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근대 우정(郵政)의 선구자이자 대표적인 개화파였던 금석 홍영식 선생의 눈을 통해 지금으로부터 130여 년 전 개화의 바람이 몰아치던 19세기 말의 조선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

글. 이기열

나는 마땅히 어가를 따르리다 - 15화
2017.03



푸트가 공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하려 한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홍영식이 곧바로 달려갔다.


“공이 이제 귀국하려 하는 것은 우리 조선의 일이 제대로 되어 가는 것이 없고, 백성들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음에도 공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고, 완고한 자들을 가르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오. 공의 그런 괴로운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스스로도 부끄럽게 생각하기 때문에 개탄하고 있소. 하지만 공이 귀국하고 나면 어느 누가 공처럼 우리 조선을 위해 진심으로 걱정하고 애써 주겠소. 생각하면 할수록 슬플 뿐이오. 공은 어찌하여 한때를 기다려 우리 조선이 기틀을 다진 후에 돌아가려 하지 않소. 그리되면 공은 가히 끝맺음을 볼 수 있을 것이며, 우리 조선도 공이 염려해 주신 덕분에 발전하게 될 것이오. 나는 나 개인이 아닌 우리 조선을 위해 속마음을 토로하는 것이오.”


홍영식은 푸트의 귀국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말렸다.


“솔직히 말해 줘서 고맙소. 내가 귀국을 생각하게 된 까닭을 이야기하겠소. 작년 봄 처음 조선에 왔을 때 우리 미국 정부는 나에게 전권을 주어 비준을 교환하도록 했소. 내가 판단하여 서울에 머무르겠으면 머무르고 불가하다고 판단하면 조선에 주재하지 말고 이웃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때때로 조선의 형세를 살피라 했소. 내 생각은 달랐소. 조선에 주재할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서울에 상주하며 두 나라 간의 우의를 다지고 조선이 발전하는 일을 돕겠다고 기약했소. 그런 까닭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가족을 데리고 서울에 와서 살게 되었소. 일편단심으로 우리 두 나라가 화목하게 지내기를 바랐고, 이 푸른 눈으로 조선의 이익을 돌보았던 것이오. 서울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 목 씨를 만나게 되었소. 나는 이 사람과 함께 외교나 통상 등 조선에 유익한 일을 의논하며 조선의 개혁정치를 도우려 했소. 그것이 또한 목 씨를 조선의 외교 고문으로 앉힌 까닭이라 할 것이오. 그런데 이 사람은 심사가 공평치 못해 나를 자기 당으로 삼으려는 생각만 했소. 물론 나는 그의 뜻을 따를 수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었소. 그래서 외아문과 상의할 일이 있으면 나는 반드시 외무독판에게 말했소. 그 까닭은 목 씨가 비록 고문 자리에 있기는 하나 전권하는 권한이 없으며, 나는 당당히 미국 정부의 흠차(欽差)공사로서 조선 정부와 더불어 수호통상을 하러 온 것이지 목 씨를 위해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소.”


푸트의 이야기는 길게 이어졌다. 


묄렌도르프와 푸트 공사가 앙숙이 되다


그때부터 묄렌도르프는 푸트에게 악감정을 품기 시작했다. 외무협판인 자신을 제치고 직속상관인 외무독판을 직접 상대하는 데 대한 반감이었다. 서울에 주재하는 외교관은 물론 모든 외국인이 굽실거리며 모든 일을 자신과 상의하는데 유독 미국공사만이 뻣뻣하게 굴었다. 그러자 묄렌도르프는 푸트를 헐뜯으며 미국과 관련된 일은 무엇이든 작정하고 방해했다. 그처럼 묄렌도르프는 일국의 나랏일을 업무적인 자세가 아닌 감정적인 자세로 대했다. 

그러자 어느 날 푸트가 묄렌도르프를 만나 쏘아붙였다.


“나는 미국 정부의 명에 따라 조선 정부에 사절로 온 것이지 그대에게 온 것이 아니다. 내가 왜 매사를 그대와 상의해야 하는가?”


