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급히 다가와 사인교의 주인이 고종임을 확인하자 무감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동조마마가 계시는 북묘로 가는 길이다.”
홍영식이 위엄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동조(東朝)’란 대비가 거처하는 궁궐을 가리키는 말이니 ‘동조마마’란 대비를 지칭하는 호칭이었다.
“알겠습니다. 저희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무감이 소리치며 북문을 열고 어가를 호위하여 북묘로 향했다. 무감이며 별초군이 본래 하는 일이 어가의 호위였으니, 그들은 그때 비로소 주인을 만나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관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북묘는 조선군과 청군이 지키고 있을 뿐 고종이 애타게 만나고 싶어하는 민비나 대비는 물론 궁녀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북묘 역시 안심할 수 있는 피난처가 아니기에 민비 등은 살 길을 찾아 동소문 밖 노원으로 도피한 지 오래였다. 민비를 찾아 북묘까지 갔던 고종은 갑자기 길 잃은 양이 되어 허탈감에 빠졌다.
그때 마침 선인문 밖에 진을 치고 있던 청군 장수 오조유(吳兆有)가 군사를 거느리고 고종을 맞이하러 온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그 말을 듣자 고종이 깜짝 반기며 오조유의 진영으로 가겠다며 서둘렀다. 무감과 별초군들이 고종을 호위하여 사인교에 태우려 했다.
그러자 홍영식이 급히 달려가 어의 자락을 붙잡으며 말렸다.
“아니 되옵니다, 전하. 전하께서는 청국군 진영으로 가셔서는 아니 되옵니다.”
“어찌하여 짐이 청국군 진영으로 가서는 아니 된단 말인가?”
가마에 오르려던 고종이 뜨악한 표정으로 홍영식을 돌아보았다.
“전하께서 청국군 진영으로 가시면 만사가 끝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청국군 진영으로 가셔서는 아니 되옵니다.”
홍영식은 여전히 어의 자락을 붙잡은 채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만사가 끝나다니, 그것이 무슨 말인가?”
고종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
홍영식은 대꾸할 말을 잃고 애원하는 눈으로 고종을 올려다보았다. 고종을 청장 오조유의 진영으로 보내게 되면 개화파의 거사는 사실상 물거품이 된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외쳤던 것이나, 홍영식은 사실상 청군의 포로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선군과 청군에 포위되어 있는 상황에서 홍영식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이 청나라 장수에게 끌려가 청군의 보호를 받는 것만큼은 기어코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홍영식은 어의 자락을 붙잡고 하소연했던 것이다.
북묘에서 처참한 최후를 맞다
그러자 고종을 사인교에 태우려던 무감이 홍영식을 향해 삿대질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런 역적놈을 보았나. 어디서 감히 어의를 붙잡고 행패를 부려? 진짜 따끔한 맛을 봐야 정신 차릴 건가?”
무감은 왕방울 눈알을 부라리며 홍영식을 노려보았다.
“이놈아, 아무리 난중이라도 감히 누구 앞에서 눈알을 부라리며 행패야?”
화가 치민 홍영식이 큰 소리로 꾸짖었다.
“네놈들이 역적놈이 아니고 뭔데? 전·후영사를 죽인 것도 네놈들이고, 대감들을 죽인 것도 네놈들이
잖아. 성질 같아선 당장 물고를 낼 일이지만 어전 앞이라 참는 줄 알아, 이놈아.”
무감은 홍영식을 사납게 노려보며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그러자 북묘 사당에 모여 있던 청병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며 무감에게 물었다.
“왜 그러는 거야? 저자들은 누구야?”
“저자들이 바로 반란을 일으켰던 역적놈들이라고.”
무감이 고자질하듯 말했다.
“뭐? 반란을 일으킨 역적놈들이라고? 근데 왜 저런 놈들을 살려두고 있어. 죽여 버려!”
