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영화 사기꾼 김경식입니다.
1990년대 TV를 보며 자란 세대라면 누구나 개그맨 김경식에 대한 추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호감 가는 발랄한 외모에 만화 주인공보다 더 딱따구리 흉내를 잘 내던 모습, 춤과 노래까지 완벽했던 5인조 그룹 틴틴파이브의 멤버로 신나는 무대를 선보였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데뷔 초와 크게 변함없는 그의 외모를 보면 믿기 어렵지만, 김경식은 올해로 데뷔 25년 차를 맞이했다.
“어려 보이는 게 마냥 좋지는 않았어요. 어릴 땐 클럽에 갈 때마다 항상 주민등록증을 보여줬어야 했고, 담배를 사도 어르신들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시기도 했거든요. 데뷔 후에도 여성분들보다는 초등학생들한테 인기가 많았죠.”
지난 25년의 긴 방송생활 동안 개그맨부터 가수, 배우, MC까지 다양한 활동을 해왔던 그를 지금은 뭐라고 부르는 게 좋을까? 방송인이라는 평범한 호칭이 뭔가 아쉬웠던 참에 몇 년 전부터 그에게 훨씬 그럴듯한 이름이 하나 생겼다.
“지금은 코미디 활동을 안 하니까 어린 친구들은 저를 ‘영화 소개하는 아저씨’로 알고 있어요. 별명도 많이 바뀌었죠. 딱따구리, 로보캅 등을 거쳐서 지금은 ‘영화 사기꾼’으로 불려요.”
그가 졸지에 사기꾼이 된 건 망작인 영화도 그럴싸한 영화로 바꿔버리는 탁월한 재주 때문이다. 김경식은 MBC 영화정보 프로그램 <출발비디오여행> 속 대표 코너인 ‘김경식의 영화 대 영화’를 2002년부터 지금까지 15년 동안 진행해왔다. 그가 지금까지 소개한 영화 편수만 자그마치 2천여 편. 틴틴파이브나 딱따구리 김경식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는 있어도 ‘영화 대 영화’의 진행자 김경식을 모르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거의 없을 만큼 그를 장수 방송인이자 영화인으로 만들어 준 프로그램이다.
“‘분명히 예전에 재미없게 봤는데, 오늘 소개하는 걸 보니까 괜찮네.’ 하고 영화를 다시 봤는데 결국 또 재미가 없는 거죠. ‘덕분에 3시간 또 날렸네요’라면서 이번에도 또 속았다고 하는 시청자분들이 많으세요. 물론 좋은 의미로 해주시는 칭찬이니 감사할 뿐이죠.”
또 다른 의미의 영화인
매주 목요일마다 한해도 빠짐없이 15년 동안 영화 대 영화 녹음을 해온 김경식에게 출발비디오여행은 마치 직장과도 같다.
“2002년에는 이런저런 방송활동으로 한창 바쁠 때였어요. 기존에도 개그맨 전창걸 씨가 맡아서 진행하면서 인기를 얻고 있던 코너였는데, 다른 프로그램으로 옮겨가면서 저한테 제의가 왔어요. 여러 프로에서 MC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로그램의 코너 하나를 더빙해달라는 제의가 좀 당황스럽기도 했어요. ‘나를 어떻게 보고 이러나’ 싶기도 했으니까요. 용돈 벌이 겸 시작하자 했는데 이게 참 무서운 거죠. 이제는 제 이름 앞의 타이틀이 바뀌었으니까요. 시간이 지나고 코너가 성장하면서 제가 코너 덕을 보며 살고 있죠.”
일요일 12시면 어김없이 시작되는 익숙한 프로그램인 출발비디오여행 그리고 그 속의 간판 프로그램 영화 대 영화는 지금도 굳건히 동시간대 시청률 1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10년 전부터 타 방송에서도 같은 시간대에 비슷한 콘셉트의 코너를 진행했지만 원조의 저력을 이길 수는 없어 모두 다른 요일로 편성을 옮겨야 했다. 예능 트렌드도 분기별로 바뀌는 요즘 같은 시대에 15년 동안이나 시청자들을 TV 앞으로 모으고, 그것도 모자라 매번 그들을 속일 수 있을 만큼의 놀라운 매력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제 애드리브 때문도 아니고, 영화를 고르는 안목이 있어서는 더더욱 아니에요. 일주일 동안 심혈을 기울여 영화를 고르는 연출부, 선택한 영화를 분석해서 재치 있는 글을 써주는 작가 덕분이죠. 또 제가 녹음할 때 옆에서 관객 이상으로 웃어주고, 추임새를 넣어주는 아나운서 두 분의 역량까지 합해져 삼박자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만들어준 대본에 언제나 플러스 알파를 해줘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녹음을 해요.”
