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성한 나뭇잎이 앙상한 가지를 키우고 두툼하던 달력이 얇은 한 장으로 벽을 기대서 있는 연말, 지역 주민과 함께 호흡하며 살아온 여주에서 나는 누구인가? 근무하고 있는 이곳은 어떤 향기를 지녔나? 여주는 고구려 • 백제 • 신라의 삼국이 패권을 다투던 여강(남한강)을 군 중심부에 둔 문화와 역사의 고장이다.

여주 근교의 전원인 여강의 상공을 나르는 천연기념물 백로
멀리 혼암리(여주군 점등면) 선사시대의 유적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곳은 한림대 박물관팀의 두 차례에 걸친 여주읍 매룡리 고분군의 발굴로 중원문화권 지역임이 실증되었다. 이곳에는 천년의 역사를 지닌 신륵사, 슬기의 성왕 세종대왕릉(英陵), 북벌의 기개 효종대왕릉(寧陵), 국보 4호의 고달사지 부도, 외교의 명수 서희 장군 묘, 파란만장의 생을 마친 명성황후 생가를 비롯한 많은 역사적, 문화적 유산을 안고 있으니 구르는 돌, 깨어진 기와 한쪽에도 선인의 얼이 흐르는 뜻깊은 고장이라 하겠다.
한편 지리적으로는 경기도 최동남단에 위치한 내륙지방으로 동은 강원도 원성군 및 충북 중원군을 경계로 하며, 서는 광주군과 이천군에 접하고, 북은 양평군에 인접하고 있다.
이 양평군과 경계를 이룬 우두산의 맥이 남쪽으로 치달리다가 여강을 만나 주춤하며 선 것이 鳳尾山이다. 바로 이 봉미산때문에 왕비가 여덟 분이나 배출되었다고들 입을 모은다.
안금식 여주문화원장은 “만약 봉미산이 아닌 봉두산이었다면 여덟분 왕이 나셨을 것”이라고 여주 자랑을 아끼지 않는다.
들이 평평하고 멀리 큰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한 폭의 그림 같은 이곳은 여주라는 지명전에도 골내근, 황요, 영의,여강, 여흥 등의 명칭을 가졌던 것으로 보아 역사가 순탄치만은 않았을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그때마다 슬기롭게 이겨낸 여주민의 긍지가 이어져 선인의 얼이 담겨져 있으며 풍요가 넘치는 곳으로 커왔다.
이런 까닭 때문일까, 권력과 세도를 누리던 양반들이 많이 살았다. 이를 살펴보 면 「조선왕조 5백년」에 방영되었던 인현왕후를 비롯한 8명의 왕후가 배출되었고, 조선 후기 세도가인 안동 김씨 집안의 토호였으며 또한 고종 때 영의정인 홍순목 역시 여주 금사에 뿌리를 갖고 있으며, 왕후를 많이 배출한 여흥민씨 집안이 이곳 토박이 집안이었다.
이렇듯 여주는 사대부 집안이 많아 벼슬 길을 기다리는 양반들과 벼슬자리에서 물러난 사대부들이 살던 고장이다.
특히 갑신정변의 주역이며 우정국을 창시한 금석 홍영식 선생 역시 이곳 출신으로 여기(홍천면 문장리)에 잠들고 있으니 그의 숨결을 항상 함께 하는 체신인으로서의 남다른 감회를 느끼게 된다.

신륵사의 전경
천년의 역사를 지닌 신륵사
여주대교를 들어서면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개창하였다는 신록사가 모습을 나타낸다. 사찰로서는 보기 드물게 강변에 위치하여 주위의 경관과 함께 잘 어우러지는 아늑한 사찰이다.
빗기는 햇살 속에 발을 디딘신륵사 경내는 입구부터 바위 위에 뿌리를 내린 거대한 거목으로 오랜 역사를 짐작하게 하
고 있다. 즉, 신라 때 개창, 고려 우왕 때 중창, 조선 성종 때 영릉의 원찰로서 확장, 그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현종,숙종 때에 다시 중창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국풍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신륵사 북을 곁에 둔 극락보전을 마주보고 대리석으로 된 보물 225호 다층석탑이 서 있으며, 동남단 강가의 넓은 바위 위에 다층전탑 1기가 위용을 자랑하며 응장하게 버티고 있다.
