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반 만에 날갯짓을 시작한 ‘독서포럼 나비’
우체국 안에 ‘독서동호회’가 있다는 건 분명 반갑고 흥미로운 이야기다. 창구 직원이든 집배 담당이든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그곳에도 책 읽을 여유가 존재한다니 새롭게만 들린다. 몇 명의 회원들이, 언제 어디에 모여 무슨 책을 읽는지, 참 많은 궁금증을 안고 부산진우체국으로 향했다. 때마침 신축공사 중이라 개금동 우편물류센터와 부전동 영업과(창구)로 나뉘어 있는 상황. 독립된 사옥에서 오랜 역사를 이어온 부산진우체국의 진면목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쉽기도 했다.
“원래는 큼직한 단독 건물로 가야동에 있었는데 작년부터 공사를 시작해서 우리 회원들도 두 곳으로 나뉘어 있죠. 저랑 몇몇 분은 여기 물류센터에 있고, 서면(부전동)에도 두 분이 근무 중입니다. 그동안 떨어져 있어서 불편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코로나 이후 오늘 처음 만난다고 생각하니 그저 좋네요.”
들뜬 목소리로 취재진을 반기며 우체국과 동호회를 소개하는 강지원 물류실장. 2019년 6월 독서모임을 처음 결성하여 이끌어오고 있는, 실질적인 동호회장이다. 그러나 나이, 성별, 연차 등등 물리적인 모든 조건을 떼고 오로지 책 앞에서 동등한 모임이기에 서로서로를 ‘선배’라고 부르며 존중할 뿐, ‘회장’은 없는 동호회라고 한다. 30년 가까이 우정인으로서 우체국만 보고 달려왔다는 강 실장은 “남편도 우체국에서 만나 결혼했다”며 웃는다. 근무시간은 물론이고 퇴근 후에도 업무의 연장이라 생각하며 회식 또 회식만 할 뿐, 책과는 담을 쌓고 살았던 그가 어쩌다 책을 읽기 시작하여 모임까지 만들게 된 걸까?
“같은 일을 하고 있는 남편(정인구 의령우체국장)과 언제부턴가 사이가 너무 나빠졌어요. 둘 다 우체국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좋아하다 보니 각자의 일에만 매달리고 끝나면 회식하기 바빴죠. 그러다 3년 전 우연히 독서특강에 가게 됐는데 그날 강연을 통해 내가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로만 살았단 걸 깨달았어요. 그때부터 책에 흠뻑 빠져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읽으면서 안 좋았던 부부 사이도 회복하고 가정이 바로 서는 걸 경험했습니다. 우리 직원들은 저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고 책이 주는 에너지를 좀 더 일찍 만날 수 있도록 돕고 싶은 마음에 독서모임을 제안했죠.”
책 읽기말고도 할 게 너무나 많은 직장인들이기에 처음엔 대부분 시큰둥했다. 자발적으로 모이기를 원했던 강 실장은 수시로 독서의 좋은 점을 전달하며 동료들을 기다렸고, 1년 반이 지난 뒤 드디어 7명의 회원이 모였다. ‘독서포럼 나비’의 첫 날갯짓이 시작된 것이다.
책에서 발견한 여유, 일상을 바꾸다
‘나로부터 비롯되는 목적 있는 책 읽기’라는 뜻의 독서포럼 나비. 책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전하며 인생의 주인이 되고 싶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동호회 활동 전후로 다들 큰 변화를 겪었다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달라진 사람은 ‘소포실 이경용 주무관’이라고 입을 모은다.
“저 역시 데면데면했던 아내와 대화가 부쩍 늘고 사이가 좋아졌어요. 거실 TV를 치우고 도서관처럼 꾸며 딸아이와 함께 책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서 삶의 방향이 잡힌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좌중 박수가 터져 나온 순간. 회원들은 이 주무관을 놓고 아예 “인상이 달라졌다”며 추어올렸다. 이경용 주무관의 이런 긍정적 변화를 보고 한참 어린 후배도 동호회 활동을 시작했다.
“독서라는 취미를 갖고 저보다 나이나 경력이 한참 많으신 선배님들과 얘기하며 생각을 비교해보는 게 재밌습니다. 말주변이 없어서 처음엔 제 생각을 말하는 것조차 힘들었는데, 이젠 발표하면서 성취감까지 느껴요. 창구에서 고객 응대하는 것도 훨씬 수월해졌죠.”
서면우체국에서 우편창구를 맡고 있는 이동한 주무관의 이야기다. 그의 말에 격하게 공감한 회원은 양정동우체국의 정난주 국장이었다. 한동안 젊은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때는 말이야”를 입 밖으로 꺼내곤 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다양성을 인정하게 됐단다. 동호회에서 나이가 가장 어린 막내 주무관과 한 우체국을 총괄하는 국장의 생각이 이렇게 통할 수 있다니 신기하다. 동호회 활동 이후 고객과의 만남이 편해진 사람은 또 있었다.
“현장에 직접 나가는 저도 책을 읽으면서 좀 더 편해졌어요. 예전엔 마음이 너무 급해서 문을 늦게 여는 고객들에게 화가 나기도 했는데 책이 주는 감성이 마음에 쌓인 덕분인지 요즘은 여유가 많이 생겼죠. 무엇이든 기다리고 이해하는 마음을 책 속에서 발견했습니다.”
집배원으로서 누구보다 바쁜 하루를 살고 있는 권혁 주무관의 이야기다. 책이 전하는 감성이 그의 마음에 쌓일 때마다 우편물을 받는 고객도 행복해지고 있는 셈이다.
같은 책 다른 생각, 모임이 더욱 소중한 이유
두 달 만에 재개된 독서포럼 나비의 이날 선정도서는 <퇴계에게 공부법을 배우다>였다. 소설 형식이라 읽기가 편하다는 반응들 가운데 특히 “요약정리가 잘 돼 있어 좋았다”며 입을 떼는 김승미 주무관.
“드라마만 챙겨 보던 제가 책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한다는 게 아직도 낯설 때가 있어요. 책을 읽으며 자기반성의 길을 찾고 아주 작은 습관부터 바꿔가는 중입니다. 상대방을 생각해서 말도 좀 예쁘게 하니까 미웠던 남편이 다르게 보이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힘도 생겼죠.”
김 주무관은 동호회 활동 이후 아직 삶의 큰 변화는 없다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1년에 단 한 권도 읽지 않던 그가 이제는 하루 최소 30분씩 책 읽는 시간을 확보하려 노력한다니, 이보다 더 큰 변화가 또 있을까? 맞은편에 앉은 강성미 서무팀장도 ‘남편 이야기’로 운을 떼며 자신의 경험을 풀어냈다.
“저도 의리로만 사는 부부였는데 동호회에서 <5가지 사랑의 언어>를 읽고 남편을 이해하기 시작했어요. 생각이 조금씩 바뀌니까 출근하는 것도 좋아졌죠. 업무가 바뀌면서 잠시 슬럼프가 왔었고, 코로나 블루도 겪을 뻔 했는데 동호회 때문이라도 책을 읽게 되니 이 위기를 넘기는 힘도 생겼습니다.”
가족과의 관계, 일에 대한 생각, 삶을 대하는 태도 등 동호회 활동이 준 변화가 쉼 없이 펼쳐졌다. “생김새가 다 다르듯, 같은 책을 읽어도 저마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이 모임이 더욱 소중하다”는 강지원 실장의 말이 오래도록 공간을 울렸다. 부담 없이 한 꼭지씩이라도 글을 써서 독서포럼 나비의 책을 내고 싶다는 이들의 목표가 꼭 달성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