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후 우체국 이모저모

광복 후 우체국 이모저모

우체국역사

광복 후
우체국
이모저모

1945년 8월 15일, 한민족이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을 되찾은 날이다. 기다리던 광복이었지만, 이후 혼란한 국가 상황이 도래됨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제 피탈로 인한 재정 악화는 물론 미군정 체재 아래 안정되지 않은 모습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우체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모든 것이 어려웠던 시기였지만, 한편으로 희망과 도전이 가득 차 있던 시간, 우체국은 무엇을 배달했을까?

글. 최재욱

광복 후 우체국 이모저모
2017.08

점점 줄어들었던 우체국


광복 직후인 미군정 시절에는 재정적 이유로 우체국 수를 줄이는 정책을 펼쳤는데, 주로 우체국 분포도가 높았던 대도시의 우체국들이 폐국되었다. 광복 후부터 6·25전쟁 때까지 우체국 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하였는데. 1945년 광복 당시 692개국이었던우체국 수는 1948년에 이르러서는 625개국까지 줄어들었다. 국민들이 편리하게 이용하기엔 절대적 수가 부족했음에도 국가 상황에 따라 계속 감소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자 정부 수립 이후 체신부의 초대 장관 윤석구는 1면 1국 개설을 대외적으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의지와는 달리 국가 재정 상태가 매우 빈약했던 때였던 만큼 확충이 쉽지 않았다. 

정부가 수립된 이후 여러 지역에서 우체국을 설치해달라는 요청이 많았다. 《한국우정 130년사》에 따르면 문경군 가은면, 여문경가은우체국 수군 남면, 무주군 설천면, 울산군 하상면, 괴산군 청안면 등이 우체국 개설을 요청했던 대표적인 지역들이다. 해당 지역들 중 현지 실사를 통해 우선순위를 선정하였는데 첫 번째가 바로 문경군 가은면이었다. 탄광으로 유명한 가은 광산의 소재지였던 그곳은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지속적인 설치 요청이 있었던 곳이었는데, 해당 지역에서 청사, 비품, 시설 일체를 부담하겠다고 나섰기에 첫 번째 설치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문경가은우체국


일화로 보는 그때 그 시절


이기열 작가의 《일화로 보는 우편 130년》에 따르면, 문경군 가은면 우체국 개국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당시 체신부장관을 대신하여 우정국장 최재호가 개국식에 참석하기로 하여, 그 날짜에 맞춰 문경에 내려갔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우체국청사가 준비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우정국 실무자는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지역 담당자(부산청)의 보고를 받고 개국일을 잡았는데, 지역 담당자는 현지 점검 때 대략적인 준비가 끝나 최종 확인을 하지 않고 완료 예정이라 보고를 했던 것이다. 당시 최재호 국장은 해당 사태에 대해 지역 대표로 마중 나온 문경군수에게 책임을 물었고, 방법을 고안해 낸 끝에 면사무소에 임시 우체국을 세우고 개국식을 열자는 방안이 도출되었다. 면사무소의 크기가 크지 않아 여유 있는 공간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우선 개국을 해 놓아야 미비한 청사 준비가 빠른 시일 내에 완료될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결국 면 회의실을 임시우체국으로 사용하기로 하고 하루 만에 창구시설을 완비하는 작업을 하여, 무사히 개국식을 마칠 수 있었다. 




여수남면우체국


간절히 필요했던 우체국서비스 


이러한 우체국 수 확대를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체국을 찾아보기는 점점 더 어려워졌으며, 1950년 6·25 전쟁으로 인해 많은 우체국이 파괴되면서 그 수는 1952년 587개국까지 감소되었다. 하지만 전쟁 이후 정부 서비스가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우체국 또한 보편적 서비스를 지향하면서 2003년 우체국 수는 3,732개국까지 증가하였다. 최근에는 통신기술이 발달하면서 효율성 제고를 위해 다소 감소된 3,500여 개 수준으로 운영되고 있다. 21세기에 사는 우리는 너무나 당연히 높은 수준의  우체국서비스를 누리고 있지만, 우체국 수가 오늘날의 1/5 수준이었던 70여 년 전에는 먼 걸음을 가서도 이용하기 쉽지 않았던, 또한 간절히 필요했던 서비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