대장인 듯한 청병이 홍영식 등을 노려보며 차갑게 내뱉았다.
그러자 별초군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홍영식과 박영교를 에워쌌다. 어떤 자는 몽둥이를 치켜들었고, 어떤 자는 칼을 빼어들었다. 총을 들고 겨누는 자도 있었다. 그러는 사이 고종을 태운 사인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된다. 전하를 모시고 청국군 진영으로 가서는 아니 된다. 전하는 대전으로 모시고 가야 한다.”
홍영식은 그렇게 외치며 살기등등한 병사들을 헤치고 어가를 붙잡으려 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개화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는 홍영식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고종이 청나라 군대를 찾아가 그들의 보호를 받는 순간 그와 개화파 동지들이 애써 건설하려 했던 개화 세상은 물거품 되고 말 것이라 생각했기에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고종을 붙잡기 위해 안간힘 썼던 것이다.
“이런 뻔뻔한 인간을 보았나. 역적질 한 놈이 임금을 모시고 가겠다고? 참으로 가소로운 놈이다. 여봐
라, 이놈을 당장 처치하라!”
무감이 홍영식을 가리키며 별초군을 향해 소리쳤다.
무감의 명령에 따라 별초군들이 홍영식과 박영교 등을 에워싸고 뭇매를 가했다. 창으로 찌르는 자도 있었다. 불의의 습격을 당한 홍영식은 제대로 대항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쓰러져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도승지 박영교도 똑같은 운명을 맞았다. 어가를 호위하던 사관생도 출신의 병사들은 별초군과 맞서 싸우다 중과부적으로 목숨을 잃었다. 개중에는 용케 도망쳐 죽음을 면한 자도 있었다. 나라가 살 길은 개화밖에 없다는 굳은 신념에서 가난한 나라 조선의 통치자 고종을 개화의 길로 이끌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던 개화의 선구자 홍영식은 그렇게 무참한 최후를 맞았다.
고종과 함께 이 땅에 남아 후일을 기약하고자 했던 잔류파 홍영식 등의 죽음은 개화파의 몰락을 의미했다. 개화파의 주류인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용케도 일본으로 도피할 수 있었으나, 그들을 반기는 사람도 없고 그들이 설 땅도 없었다.
그처럼 개화파가 살해되거나 망명하면서 가난에 찌든 조국을 미국 같은 개화 세상으로 만들겠다는 그들의 찬란한 꿈은 물거품이 되었고, ‘개화’며 ‘개화파’라는 말은 터부시되었다. 그와 동시에 조선은 꿈을 잃은 나라가 되어 또다시 천지사방이 캄캄한 암흑의 세계로 되돌아갔다. 안으로는 부정부패에 탐닉한 관원들이 백성들의 고혈을 짜기에 급급했고, 밖으로는 이해관계에 민감한 열강이 탐욕의 눈을 번뜩이며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정변의 실패는 결코 주동자 몇몇의 참사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가족의 참변과 집안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홍영식이 비명횡사하고 개화파가 대역죄인으로 몰리면서 아버지 홍순목과 형 홍만식은 모든 관직을 삭탈당했다.
비극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홍씨 일가는 홍순목의 지시에 따라 독약을 먹고 집단자살을 했다. 자식을 역적으로 키운 죄를 감당할 수 없기에 영의정까지 지낸 홍순목은 먼저 손자를 독살하고 나서 자결했다. 홍순목의 부인 역시 독약을 마셨다. 홍영식의 부인 이씨와 첩 한씨도 자결했다. 6세에 불과한 배다른 동생 정식은 정표로 이름을 바꾸고 도피하여 간신히 목숨을 구했다. 형 만식은 일찍이 큰아버지 홍순경에게 양자를 간 덕분에 연좌제에는 걸리지 않았으나, 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1년 복역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나 그들의 가족은 무사할 수 없었다.