그 말을 들은 묄렌도르프는 푸트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

푸트는 심성이 곧고 바른 사람이었다. 그는 묄렌도르프와 타협하지 않는 대신 조선이 문명 세계로 발전해 나가도록 하는 일에 일조하고 싶었다. 그런 일이라면 미국공사로서 무슨 일이든 도우려 했다. 그가 묄렌도르프와 타협하지 않는 것도 묄렌도르프의 자세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었다. 묄렌도르프는 조선의 이익보다 청나라의 이익을 위해 일했고, 사대파와 손잡고 개인의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기에 같이 손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으로 하여금 문명 세계로 발전해 나가도록 하는 데 밑거름이 되겠다는 푸트의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 것은 또 있었다. 수준이 너무나도 저급한 조선 관원들의 공무 자세였다. 그들은 좀처럼 의견이 합치되는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서로 원수처럼 지냈다. 정책이나 외교의 옳고 그름, 국가의 안위, 백성의 도탄 등에 관심을 가진 자는 없고 오로지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다. 그런 자들과 조선의 개화를 논하는 것은 마치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얻으려 함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가 조선 개화의 꿈을 버리고 귀국을 결심하지 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였다.


“더욱이 지난 며칠 동안 목 씨가 여러 관원을 지휘하며 서로 돕고 있어 목 씨와 미국인은 이제 그 형세가양립할 수 없게 되었소. 이런 꼴을 보고도 머리를 숙이고 마음을 낮춰 가며 괴롭게 시일을 보내는것이 귀국을 위해 무슨 이익이 되겠소. 이것이 바로 내가 귀국하려는 이유요. 다시 말해, 나의 이상을 능히 펼 수 없는 까닭에 허둥지둥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것이오. 만일 내 이상을 펼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왜 아니 머무르겠소.”


푸트는 귀국을 결심할 수밖에 없는 비통한 심정을 그처럼 숨김없이 토로했다.


“대저 나무는 스스로 썩은 뒤에 벌레가 생기고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업신여긴 뒤에 사람들이 업신여기는 것이오. 지금 목 씨의 잘못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홍영식은 그렇게 전제하고 나서 묄렌도르프의 잘못을 조목조목 나열했다. 구체적인 예로, 미국이 조선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때는 공정했는데 묄렌도르프가 참여하여 영국과 조약을 체결할 때는 우리의 권리를 많이 빼앗겼음을 첫 번째 잘못으로 꼽았다. 미국의 경우 조선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세칙을 정하도록 함으로써 많은 이익을 챙기게 했는데, 영국과 세칙을 정할 때는 많은 권리를 포기하게 했음을 두 번째 잘못으로 꼽았다. 조선 정부는 제물포를 각 나라 사람들이 같이 거주하는 조계지로 삼으려 했는데, 묄렌도르프가 어느 지역을 골라 일본인에게 아첨하고 다른 지역을 골라 청나라 사람들을 기쁘게 한 뒤 나머지 처진 땅을 서양인 거류지로 삼았음을 세 번째 잘못으로 꼽았다. 홍영식은 그처럼 묄렌도르프의 잘못을 지적하고 조선 정부 관원들의 용렬함을 꼬집고 난 뒤 푸트에게 아리송한 질문을 던졌다.


“지금 여기에 한 기름등이 있어 불빛이 매우 밝으나 밖에 있는 물건에 가려 안의 빛이 능히 밖을 비추지 못하고 밖의 물건은 능히 밝은 빛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합시다. 어떤 사람이 가리고 있는 물건을 걷어내 그 빛을 내보내려 하나 그 물건이 너무 뜨겁고 단단해서 쉽게 걷어낼 수가 없기 때문에 부득이 그 물건을 깨뜨려 그 빛을 사방에 전하고자 하오. 그때 누군가가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면 잘한 일이라 하겠소, 잘못한 일이라 하겠소?”

“공의 질문은 큰 뜻을 내포하고 있어 가볍게 대답하기는 어렵네요. 나의 어리석은 소견을 말한다면, 지금 이 등은 사면으로 바람이 부는 곳에 놓여 있어 그 가리고 있는 물건은 부는 바람에 의해 깨질 수도 있고, 불이 붙어 깨질 수도 있고, 열이 심해 깨질 수도 있는데, 어찌하여 손으로 두드려서 깨려 하나요? 요행히 손으로 깨뜨리는 것이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면 좋겠지만, 만약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손을 델 수도 있고 옷을 태울 수도 있어 그 위태로움을 측량할 수 없을 것이오. 자칫 역적의 이름을 뒤집어쓸 수도 있으니 어찌 위태롭다 하지 않겠소. 이런 까닭으로 나는 조용히 기회를 엿보아 등을 가리고 있는 물건들이 스스로 깨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은 계책인 것으로 생각하오.”


