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근대 우정(郵政)의 선구자이자 대표적인 개화파였던 금석 홍영식 선생의 눈을 통해 지금으로부터 130여 년 전 개화의 바람이 몰아치던 19세기 말의 조선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

글. 이기열

나는 마땅히 어가를 따르리다 - 20화
2017.08

일러스트. 하고고


장사 윤경순이 칼을 꺼내 유재현의 허리를 깊숙이 찔렀다. 고종이 죽이지 말라며 소리쳤으나 소용없었다. 내시와 궁녀들이 모두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보며 벌벌 떨고 있었다.

유재현이 항변 한마디 하지 못하고 쓰러지자 창덕궁으로 이어해야 한다고 주장한 궁녀와 내시들의 목소리가 쑥 들어갔다. 중전 민비도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 여세를 몰아 김옥균과 박영효 등 개화파 주역들은 궁녀와 환관 중 쓸모없는 자들을 몰아내고, 고종에게 품의하여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그리하여 개화파를 중심으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했다.

영의정 이재원

좌의정 홍영식

전후영사 겸 좌포장 박영효

좌우영사 겸 대리외무독판 겸 우포장 서광범

좌찬성 겸 좌우참찬 이재면(흥선대원군의 장남)

이조판서 겸 홍문관제학 신기선

예조판서 김윤식

병조판서 이재완(이재원의 아우)

형조판서 윤웅렬

공조판서 홍순형

한성판윤 김홍집

판의금 조경하(대왕대비의 조카)

예문제학 이건창

호조참판 김옥균

병조참판 겸 정령관 서재필

도승지 박영교(박영효의 맏형)

동부승지 조동면(대왕대비의 종손)

동의금 민긍식

병조참의 김문현(순화궁의 동생)

수원유수 이희선

평안감사 이재순(종친)

설서 조한국(흥선대원군의 외손)

세마 이준용(이재면의 아들)

가장 높은 자리인 영의정에는 고종의 종형인 이재원을 앉혔다. 이재원은 흥선대원군의 둘째형인 흥완군의 아들이자 고종의 사촌형으로 이미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지낸 경력이 있었다. 

그날 밤 자정이 지난 뒤 고종이 사촌형 이재원을 불러 김옥균과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이재원의 집이 바로 경우궁에 붙어 있어 쉽게 부를 수 있었다. 모처럼 만나 시사와 국사를 논하면서 김옥균은 그가 개혁 내각의 요직을 맡을 만한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그만큼 두 사람은 시국을 보는 눈에 서로 통하는 데가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높은 자리인 좌의정은 홍영식이 맡았다. 이재원이 맡게 된 영의정이 사실상 상징적인 자리에 불과했기에 홍영식을 좌의정에 앉혀 국정의 최고 의결기관인 의정부를 이끌어 가도록 했다. 홍영식은 개화파의 중심인물 중에서 관료로서의 경력이 풍부한 데다 총명하고 진중한 성격이어서 적임자라 할 수 있었다. 

국정의 요직은 개화파가 차지했다. 전영사, 후영사, 좌영사, 우영사 등 4영사와 좌포장, 우포장 등의 병권과 경찰권은 박영효와 서광범 두 사람이 나누어 가졌고, 서재필은 병조참판이 되어 병권을 쥐게 되었다. 혁명의 주역인 김옥균은 호조참판이라는 기대 이하의 자리를 맡았으나, 참판이란 눈속임에 불과했고 국가 재정권을 틀어쥐겠다는 속셈을 드러낸 것이었다. 거사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인물 중에서 신기선이 이조판서, 김윤식이 예조판서, 윤웅렬이 형조판서, 김홍집이 한성판윤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온건개화파를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이었다. 


왕실내각 내지 종친내각이 구성되다


개각 인선의 또 하나의 특징은 왕가와 인척들을 대거 발탁했다는 점이다. 영의정에 고종의 사촌형을 앉힌 데 이어 병조판서에는 이재원의 아우인 이재완을 앉혔다. 좌찬성에 임명된 이재면은 대원군의 맏아들로 고종의 친형이었다. 

판의금 조경하는 대왕대비 조씨의 조카였고, 동부승지 조동면은 대왕대비의 종손이었다. 평안감사 이재순은 대원군의 지친이었고, 세마 이준용은 대원군의 장손이었다. 

그처럼 왕실이나 외척 관계에 있는 인물을 대거 발탁하여 요직에 앉혔다. 그동안 민씨 일파에 소외당한 인물들이 권좌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뜻하지 않게 ‘왕실 내각’ 내지 ‘종친 내각’이 되었던 것이다. 

