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시던 부모님, 불안정한 가정에서 예민한 사춘기를 보내며 방황하는 오빠와 남동생, 그 속에서 희망 없는 나날의 연속이던 어린 시절을 나는, 아프고 힘든 성장통을 앓고 있었다. 잎을 피우기도 전에 꽃을 피운 뒤 시들어가는 목련처럼 나는 생을 피워보기도 전에 절망을 키우고 스스로 어둠에 익숙해져 있었다.
10살 소녀가 이겨내기에는 시리고 추운 불행한 가정이라는 계절. 내 마음에는 꽃 한 송이 피어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때 나의 고모가 나타났다. 고모는 아빠의 막내 동생으로 시골에서 사는 가족 중 유일하게 공부하여 국문과에 들어갔다. 고모가 대학에 다니기 위해 우리 집에 4년간 같이 살게 된 것이다. 고모는 박스 하나를 열어 짐을 풀었다. 그 속에는 일기장과 함께 우리나라 중· 단편소설과 세계문학전집이 가득했다. 고모는 내게 슬프면 참지 말고 글이나 자신에게 편지를 써보라고 했다. 상처가 독이 되어 나는 그 나이의 소녀들과 달리 침묵과 친구가 되어 있었고 자존감은 물론 학교에서 발표 한번 해 보지 못할 정도로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었다.
고모가 선물한 일기장과 편지지에 나는 용기 내어 하루에 한 장씩 글을 써 보았다. 글이라기보다 낙서가 맞는 표현이었고 뜻도 모르고 이해도 안 되었지만 고모의 책들을 필사하며 멋진 말들을 하나씩 배워나갔다. 늘 욕설과 폭력적인 말만 들었던 내게 책 속의 글은 외국어처럼 생소했고 또 매력적이었다.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나는 많은 책을 읽어 내려가고 시간이 지나면서 고모의 생각과 시각, 성격을 닮아가기 시작했다. 고모가 학교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길 기다리며, 책 속의 인물들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나는 헤르만헤세, 괴테, 유정 등 많은 작가와 만나고 마치 이야기를 나누는 듯 자연스레 작가를 꿈꾸게 되었다.
고모의 존재로 부모님은 더 사이가 악화되었고 나는 그럴 때마다 고모가 떠날까 봐 불안에 떨며 일기장 한 권에 기대 울기도 했다. 고모는 내게 엄마였고 꿈을 갖게 해준 멘토였으며 삶을 희망으로 여기게 해준 나의 위로였다. 대학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취직하러 가는 고모가 내게 써준 편지를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힘들 때 슬플 때 고모가 그리울 때마다 꺼내 읽으며 참으로 열심히 산 결과 나는 두 딸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교사라는 꿈을 이루고 23년간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고모는 대추 한 알이 열리는데 참으로 많은 벼락과 비를 맞는다며 희망을 잃지 말고 꿈을 키우라고 알려줬고, 덕분에 나는 꽃을 피울 수 있었다. 3년 전 내가 갑상선암 수술을 받고 입원해 있을 때 먼 길을 한걸음에 달려와 준 고모 손을 잡고 참으로 많이 울었다. 밤새 내 곁에서 잘 이겨내 주고 잘살아주어 기특하다며 딸처럼 아껴주던 고모. 고모는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씨앗을 품고 태어나며 포기하지 않으면 누구나 꽃을 피울 수 있다고. “나의 고모 당신은 언제까지나 나의 영웅이며 은인입니다. 고모에
게 자랑스러운 조카로 앞으로 더욱 빛나는 존재로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사람으로 살아갈게요.”
고모가 몹시도 그리운 오늘, 칠흑 같은 밤하늘에 걸린 초승달 벗 삼아 고모를 향한 그리움 편지로 달래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