홍영식과 푸트는 그처럼 등불을 비유 삼아 오랜 시간 거사를 해야 하느냐 마느냐는 문제를 놓고 논의했다. 푸트는 여전히 거사의 원칙에는 찬성했으나, 그 시기가 이름을 이유로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충고했다.   





개화파와 사대파 간에 치열한 첩보전이 전개되다


그 무렵 개화파의 스승 유대치가 병이 들어 개화파 모임에 참석할 수 없었다. 박규수, 오경석, 유대치로 이어진 개화파의 세 스승 중 마지막 남은 유대치마저 병이 들었으니 개화파 사람들의 걱정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오경석과 동갑인 유대치는 벌써 54세가 되어 노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 핵심 인사들이 모여 술을 마신 뒤 병석에 누워 있는 유대치의 집으로 찾아갔다. 유대치가 아픈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 그들을 맞았다.


“죽첨공사가 다시 서울로 온 뒤로 온 세상이 시끄러워져서 마치 파도가 치고 구름이 일듯이 물의를 일으키고 있어 매우 위태롭게 생각하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일을 진작 도모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드는데, 일본 정부의 정략을 귀공들은 과연 깊이 알고 계시나요?”


유대치가 문제의 핵심을 끄집어냈다. 거사를 앞두고 있는 개화파의 입장에서 과연 일본을 믿어도 되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현시점에서는 일본 정부의 정략에 대해 논의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설사 일본 정부의 원조를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이 배수의 진을 친 데다 양식마저 떨어진 형국이어서 매우 절박합니다. 참으로 일본 정부의 협조 여부를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침 다시 돌아온 다케조에가 과격하게 나와 오히려 우리에게 화를 미칠 염려가 있으니 이 또한 시운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제 운수는 하늘에 맡기고 한번 죽기로 결정한 바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선생께서는 안심하고 몸조심하소서.”


김옥균이 말했다. 그는 개화파가 처해 있는 입장이 배수진을 친 것처럼 매우 위급한 상황임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정말 염려되는 것은 과연 우리가 거사를 할 만한 힘을 갖추고 있느냐는 것이오. 일본 군사는 겨우 100여 명에 불과한데, 비록 군기는 청국 군대보다 강한 듯하나 인원수가 훨씬 적으니 

그 점이 심히 걱정이오.”


유대치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문제점을 지적했다. 핵심을 찌르는 말이었다. 청불전쟁에서 비록 청군이 패했다 하나, 아직도 서울에 남아 있는 청군은 1천 500명이나 되었다. 그 숫자도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청불전쟁으로 3천 명이던 청나라 군사 중 절반이 철수했다는 소문에 따라 추정한 수치일 뿐이었다. 따라서 현재 서울에 청군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었다. 

일본군도 마찬가지였다. 현재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이 몇 명이나 되는지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었다. 일본공사관 직원이나 일본군 장교들의 말을 듣고 150명인 것으로 추정할 뿐이었다. 그 숫자

도 청군과 비교하면 10분의 1밖에 안 되었다. 그처럼 숫자로 보아 열세인 일본군을 믿고 정변을 일으킨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무모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큰소리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막상 청군과 일본군 간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일본이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이며, 얼마나 많은 병력을 얼마나 빠른 시간에 한반도에 투입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런 문제는 국가 기밀에 속하는 사항이어서 아무도 섣불리 말하려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옥균과 박영효 등 개화파 지도자들은 미구에 거사를 단행하는 쪽으로 일을 몰고 갔다. 그것은 반드시 거사에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에서 내린 결론이 아니었다.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에게 달려들 듯,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난 개화파가 국가 권력을 움켜쥐고 있는 친청사대파를 물기 위해 달려드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다시 말해, 개화와 수구라는 시대사상의 충돌에서 패배한 개화파가 시세의 흐름을 반전시키기 위해 정변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택했던 것이다.