거사 다음 날인 12월 5일 아침, 전영사의 병정 30명씩을 미국공사관, 영국영사관, 독일영사관에 보내 호위하게 했다. 오전 9시 미국공사 푸트가 영국영사 애스턴과 함께 경우궁을 방문하여 고종에게 문안 인사를 올렸다. 고종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그들을 맞았다.

미국공사 푸트는 홍영식과 김옥균 등이 고종을 모시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대군주께서 강녕하시니 나라의 홍복이라 생각하오며, 이번 일을 계기로 국정이 새롭게 발전하기를 기대하는 바입니다.”

“내 들으니, 무릇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구습을 타파하고 문명 개화하는 데는 다소의 변란을 겪지 않은 나라가 없다 하오. 저 방에 있는 일본공사도 누차 그런 변란을 겪었다는 말을 하였는데, 미·영 제국에서도 그런 예가 있었을 것 아니오?”


고종은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있는 방 쪽을 돌아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든 사소한 변동은 있게 마련이고, 그런 과정을 거쳐 온전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귀국에 이처럼 놀라운 변란이 있기는 하지만, 주상께서 번거롭게 생각할 일은 아닌 듯싶습니다. 대군주의 성명(聖明)으로 어찌 나랏일이 편안하지 않음을 걱정하겠습니까.” 


푸트는 가벼운 미소를 띠고 화답했다.


“고마운 말씀이오. 짐도 그렇게 생각하오.”

고종 역시 웃는 얼굴로 응대했다.
그처럼 미국공사 푸트가 고종과 반가운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는 반면, 영국영사 애스턴은 굳은 얼굴로 고종의 강녕을 빌 뿐 정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정변을 대하는 외교사절들의 시각은 그처럼 나라에 따라 큰 차이가 있었다. 
고종과 인사를 마치고 나자 푸트와 애스턴은 옆방으로 자리를 옮겨 일본공사 다케조에와 이야기를 나눴다. 독일총영사 쳄브쉬(Zembsch)가 뒤늦게 그들과 합류했다. 외교관들은 정변에 대해 관망한다는 자세를 취했으며, 서울에 있는 외국인을 잘 보호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푸트와 애스턴이 창덕궁 밖으로 나가자, 거리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지난밤에 일어난 변란에 대해 수군거리고 있었다.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는 수많은 인파가 거리를 가득 메우며 북새통을 이루고 있어 가마나 말이 지나다닐 수 없을 지경이었다. 외교관들은 간신히 거리를 벗어나 묄렌도르프의 집으로 갔다. 심한 자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고 있는 민영익을 위문하기 위해서였다.
고종이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는 동안 민비가 또다시 환궁설을 꺼냈다. 민비는 김옥균을 불러 경우궁은 협소하여 용신할 수 없으니 한시라도 빨리 환궁할 수 있도록 조처해 달라고 요구하는 한편, 비빈과 궁녀들을 충동하여 앓는 소리를 하게 했다. 마음이 모질지 못한 김옥균으로서는 차마 거절하기 어려운 요청이었다.
그동안 개화파가 크게 실수한 일이 하나 있었다. 경기감사 심상훈에 대한 관리 소홀이었다. 정변이 일어나자 김옥균과 가깝게 지내고 있던 심상훈은 경우궁으로 들어와 개화당에 합세하는 척했으나, 그는 민씨 일파와 
손을 잡고 있는 친청사대파였다. 그는 고종과 민비를 몰래 만나 개화파가 정변을 일으켜 친청사대파의 거두들을 살해했음을 알리고, 개화파를 타도하려면 청국 군사를 끌어들여야 한다고 진언했다. 민비가 또다시 환궁설을 꺼낸 이유였다. 민비의 채근이 심해지자 김옥균 등은 행궁을 바로 경우궁 옆에 붙어 있는 계동궁으로 옮겼다. 계동궁은 흥선대원군의 조카이자 고종의 사촌형인 이재원이 살고 있는 집이었다. 바로 혁명정부로부터 영의정으로 발탁된 이재원의 집이었다. 그 집 역시 창덕궁에 비하면 턱없이 좁았으나 경우궁에 비해 약간 넓었기에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성과 혼란의 와중에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고종과 자주 대화를 나눴다. 다케조에는 현재 천하 각국의 정세가 어떠한지 설명하고 나서 조선이 내정을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를 자세히 아뢰었다. 양병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나라를 지키려면 양병이 가장 중요한 법인데, 지금 귀국의 병사 중에는 오직 전영사가 다른 영사에 비해 약간 나을 뿐입니다. 전영사는 박영효가 광주유수로 있을 때 훈련시킨 군대인데, 지금은 박영효가 관여하지 않고 있으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라를 위해 애쓰는 사람을 버리고 쓰지 않음은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다케조에가 그렇게 지적하자 고종은 곧바로 박영효를 전영사로 임명했다.