김옥균의 생부와 양부는 삭탈관직을 당했다. 친부 김병태는 천안감옥에 갇혔다 교수형에 처해졌고, 양부 김병기는 김옥균과 양자 관계를 끊으며 살 길을 도모했다. 부인 유씨는 숨어 지내며 목숨을 부지했으나, 어머니는 딸과 함께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왕실 부마인 박영효의 집안 역시 풍비박산이 났다. 박영효는 형 박영교와 함께 거사에 참여했기 때문에 형제가 모두 역적이 되었다. 그들의 아버지 박원양은 박영교의 아들인 손자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부인과 함께 자결했다.
그처럼 정변의 실패는 주인공들의 일가족의 몰살로 막을 내렸다.
홍영식, 김옥균 등 개화파의 주역들은 왕을 따르느냐 도망치느냐를 놓고 양자택일을 할 수 있었으나, 그들을 따라 하수인 노릇을 했던 행동대원들은 어느 쪽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져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사람이 일본 하사관학교 출신의 행동대원 신중모였다. 그는 홍영식을 따라 어가를 모시고 북묘까지 갔으나, 청나라 군사가 점령하고 있는 그 곳이 결코 안전지대가 아님을 깨닫고 슬그머니 도망쳤다.
도중에 장사 김봉균, 이희정을 만나 양평 사나사로 같이 도망쳐 몸을 숨겼다. 그들은 머리를 깎고 중 행세를 했으나 결국 붙잡혀 처형되었다.
동대문의 소문난 장사로 안동궁에 불을 지르고 요인 척살에 앞장섰던 윤경순은 전라도 곡성까지 피신한 뒤 경기도 부평으로 올라와 은신하려다 체포되었다. 궁궐 수비를 맡았던 병사 낭창관은 전라도로 도망쳐 고창 관아에서 하인 노릇을 하다 붙잡혀 죽었다.
행동대장 이인종은 시체로 발견되었고 하사관 생도 윤영관은 배오개에서 보부상들에게 체포되어 참살되었다.
박제경은 청계천 수표교에서 살해되었고, 오감은 관철교에서 체포되어 죽음을 맞았다. 그처럼 정변에 참여했던 수많은 행동대원들은 도피 과정에서 살해되거나 도피한 뒤 체포되어 비참한 종말을 맞아야만 했다.
로웰이 갑신정변의 전말을 정리하여 미국 잡지에 발표하다
홍영식이 죽고 나자 재동에 있는 그의 집은 몰수되었고, 그의 관한 기록은 삭제되었다. 대역죄인으로 몰렸기에 그의 행적에 관한 기록을 남긴 자도 없었다. 따라서 그가 애써 이룩한 개화에 관한 업적이나 추진 과정 등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 그에 관한 기록이 몇 줄 남아 있어 당시의 사정을 짐작케 했다.
고종실록은 고종 21년 10월 19일자에서 홍영식이 고종을 모시고 북묘로 가서 죽음을 맞게 된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밤에 상께서 북묘로 거처를 옮겼다가 그길로 또 선인문 밖에 있는 청나라 통령(統領) 오조유(吳兆有)의 영방으로 옮겼으며, 각 전(殿)과 각 궁(宮)도 노원으로 옮겼다.
이 날 신시에 청나라 병사들이 대오를 나누어 궁문으로 들어오면서 총포를 쏘았고, 우리나라 좌영과 우영의 병사들도 따라 들어오니 일본 병사들이 힘을 다해 막았다. 유시에 상께서 후원에 있는 연경당으로 피하였는데, 각 전과 각 궁과 서로 연계를 잃고 옮겨 피하여 옥류천 뒤 북쪽 담문에 이르렀다. 이때에 무예청 및 위사, 별초군이 비로소 들어와서 호위하여 문을 열고 나가 북묘로 향하였다.
