 예술로 바라봤던 것 같아요. 어린 꼬맹이가 할머니와 어머니 옆을 졸졸 쫓아다니면서 그렇게 질문을 던졌다고 해요. ‘생선을 왜 소금에 묻어두냐’고, ‘젓갈은 어떤 맛이냐’ 고 하면서 말이죠.” 일상에서 자연스레 익혀 몸에 밴 김치 맛, 김 명인에게 김치는 그야말로 운명이었다.
김치의 대중화, 세계화를 이루다
김 명인이 김치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남달랐다고는 해도 한평생 김치사업에 매달릴 것이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결과였다. “직장 다닐 무렵 점심 먹으러 식당에 가면 하나같이 김치가 영 입에 안 맞는 거예요. 입에 맞는 곳을 힘들게 찾는다 해도 그 맛이 변하기 일쑤였죠.” ‘왜, 바깥에서 사 먹는 김치는 입맛에 맞지 않을까? 집에서 담근 김치를 식당에서도 먹을 수는 없을까?’ 하는 물음이 그녀의 머릿속을 채웠다. 더욱이 1985년 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김치가 맛이 없다고 말하는 외국인을 우연히 본 김 명인은 자문에 대한 답을 어서 빨리 찾아야 했다. “내가 만든 김치를 그 외국인이 평가한 건 아니었지만 뭐랄까, 모멸감이랄까? 자존심이 상했어요. 김치가 약보다 좋은 음식인데, 그 귀한 것을 제대로 먹지 않고 맛을 평가하니 답답할 노릇이었죠.” 김치의 대중화, 세계화를 표방하며 이듬해인 1986년 김 명인은 본격적으로 김치사업에 뛰어들었다. ㈜한성식품의 시작이었다. 어머니가 하던 전통제조법 그대로 정성 들여 담근 김치는 전국 유명 호텔과 레스토랑에 납품되기에 이르렀고, 김치 맛이 좋다는 손님들의 칭찬이 자자해 입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100% 국내산 농산물을 고집하고 직접 담근 젓갈을 사용하고 천연재료로 맛을 내는 등의 철칙은 32년째 단 한번도 어긴 적 없는, 예나 지금이나 목숨처럼 지키는 김 명인이다. 그녀의 바람대로 한성김치는 세계에서 더 주목받는 김치로 우뚝 섰다. 수출김치의 고급화, 차별화, 다양화를 내세워 포기김치와 같은 전통김치뿐만 아니라 특허 받은 웰빙김치인 미니롤보쌈김치, 양배추깻잎말이김치, 치자미역말이김치 등 수출품목이 수십 개가 넘는다. 그도 그럴 것이 김 명인이 보유하고 있는 김치 관련 특허만 25종에 달한다.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은 법이잖아요. 이왕이면 먹는 맛, 보는 맛 둘 다 담아서 세계인들이 김치를 아름다운 음식으로 즐겼으면 했어요.” 기능성김치로서 건강함도 놓치지 않았다. 요오드 성분이 없는 김치에 요오드가 풍부한 미역을 첨가해 만든 김치, 위장을 보호하는 양배추와 철분이 풍부한 깻잎으로 담근 김치, 볶거나 삶지 않은 상태의 낮은 염도로 브로콜리를 절여 만든 김치가 대표적이다.
전통은 공유할수록 깊은 맛을 낸다
김 명인은 2012년 우체국쇼핑과 연을 맺었다. 한성김치가 판매되는 여러 온·오프라인 쇼핑채널 중에서 그녀는 유독 우체국쇼핑에 애착을 갖는다. 전국 방방곡곡, 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좁은 시골길에까지 우체국 직원들이 소중하게 자신의 김치를 배달해준다는 이유에서다. “처음 입점했을 때부터 우체국쇼핑은 특별했어요. 판매량을 떠나서 우체국이 갖는 이미지, 역할이 김치에 고스란히 담겨 고객에게 전달된다고 할까요? 내 딸, 내 아들을 위해 김치를 담가 보내는 엄마의 마음, 만든 이의 마음까지 고객에게 전달되는 것이 우체국쇼핑의 특별함이죠.” 한성김치를 판매하는 일반 매장이 없다 보니 우체국쇼핑을 통해 전국 각지에서 명인의 김치를 손쉽게 맛볼 수 있다는 데 그녀는 매번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이다.
이제 김 명인은 김치의 세계화를 위해 김치전문학교 설립에 박차를 가하려 한다. 현재 그녀의 이름이 붙은 김치체험관을 2012년부터 운영해오고 있지만 보다 더 전문화, 세분화시킬 계획이다. 식품명인 최초로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을 전승자로 지정해 눈길을 끌기도 한 김 명인은 전통의 맥이 이어지기 위해선 많은 수의 전승자가 나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가족을 포함해 우리 회사에서 30년간 근무한 직원까지 7~8명을 전승자로 뒀어요. 3세부터 노인까지 내외국인 가릴 것 없이 5주간 김치 전통제조법을 전수하는 김치체험관에선 이미 수백 명이 배출되었고요. 이 좋은 것을 혼자 알아서 뭐합니까? 널리 알리고 많은 이들과 함께해야 명인도 전통도 빛이 나는 거죠.” 향후 전 세계 유명 셰프들이 그녀의 김치전문학교에 찾아와 우리 김치를 배우고 익혀 세계의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김치가 선보여지는 그날까지 김 명인의 김치사랑은 계속될 것이다.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29호, 김치명인 1호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1호가 탄생한 건 1994년의 일이다. 전통식품의 계승 발전을 이유로 시작된 식품명인이지만 그 당시 대다수 지정품목이 전통술에 한정된다는 여론이 높았다. 2000년대 초 ‘전통식품의 기준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한국의 대표적인 발효식품 ‘김치’에서 출발했고 그 중심엔 김순자 명인이 자리한다. 식품명인 지정품목에 김치를 포함시키기까지 십여 년, 대한민국 김치명인 1호는 그렇게 탄생했다.
김치명인 1호 김순자 명인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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