계동궁을 거쳐 창덕궁으로 환궁하다

행궁을 경우궁에서 계동궁으로 옮겼으나 민비는 만족하지 않았다. 계동궁도 좁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좁음을 이유로 내세운 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이번 사건이 개화파가 민씨 일당을 몰아내기 위한 정변이었음을 확인한 이상 그대로 당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개화파 일당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청국 군사를 불러들여야 하고, 그들을 불러들여 일본군과 일전을 벌이려면 창덕궁 같은 넓은 장소가 필요했다.
민비는 또 다시 김옥균을 불러 창덕궁으로 돌아가자고 보챘다. 민비 자신이 그렇게 요구할 뿐만 아니라 고종과 대비를 동원하여 환궁해야 한다고 끈질기게 요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화파는 환궁만큼은 허용할 수 없었다. 계동궁은 궁궐이 좁아 소수의 병력으로도 수비할 수 있으나, 창덕궁은 궁궐이 워낙 넓어 소수의 병력으로는 지킬 수 없었다. 
처음 작전계획을 세울 때 강화도로 파천하는 방안을 검토했던 것도 그 같은 어려움을 예상한 때문이었다. 아무튼 창덕궁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걱정스러운 일이 생길 것이어서 김옥균은 다케조에에게 고종이 환궁하라는 지시를 내리더라도 지세의 불리함을 들어 반대하도록 단단히 일렀다. 
그렇게 되자 김옥균과 민비는 환궁 문제를 놓고 또다시 치열한 머리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던 중 김옥균이 외청에 볼 일이 있어 홍영식, 이재원과 함께 계동궁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 사이 고종이 다케조에를 불렀다. 고종은 계동궁이 좁고 누추하여 잠시도 거처할 수 없다는 대왕대비의 말을 전하며, 뜻밖의 말로 다케조에의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비록 청국 병사들이 뜻밖의 변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그들을 방어하는 데는 대궐이나 이곳이나 다를 바가 없지 않소?” 

그 말을 듣자 다케조에는 계동궁을 고집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곧 중대장을 보내 먼저 대궐의 지리를 살펴본 뒤 회답을 올리겠습니다.”

다케조에는 가급적 고종의 요청을 들어 주는 방향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는 일본군 중대장 무라카미(村上)를 불러 행궁 밖의 동정을 살피는 한편, 창덕궁으로 환궁해도 수비하는 데 지장이 없는지 잘 살펴보고 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한 시각이 지나 돌아온 무라카미는 환궁해도 수비하는데 
별 지장이 없다는 보고를 올렸다. 무라카미의 보고를 받자 다케조에는 고종에게 환궁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개화파가 기피했던 창덕궁으로의 환궁은 다케조에에 의해 그처럼 간단히 뒤집혀졌다. 
그 소식을 듣자, 김옥균과 박영효는 불같이 화를 내며 다케조에를 찾아가 따졌다.

“아니, 환궁만큼은 절대로 안 된다고 그렇게 말했음에도 환궁을 허락하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요?” “이곳에서 수비하는 것이나 대궐에서 수비하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으니 조금도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이미 대군주께 그렇게 아뢰었으니 공들은 여러 말 하지 마시오.”

다케조에는 태연히 웃으며 명령조로 말했다. 자신감이 넘치는 얼굴이었다. 일본군 사령관격인 다케조에가 그렇게 말하자, 김옥균도 박영효도 대꾸할 말을 잃었다.
다케조에의 허락을 받은 것이 몹시도 기뻤던지 고종은 김옥균을 불러 다케조에의 말을 그대로 전하며 싱글거렸다. 일국의 왕이 외국 공사의 허락을 받아 행궁을 옮기면서 기뻐했으니, 조선은 이미 볼 장 다 본 나라라 아니할 수 없었다. 일이 그 지경에 이르자 천하의 재사 김옥균도 환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 회전이 빠르기로 소문난 민비와의 기 싸움에서 그는 이미 패배했던 것이다. 그렇게 환궁하기로 결정했으나 곧바로 옮기진 않았다. 환궁을 하되 임금이 거처하게 될 궁궐을 정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개화파의 총사령관격인 박영효는 일본군 중대장 무라카미와 함께 병사들을 거느리고 창덕궁으로 들어가 널리 지형을 살폈다. 그들은 창덕궁 내의 여러 궁궐 중에서 관물헌을 임금이 거처할 궁궐로 정했다. 관물헌은 창덕궁 안쪽에 위치해 있는 데다 뒤쪽으로 방어할 만한 숲이 조성되어 있어 소수의 병력으로도 청군의 공격을 막기에 적합한 장소라 판단했던 것이다.
경우궁에서 계동궁으로 옮긴 지 불과 몇 시간 뒤, 고종과 민비를 비롯한 왕실 일가와 궁인들은 박영효가 이끄는 전영사 병사와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창덕궁으로 되돌아갔다. 정변 이틀째인 12월 5일 오후 5시 무렵이었다. 그 틈에 첩자 노릇을 하던 심상훈이 재빨리 도망쳐 친청사대파와 청군 장수들에게 궁중 내의 움직임을 낱낱이 알렸다. 김옥균과 다케조에는 관물헌의 한 방을 지휘본부로 정하고 고종 곁에 시립하며 외부인의 출입을 감시했다. 대궐의 수비는 세 부대가 나누어 맡았다. 침전 내문은 서재필이 장사들을 배치하여 지켰고, 그 주위는 일본군이 수비했다. 궁중의 출입문인 금호문과 선인문은 좌영사, 우영사와 전영사, 후영사 병사가 수비했다.