15년 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노하우와 스태프와의 찰떡 호흡으로 녹음 역시 척하면 딱, 30분이면 NG도 거의 없이 끝이 난다. 이렇게 깔끔하게 완성된 프로그램이니 시청자들이 15년간 변함없이 속고 또 속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긴 시간 동안 수천 편의 영화를 소개해온 그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뭘까? “사실 이건 엄마가 좋은지 아빠가 좋은지 묻는 질문 같은 거예요. 답이 없죠. 영화에 대한 취향은 상당히 주관적이고, 또 기분에 따라, 세월에 따라 시각이 늘 변하니까요. 좋은 영화를 고르려면 영화를 많이 보면 돼요. 음식도 그렇잖아요. 많이 먹어본 사람이 맛의 깊이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처럼요. 영화 전문가의 칼럼에 의존하기 보다는 내가 직접 많이 보면 영화를 고르는 능력도 커져요. 예전에 비디오 가게에 가면 주인아저씨한테 요즘 뭐 재밌는지 물어봤잖아요. 그런데 아저씨도 바빠서 모든 영화 다 못 보거든요. 아저씨 취향과 내 취향도 다른 거고요. 자기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을 즐기세요.”
시청자들에게 영화를 소개하며 15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크고 작은 영화계의 변화를 직접 피부로 느껴왔을 그이기에 그의 조언이 더욱 와 닿는다.
“세상이 바뀌었어요. 이제 영화는 ‘킬링타임’용이 아니에요. 영화 한 편에 인문학이 있고, 과학과 경제의 핵심이 들어있어요. 커다란 산업이고, 공부가 될 수 있는 제재가 되죠. 영화 한 편을 보고 토의를 하거나 자기 생각을 얘기하는 기회를 갖는다면 그것만으로 굉장히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거에요.”
영화 대 영화 역시 단순히 킬링타임용 프로그램이 아니다. 웃고 넘기는 영화소개가 아닌 영화 선정부터 대사 하나하나에는 시놉시스의 핵심과 인물의 캐릭터, 때로는 풍자와 해학까지 담겨있고, 결정적으로 우리에게 영화를 보고, 고르는 안목을 길러주는 역할을 한다. 영화를 창조하는 작업은 아니지만 이것 역시 영화의 ‘재창조’라는 관점에서 영화 대 영화는 우리 영화 역사에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가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영화인’ 이라는 호칭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터이다.
아이들과 친구가 되는 최고의 아빠
“정말 익사이팅하죠. <토끼와 거북이>를 백 번은 넘게 읽어줬는데 항상 내용이 달라요. 처음 한두 번은 원본 그대로 읽어줬고, 그다음부터는 주인공을 매번 바꿨어요. 아이들에게 주인공을 시키고 싶은 캐릭터를 물어보고, 그대로 이야기를 새로 만들어주는 식이에요. ‘오늘은 망아지가 좋겠다고? 망아지 이름은 뭘까? 망아지는 누구랑 시합을 하고 싶어 할까?’ 이렇게 물으면서 하면 그대로 교육이 되는 거죠.”
여기에 김경식 특유의 재치를 발휘한 깜짝 퀴즈와 성대모사까지 섞어 매일 밤 세 사람이 만드는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한다. 큰아들이 영어 영작 발표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아빠’라고 말한 것도 놀라운 이야기가 아니다. 최근 큰아들 민우는 ‘그는 슈퍼맨입니다. 그는 요리도 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자전거를 가르쳐줍니다. 그는 바로 우리 아빠입니다’라는 가슴 벅찬 문장으로 그의 눈에서 눈물을 쏟게 만들기도 했다.
“연애할 때 아내에게 연애편지 한 번 써준 적이 없었는데, 아이들은 뱃속에 있었을 때부터 편지를 썼었어요.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 고쳐 쓸까봐 풀로 붙이고, 매년 생일 때 열어보게 했어요. 우체국에서 했던 타임캡슐 편지 ‘슬로 레터’와 비슷한 콘셉트인 거죠. 글씨를 못 읽을 나이일 거라 그림까지 그려서 정성스럽게 줬는데, 나이가 어려서 뭔지 모르고 다 찢어버렸더라고요.(하하)” 장난처럼 말하지만, 아들과 가족을 이야기할 때 그의 표정은 방송인 김경식과는 사뭇 다르다. 행복과 애틋함이 동시에 미안함과 고마움이 모두 합쳐져 그의 표정을 더욱 인간적이고,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25년 동안의 방송생활, 15년의 영화 대 영화 그리고 10년의 육아라는 ‘익사이팅’했던 삶의 경험은 그에게 소중한 교훈과 깨달음, 그리고 전보다 훨씬 성숙해진 지금의 김경식을 만들어주었다. 영화와 방송, 가족과 함께하는 매일이 노하우가 되는 그의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궁금해진다.
Profile
김경식
1992년 SBS 공채 개그맨 1기
1994년 틴틴파이브 그룹 결성, SBS 인기상 수상
1999년 MBC 코미디대상 우수상 수상
2002년 출발비디오여행 ‘김경식의 영화 대 영화’ 진행
2012년 MBC 방송연예대상 라디오부문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