이튿날 친청사대파의 움직임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던 행동대장 이인종이 김옥균의 집으로 달려가 보고했다, 우영사 민영익이 그 날 새벽 느닷없이 청군 장수 원세개를 찾아가 밀담을 나누었는데, 헤어질 때 원세개가 진중에 명령을 내려 단속이 더욱 엄해졌다는 것이다. 그 보고를 받자 김옥균은 즉시 행동대원 고영석을 보내 민영익이 몇 시에 돌아왔는지 알아보라고 했다. 민영익의 진영에 다녀온 고영석은 민영익이 3시 40분에 원세개와 함께 우영으로 돌아왔고, 원세개는 다시 청장 오조유(吳兆有)의 진영을 찾아갔다 동틀 무렵에 하도감으로 되돌아갔다고 했다. 민영익은 그 무렵 목구멍에 병이 났음을 핑계로 궁중 출입을 하지 않아,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김옥균은 이튿날 오위장 양홍재를 불러, 지난밤 민영익이 원세개를 방문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양홍재는 민영익의 방문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다만 원세개가 우영에 도착하여 민영익과 필담을 나눴는데, 필담 원고는 민영익이 상자 속에 깊숙이 감춰두었으므로 기회가 닿는 대로 뽑아 보겠으며, 그 내용을 알게 되면 즉시 찾아와 보고하겠다고 했다. 양홍재는 민영익이 수족처럼 부리는 수하인데, 개화 세상을 동경해서인지 이따금 김옥균을 찾아와 민영익의 동정을 알려 주곤 했다.

깊은 궁궐 안의 소식을 전해 준 사람은 내시였다. 밤이 이슥해지면 내시가 김옥균의 집으로 찾아와 상감과 중전의 일상생활 등 시시콜콜한 일까지 알려  주었다. 중전마마의 봉서를 전하는 무감들이 민영익, 민태호, 민영목 등의 집을 수시로 왕래한다는 사실도 알렸다. 원세개 일당이 중전 민씨를 중심으로 모종의 음모를 진행하고 있음도 귀띔했다. 어느 날 각감 박대영이 찾아와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전날 밤 민영익이 대궐로 찾아와, 그동안 연경당 앞에 방치해 두었던, 묄렌도르프가 독일에서 사 온 대포 2문을 수리할 데가 있다며 청군 장수 오조유가 주둔하고 있는 하도감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그처럼 개화파의 거사 일정이 확정되기도 전에 개화파와 사대파 간에 치열한 첩보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첩보전의 지휘자는 개화파의 경우 김옥균이었고, 뚜렷한 지휘 체계가 갖추어져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친청사대파의 경우 민영익이 그 역을 맡고 있었다. 





서울에 주재한 외국인도 첩보전에 가담하다


김옥균과 박영효 등 개화파 지도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한 사람은 행동대원들만이 아니었다. 서울에 주재한 외교관들도 곧잘 그들을 찾아와 대화를 나누며 정보를 흘렸다. 

어느 날 영국영사 애스턴이 김옥균을 집으로 찾아와 청국과 러시아 사이에 모종의 교섭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렸다.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철저히 봉쇄하고 있는 나라가 영국이었기에 당연한 귀띔이라 할 수 있었다. 

한성순보의 발간 업무를 맡고 있는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도 김옥균에게 유용한 정보원이었다. 어느 날 이노우에가 김옥균을 찾아와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근일 일본공사관의 동정이 예전과는 크게 달라진 것 같습니다. 공들과의 관계는 여전하지요?” 


이노우에가 물었다. 조선의 대표적인 지식인인 데다 자신보다 10여 살 연상이기에 그는 언제나 김옥균을 스승처럼 깍듯이 대했다. 


“우리가 언제 일본공사관과 가깝게 지낸 적이 있었나요.”


김옥균은 부러 딴전을 피우며 상대방의 말에 관심이 없는 척했다.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공들이 우리 공사관과 가깝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걸요. 아무래도 지금처럼 협조적인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을 때 큰일을 도모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노우에는 김옥균의 엉뚱한 반응을 무시하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나도 그런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나 아직 귀국 정부의 뜻을 알 수 없는 데다 다케조에공사가 하는 말만 믿고 가벼이 움직일 수는 없지 않소. 그래서 말인데, 그대가 나를 위해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 선생에게 자세히 알아보고 근일의 귀국 정부의 뜻을 알려 주는 것이 어떻겠소?”