벽돌을 쌓아서 만든 전탑, 그래서 예로부터 신특사를 가리켜「벽절」이란 이명까지 낳게 한 보물 226호 전탑 옆에는 비각이 있고, 6백년 전 고려 우왕 9년으로 추정되는 보물 230호 신륵사 대장각기념비가 오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대웅전을 돌아서면 지공 • 나옹 • 무학대사 등 삼화상의 덕을 기리며, 법력을 숭모하는 보물 180호 조사당이 있다. 그 옆으로 100여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사리가 봉안된 보물 228호 석종이 중앙에 있고, 그 앞에 목은 이색이 나옹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석종비가 서 있다.
한편 나옹의 석종 옆에 그 형태가 매우 아름다운 보물 231호 석등이 하나 있다.
이렇듯 많은 보물을 지닌 신륵사의 수려한 경관의 백미 강월헌에서 옛날 나옹선사와 목은 이색 선생이 시와 화담을 즐겼다 하니 어찐지 흐르는 여강의 물처럼 멀어지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조선왕조중 최고 비극의 주인공인 효증의 능 寧陵
민족의 영지, 英陵
英陵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의 합장릉이다. 세종대왕은 조선 개국 후 고려 유신의 반발로 흔들리는 정치 기반을 바로잡고 문물의 기틀을 정립함은 물론 밖으로는 야인을 정벌하여 4군과 6진을 개척하였다. 이 4군 • 6진으로 우리나라의 국경선은 압록강 • 두만강으로 확정되었으며, 대마도의 정벌로 국방이 더욱 튼튼히 되었다. 특히 학문을 숭상하여 많은 학자를 길러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훈민정음을 창제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이다.
원래 英陵은 서울 헌릉 서쪽에 있었던 것을 예종 원년(1469년)에 여주로 옮겨왔다.
1975년 세종대왕의 위대한 업적을 길이 숭모하고 그 위업을 오늘에 이어 받아 민족문화 창조의 기틀을 삼고자 영릉보수정화사업을 추진하여 1977년 세종전을 새로 짓고 경역을 성스럽게 정화하였다. 성역화 이후 매일 수천명의 참배객들이 가신임의 위업을 기리는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북벌의 꿈을 키운 효종대왕 寧陵
북성산의 울창한 수림 속에 세종대왕 英陵과 함께 산등성을 하나 넘어 또 하나의 왕릉이 있다.
잠든 분은 병자호란 후 소현세자와 함께 볼모로 청나라 심양에서 8년간 고초를 겪고 왕위에 오른 효종대왕이다. 대왕은 청나라 정벌계획을 세우고 성곽을 쌓고, 총수병을 양성하는 등 북벌의 집념을 불태우다 끝내 그 한을 품고 간 효종대왕과 인선왕후 장씨의 쌍릉인 寧陵이다.
寧陵 역시 양주의 권원릉 서쪽에 있었던 것을 헌종 14년(1673년)에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북벌계획 하면 효종대왕과 그 뜻을 함께 했던 문신 우암 송시열 선생과 훈련대장 이완 장군을 생각하자 않을 수 없다.
송시열은 북벌계획을 추진한 대표적인 인물로 효종 승하 후 좌의정을 지내는 등 정치적 활동도 컸지만 불굴의 義와 藝에 투철한 그는 관직 박탈, 복직, 유배의 길을 걷다가 당쟁에 회생 됐다.
정조의 명으로 건립된 군청 옆 하리에 위치한 사액사당인 강한사(대로사)는 寧陵을 향하여 배치한 것이고, 정문인 장인문은 효종과 이웃한다는 뜻이며, 사당은 효종을 우러러 북향하고 있어 사후까지의 충절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신무기 제조, 성곽의 개축, 신축 등 북벌계획을 추진한 이완 장군 역시 여주읍 삼거리 소나무 숲에 안장되어 있다.
300m 떨어진 신도비문은 송시열 선생이 지었다.