일본공사가 병사를 거느리고 궁을 떠나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모두 따라 나갔고, 오직 홍영식과 박영교 및 생도 7인만이 고종을 뒤따라 북묘로 갔다. 해시에 오 통령은 상께서 북묘에 계시다는 말을 듣고 대오를 거느리고 맞이하러 갔다. 홍영식 등이 어의를 끌어당기면서 가지 말라고 청하였다. 여러 사람이 상을 모시고서 사인교에 태우니 홍영식 등은 또 성을 내며 고함쳤다. 우리 병사가 홍영식과 박영교를 쳐 죽이고, 또 생도 7인도 죽였다. 원세개(袁世凱) 또한 병사를 보내어 임금을 영접하였다. 자시(子時)에 선인문 밖에 이르러 오 통령의 영방에서 머물렀다.”
그처럼 고종실록은 홍영식이 고종을 따라 북묘로 가서 죽음을 맞게 된 과정을 간략하게 기술했다. 정변이 일어난 시점에 정변에 대해 내국인이 남긴 기록으로는 유일했다.
개화파의 완전한 몰락으로 끝났기에 사관이 아니면 아무도 붓을 들려 하지 않을 때 용감하게도 갑신정변의 전말과 홍영식의 죽음을 글로 정리하여 발표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다름아닌 미국인 퍼시벌 로웰(Percival L.Lowell)이었다. 로웰은 1883년 홍영식 등 보빙사절단이 미국을 방문할 때 안내자 역할을 했던 청년인데, 사절단원 가운데 특히 홍영식과 가깝게 지냈다. 그런 인연에서인지 그는 ‘조선의 쿠데타(A Korean Coup d’Etat)’라는 제목으로 홍영식을 추모하는 글을 써 당시 미국에서 발행한 잡지 ‘월간 대서양(Atlantic Monthly)’ 1886년 11월호에 게재했다.
보빙사 일행을 미국 각지로 안내하며 구경시키고 통역 역할도 했던 로웰은 미국공사관 직원도 아니요 여행 안내자도 아니었다. 부잣집 도련님인 로웰은 하버드대학을 졸업하자 극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호기심에서 일본을 여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마침 보빙사절단이 미국을 방문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사절단원 중에는 미국을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고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자 주일미국공사 빙햄(Bingham)이 로웰에게 안내자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로웰은 그 청을 받아들이며 개인 통역으로 쓰고 있던 일본인 미야오카 츠네지로(宮岡恒次郞)를 같이 데리고 갔다. 그리하여 로웰이 영어로 말하면 미야오카가 일본어로 통역하고, 이를 다시 사절단원 변수가 우리말로 통역하는 방식으로 의사 소통을 했다.
로웰은 홍영식과 동갑이었다. 때문인지 로웰은 사절단원 중에서도 특히 전권부대신 홍영식과 가깝게 지냈다. 그는 홍영식 등에게 미국의 개화 현장을 두루 구경시키며 많은 대화를 나눴다. 뉴욕우체국과 전신국을 안내하며 홍영식이 특히 우편에 대해 관심이 많음도 알게 되었다. 미국에서 돌아올 때도 두 사람은 같은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일본에서 헤어졌다.
사절단의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자 홍영식은 고종에게 그동안 로웰이 보빙사절단을 위해 했던 일들을 낱낱이 보고했다. 그러자 고종은 로웰을 국빈으로 초청하라고 지시했다. 덕분에 로웰은 그 해 12월 조선을 방문하여 3개월 동안 머무르며 조선 사회를 두루 구경했다. 학구열이 풍부했던 로웰은 이방인의 눈에 비친 신기한 나라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풍물 등을 기록하여 한 권의 책으로 엮었는데, 그것이 바로 1885년에 발간된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Chosen, the Land of Morning Calm)’이었다.