김옥균은 그때에야 비로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 일에 대해서는 제가 지인에게 서신을 보냈으니 다음 선편에 회신이 올 것 같습니다. 공들이 하는 일은 제가 살펴 알고 있으나, 공들이 저에게 숨기기만 하니 그 점이 매우 섭섭합니다.”


이노우에는 섭섭한 마음을 솔직히 토로하고 나서, 그동안 민영익이나 김윤식 등 친청사대파 인사들과 만나 필담을 나눴던 내용을 숨김없이 알려 주었다.

어느 날 후영사 윤태준이 김옥균을 찾아왔다. 윤태준은 임오군란 때 민비를 보호한 공로로 왕실의 신임을 얻어 친군영 우영사를 거쳐 후영사로 임명되어 군권을 거머쥐고 있었다. 민영익과 결의형제를 맺을 만큼 가까웠는데, 꾀가 많아서인지 ‘여우’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개화파가 숙청 대상 1호로 삼고 있는 자였다. 


“그런데 공이 그 자리를 사직한 것은 다케조에의 훼방이 있기 때문이었소?”


김옥균은 윤태준이 외무협판 자리를 사직한 데 대해 가볍게 꾸짖고 나서 그렇게 물었다.


“그 일은 나 혼자 결정한 것이 아니고 또 지나간 일이니 지금 이 자리에서 논할 일은 아닌 것 같소. 요즘 들으니, 죽첨이 공과 새로 교분을 맺어 그새 자못 친해졌다 하니, 공은 일본 정부의 근황을 자세히 알고 있을 것 아니오. 숨기지 말고 이야기해 주시기 바라오.”


윤태준은 그처럼 자신의 방문 목적이 일본 정부의 최근 움직임을 알고 싶다는 데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다시 말해, 과연 일본이 청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것이냐는 점이 몹시도 궁금했던 것이다.

‘죽첨(竹籤)’이란 주조선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籤進一郞)의 한자명이었다.


“내가 목인덕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그로 인해 죽첨과의 사이도 벌어졌기 때문에 작년에 일본에 갔을 때 허다한 곤경에 처했다는 것은 공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니, 죽첨과 나의 교분 또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오. 이번에 죽첨이 조선에 와서 한 여러 가지 온당치 못한 일에 대해 나는 여러 차례 비웃었소. 만약 일본이 장차 청국과 전쟁을 일으킬 뜻이 있다면 어찌 어린애 장난처럼 경박하게 굴겠소. 그런 점으로 미루어볼 때 일본 정부가 결코 청국과 전쟁을 일으킬 뜻이 없음을 알았소. 내가 살펴본 바로는 죽첨이 공사로 부임한 이래 꾸미고 있는 일들이 하나도 유약하지 않음이 없으며, 특히 강자에게 굽히는 본색을 드러냈는데, 그로 인해 외국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고 있고 일본 내에서도 비판이 없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소.”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기에 김옥균은 그처럼 이야기를 부정적인 방향으로 몰고 갔다.


“아, 그렇군요.”


수궁한다는 듯 윤태준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배상금을 상환하는 일을 가지고 죽첨이 불학무식한 조선 사람들에게 강한 기세

를 보이려 한 것이오. 공이 사직한 것도 그의 술책에 빠진 것이어서 매우 한스럽게 생각하는 바이오.”


김옥균은 여전히 다케조에와 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닌 것처럼 가장했다. 윤태준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듣고만 있었으나, 그의 얼굴에는 반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개화파와 친청사대파는 그처럼 서로 속이고 속으며 첩보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소설 소개

우리나라 근대 우정(郵政)의 선구자이자 대표적인 개화파였던 금석 홍영식 선생의 눈을 통해 지금으로부터 130여 년 전 개화의 바람이 몰아치던 19세기 말의 조선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


저자 이기열

30년 가까이 월간 <정보와 통신> (現 우체국과사람들)지 편집장으로 일하며 도약 연대의 정보통신 발전상을 지켜보았다. 1980년대 정보통신 발전 비사인 <소리 없는 혁명>을 집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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