한편 여주에는 서희 장군의 묘와 근대화의 기치를 내건 갑신정변의 주역 홍영식 선생의 묘가 있으니 여기서 북벌, 자주외교, 근대화를 꿈꾸던 진취적인 선인들의 기개가 집결된 여주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이완 장군 묘에 세워진 석인상
비운의 황후 민비 생가
여주읍 능현리 능말 주택가 한가운데 위치한 명성황후(민비)생가는 오늘날 많이 퇴락하여 그 일부만 남아 있다.
당초에는 조선 숙종의 장인인 민유중의 묘막으로 숙종 13년에 축조되었으나 현재는 본채, 안방, 건넌방, 부엌채만 남아 있으며 명성황후가 공부했던 방에는 명성황후 탄강비가 남아 관광객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국보 • 보물이 산재한 고달사
신라 경덕왕 때 세워진 고달사는 광활한 寺城에 사찰은 간곳없이 웅장한 유물만이 무성한 잡초 속에 남아 있는 폐사가 되었다.
한때 승려들의 조석공양에 쓰이는 쌀뜨물로 고달천 10리를 장식했다는 고달사는 규모나 남아 있는 유물로 보아 엄청난 사찰이었는데 오늘에 이르러서는 찬 바람만 흩날리고 있다.
국보 4호 고달사지 부도는 북내면 상교리 산중턱 무성한 산림 속에 감추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도로서 탑 전체의 미려함과 세부조직이 섬세 화려하여 우리나라 제일의 부도로 알려져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기단에는 연꽃무늬를 조각하였으며, 그 위에는 네 마리의 용이 꿈틀거리고 있고 용과 구름의 절묘한 배치가 일품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아름다운 고달 운종대사 혜진탑 귀부 및 이수의 보물 6호가 있고, 보물 7호 고달사 운종대사 혜진탑이 화려하게 서 있다.
또한 보물 8호 고달사지 석불좌가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寧陵으로 들어가는 길
도예의 메카 오학리 도자기촌
여주대교를 건너면 바로 보이는 곳에 오학리 도예촌이 점촌을 이루고 있다. 전국 도자기의 70% 를 생산하고 있는 이곳은 민속도자기 종합전시관, 석봉도예전시관, 은성 도예전시관 등 200여개의 전승 도자기의 도요단지로 국내외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동국여지승람은 물론이거니와 세종실록에서도 여흥 관산(지금의 싸리산)의 자기가 우수품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선사시대의 유적지인 혼암리의 무문토기 출토 등을 근거로 이곳 도공들의 도자기 본고장에 대한 긍지는 대단하다.
물 • 흙 • 불 삼합의 조화 속에 창출되는 도자기는 입지적 조건으로 볼 때 여주 싸리산의 고령토, 우람한 수림의 멜감, 여강의 물이 혼합되어 도자기의 메카로 형성된 곳이다.
여주는 역사적 물림과 훌륭한 지리적 여건을 바탕삼아 옛 도공들의 맥을 있는 청자 • 백자등 도예기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민속공예품을 생산하고 있다.
또한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도자기 한두점씩을 장식해 놓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어감에 따라 전통자기에 생활 자기를 접목시키는 작업도 함께 겸하고 있는 현대성이 가미된 생활자기도 만들고 있다.
급변하는 세월 속에서도 옛 선인들의 슬기가 이곳저곳에 살아 숨쉬는 여주! 서울에서 버스로 1시간대인 이곳에 연인 • 가족 • 친구들과 함께 지나온 역사를 더듬으며 오붓한 시간을 갖고 정취에 홈뻑 젖어 볼 만한 곳이다.
여강의 고운 숨결 때문일까, 유난히 역사의 넓이와 깊이를 간직한 채 발길 닿는 어느 곳에서나 역사의 향기가 넘쳐 흐르고 있다. 더구나 도자기의 본고장으로 화중지병으로만 느껴져 왔던 도자기도 쉽게 구입할 수 있다.
문득 이중환의 「택리지」에 대동강이 있는 평양, 소양강이 있는 춘천, 여강이 있는 여주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살기 좋은 강촌이란 평가를 재음미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