개화파와 일본인을 비난하는 여론이 삽시간에 비등하다


어느덧 밤이 되어 병사들이 대궐 출입문을 닫으려 하자 선인문 밖에 있던 청군 장수 오조유(吳兆有)의 부하들이 달려들어 폐문을 방해했다. 박영효가 크게 분개하여 전영사 병사를 이끌고 제지하려 하자 김옥균이 말리며 대문을 열어 두라 했다. 청나라 군사들은 대문 안을 기웃거릴 뿐 쳐들어올 생각은 하지 않았다. 박영효는 전영사, 후영사와 좌영사, 우영사 병사 400명을 네 부대로 나누어 청병들의 동태를 감시했고, 일본군 역시 경계를 강화하고 있었다. 그 날 밤은 그 같은 대치 상황에서 별일 없이 지나갔다.
한편, 심상훈의 밀고를 받은 친청사대파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개화파가 다케조에와 짜고 임금과 왕비, 대신들을 죽이고 왕자 의화군을 왕위에 앉혔다는 헛소문을 퍼뜨렸다. 친청사대파의 거두 6명이 살해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니 반드시 헛소문이라 할 수도 없었다. 아무튼 그 같은 소문이 삽시간에 도성에 쫙 퍼졌다. 개화파를 비방하고 일본인을 비난하는 여론이 순식간에 비등했다. 흉기를 들고 일본인을 찾아다니며 위해를 가하는 자도 있었다. 서울에 체류하고 있는 서양인들도 위협을 느껴 몸을 숨겨야만 했다.
당시의 민심은 결코 개화파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정변 직후 새로 구성된 정부의 요직에 임명된 온건개화파들은 정변에 찬성하지도 않거니와 그 자리에 앉으려 하지도 않았다. 대표적인 예로 미국공사의 통역이자 외무아문 주사로 활동하고 있던 윤치호를 들 수 있다. 그는 철저한 개화파로서 나이가 14살이 많은 김옥균과 형제처럼 지냈고, 개화파 중에서도 식견과 인품, 경력 등을 두루 갖춰 관료사회에서 유망주로 손꼽히는 홍영식과 두터운 친분을 유지했다. 그는 틈이 나는 대로 유대치의 약방을 드나들며 개화파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고, 고종에게 개화사상을 주입시키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다. 때문에 그는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도 즐거운 마음으로 참석했다.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 자리가 정변으로 돌변하자 그는 몹시 당황했다. 그는 미국공사 푸트를 안전하게 피신시킨 뒤 사태의 추이를 예의 주시했다. 
정변 둘째 날에 이어 셋째 날도 아버지를 찾아가 상의했다. 정변이 일어나기 직전 함경남도병마절도사를 지낸 바 있는 그의 아버지 윤웅렬은 혁명정부로부터 형조판서로 임명되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관 출신인 윤웅렬은 일찍이 1880년 2차 수신사 김홍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개화된 신문물과 군사시설을 두루 살피며 개화사상에 심취했다. 일본에서 귀국하자 신식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다. 이듬해 조선 정부가 일본의 개화 현장을 시찰하기 위해 신사유람단을 파견하자 
그는 아들 윤치호를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보내 일본에서 유학생 생활을 하게 했다. 그렇게 해서 그들 부자는 개화의 길을 따르려 했으나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사상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정변 셋째 날 윤치호가 찾아가자, 아버지 윤웅렬은 아들을 앉혀 놓고 정변이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며 그 이유를 조목조목 나열했다. 





소설 소개

우리나라 근대 우정(郵政)의 선구자이자 대표적인 개화파였던 금석 홍영식 선생의 눈을 통해 지금으로부터 130여 년 전 개화의 바람이 몰아치던 19세기 말의 조선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


저자 이기열

30년 가까이 월간 《정보와 통신》 (現 《우체국과 사람들》)지 편집장으로 일하며 도약 연대의 정보통신 발전상을 지켜보았다. 1980년대 정보통신 발전 비사인 <소리 없는 혁명>을 집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