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백신시장 지켜낸 컴퓨터 名醫
얼마 전 정치인을 대상으로 한 사이버 주식시장인 포스닥이 개설돼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킨 바 있는데, 지난 11월에는 경영인을 대상으로 한 사이버 주식시장이 개설돼 또 우리의 눈길을 끌었다.
이 시장에서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1위를 지켜오다 최근 어느 벤처기업인에게 그 자리를 빼앗기는 이변이 일어났는데, 새롭게 1위에 오른 인물이 바로 안철수씨이다. 직원이 고작 50여명에 불과한 중소기업이 삼성그룹 등 국내 굴지의 대기업을 모두 누르고 1위에 등극한 것이다.
의학도에서 컴퓨터 전문가로 변신
안철수씨는 지난 1988년 컴퓨터 바이러스 퇴치용 백신 프로그램인 「V3」를 개발해 컴퓨터 사용자들에게 무료로 공급함으로써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막았으며 수십억원의 외화 절감에 기여했다. 그 공로가 인정되어 작년 12월 한국과학기자클럽에서 주는 '올해의 정보통신인상' 첫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컴퓨터 전문가로 각인돼 있는 그이지만, 사실 안철수씨는 컴퓨터공학도가 아닌 의학도였다. 1986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그는 대학원에서 의학과 컴퓨터가 가미된 전기생리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88년 'C브레인' 이라는 컴퓨터 바이러스를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시험삼아 퇴치해 보기로 한 그는 단 하루만에 퇴치방법을 찾아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그는 의학 공부를 하는 한편, 시간을 쪼개어 바이러스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어 무료로 보급하였다.
1994년 단국대 의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그는 고민에 빠졌다. '세계적 수준의 일류 전문가가 되려면 한 분야에 24시간 몰두해도 모자란데, 양쪽을 하게 되면 2류 의학자에 2류 컴퓨터 전문가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하는 것이 그의 고민이었다.
그때는 마침 바이러스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었고 바이러스 만드는 기술도 크게 향상되었으며, 특히 외국의 세계적인 백신회사들이 한국에 진출하고 있어 혼자 힘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 그는 조직을 만들어 국내 시장을 지켜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의학을 접고 컴퓨터의 길을 택했다.
그렇게 해서 1995년 탄생한 것이 안철수컴퓨터바이러스연구소(이하 안철수연구소)이다. 회사 이름이 연구소 이름을 갖춘 것은 공익성을 잃지 않으려는 그의 신념이 숨어 있었다. 회사 설립 후 현재의 명칭인 「V3+」라는 백신 소프트웨어를 공식 출시하게 된 안철수연구소는 그때부터 부침없이 성장의 길을 걷게 된다.
1997년 안철수씨는 국내 진출을 추진하고 있던 세계 최대의 백신업체인 맥아피로부터 무려 1천만달러에 매각 요청을 받았지만 과감히 거절했다. 이로써 그는 한국의 자존심을 지켜낸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특히 젊은층의 우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세계 최고만이 살아 남는다
안철수연구소의 작년 매출액은 115억원 정도, 전년해 26억원에 비하면 괄목할 만한 성장이다. 순수 패키지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매출액 100억원을 넘기기는 한글과컴퓨터 이후 두번째인데, 이는 소프트웨어가 고부가가치산업임을 감안하면 일반 제조업 분야의 매출액 4,000~5,000억원에 해당한다.
IMF 사태 이후 안철수연구소는 무차입 경영에 우수 인력의 확보 및 고정비용의 감소 등에 힘입어 매출액이 매년 2배씩 증가했다. 관리는 보수적으로, 마케팅은 진취적으로 해왔던 전략이 주효했다. 여기에 지난해 터졌던 CIH 바이러스 대란이 급성장의 발판이 되었다.
'CIH 바이러스는 국내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으나, 이를 계기로 백신 소프트웨어가 필수적이라는 인식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최근 안철수씨는 새로운 시장 창출을 위해 합작사 설립에 적극적이다. 지난 5월에 데이콤·팬타시큐리티 등과 함께 정보보호서비스업체인 코코넛을 설립한데 이어, 12월에는 나모인터랙티브 등 6개 회사와 함께 리눅스 관련 벤처기업인 엘릭스를 설립했다.
'세계 최고가 아니면 살아 남기 어렵습니다. 또한 그것을 계속 유지하기는 더욱 어렵죠. 그래서 세계적 수준의 기술을 보유한 업체끼리 서로 힘을 합쳐 외국의 다국적기업에 대항해야 합니다.“
1990년대 후반은 벤처 창업의 열풍을 타고 수많은 벤처기업이 탄생했다. 정부에서도 벤처 창업 자금 등을 통해 벤처기업을 지원해 왔는데, 이에 대해 안철수씨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정부는 벤처기업에게 창업 자금을 지원해 주기보다는 좋은 시장을 만들어 주는 일에 더욱 신경써야 합니다. 예컨대 소프트웨어 분야의 경우 그 자금으로 정부가 사용하는 소프트웨어를 100% 사 주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거죠. 기업만 만들어 놓고 시장을 소홀히 하면 벤처기업이 자생력을 키울 수 없습니다.'
안철수씨는 과거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 앞만 보면서 그 순간에 최선의 선택만 할 뿐이다. 의대 교수에서 컴퓨터 전문가로 변신한 안철수씨. 앞으로 10년 뒤 그는 또 어떤 선택을 통해 어떻게 변해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