벌을 받든 용서를 받든 내 나라에서 받겠다
조선 방문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간 뒤 얼마 안 되어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났고 홍영식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홍영식의 사망 소식에 충격을 받은 로웰은 갑신정변이 일어난 배경과 홍영식이 죽음을 맞게 된 과정 등을 ‘조선의 쿠데타’라는 제목으로 보고서 형식으로 기술하여 ‘월간 대서양’에 발표했다.
로웰이 집필한 ‘조선의 쿠데타’라는 글에서 홍영식이 죽음을 맞게 된 과정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인들의 철수가 분명해지자, 개화파 지도자들은 일본인이 철수하고 고종과 함께 남게 되면 적의 손에 넘겨지게 될 운명임을 예상하고 도피하기로 결정했다. 다른 지도자들은 다 같이 도피하기로 의견을 모았으나, 홍영식만은 남아 있겠다고 했다. 다른 사람은 다 가도 좋으나, 자신만은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개화파는 결코 반란군이 아니며 그들이 공언했던 거사의 원칙이 하등 부끄러운 일이 아님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라도 궁궐에 남아 있어야 하며, 자신이 그중 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말을 듣자 깜짝 놀란 개화파 동지들은 홍영식을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돌아가며 그의 역을 대신 맡겠다고 했으나 들으려 하지 않았다. 당시 그는 30세에 불과했음에도 나이가 가장 많은 축에 듦을 이유로 자신이 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의 결심이 바뀔 수 없는 것임을 입증하기 위해 긴 관복 장화를 벗어 버렸다. 그의 결심이 흔들리지 않을 것임을 알자 그들은 그를 남겨두고 떠났다. 더 지체하면 적에게 붙잡힐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에 빨리 떠날 수밖에 없었다.
몇 분 뒤 그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 그 곳 궁궐에서 청나라 군사들이 그를 발견했다. 그들은 그를 체포하여 청국군 진영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몇 가지 확인 절차를 거친 뒤 그를 공개 처형했다. 용감하고 충성스러운 인물은 자신이 공개적으로 천명한 원칙에 따라 그렇게 죽었다. 그 길을 피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라 생각했기에 피하지 않았다.”
로웰은 그 글을 일본에서 썼다. 자신이 직접 목격하지도 않은 사건을 일본인들의 말을 듣고 일본 자료를 참고하여 썼으므로 편견이 작용할 수밖에 없었으나, 아무튼 그는 한때 가깝게 지냈던 친구 홍영식을 기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개화의 선구자 홍영식은 그렇게 이승을 하직했다. 병들 대로 병든 나라를 살릴 수 있는 길은 개화밖에 없다는 일념에서 개화의 길로 매진했으나 외세에 가로막혀 더 이상 나갈 수 없게 되자 그는 과감하게 죽음의 길을 택했다.
개화파가 추구한 길이 하등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결코 나라를 배반한 것 아니라 고 믿었기에 그는 그 사실을 널리 알리고 싶어 그 길을 택했다.
또한 내 나라에서 일을 도모하다 실패했다면 벌을 받든 용서를 받든 내 나라에서 받아야지 구차스럽게 남의 나라에 가서 후일을 도모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는 도망하는 길 대신 임금을 모시고 가는 길을 택했다. 아니, 끝까지 선장인 고종을 설득하여 개화의 길로 인도해야 하겠기에 그 길을 택했던 것이다.
그러다 몽매한 조선군에게 붙잡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와 동시에 암흑의 땅 조선을 광명의 나라로 만들겠다는, 찬란한 개화의 꿈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다. (끝)
소설 소개
우리나라 근대 우정(郵政)의 선구자이자 대표적인 개화파였던 금석 홍영식 선생의 눈을 통해 지금으로부터 130여 년 전 개화의 바람이 몰아치던 19세기 말의 조선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
저자 이기열
30년 가까이 월간 《정보와 통신》 (現 《우체국과 사람들》)지 편집장으로 일하며 도약 연대의 정보통신 발전상을 지켜보았다. 1980년대 정보통신 발전 비사인 <소리 없는 혁명>을 집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