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고향 뒷산 기슭에 고색이 창연한 慕遠齋가 있다. 이 재실은 수백년된 우리 문중 재실로 한때는 學童 들의 글 읽는 소리가 마을을 진동했건만. 지금은 군데군데 담장이 무너져 있고 여기저기 거미줄이 뒤엉켜 있으며 새와 쥐의 놀이터로 변해 있어 榮枯浮沈을 말해 준다. 10년 전만 해도 갓쓴 선비들이 가끔 들렀건만 지금은 아무도 이곳을 찾는 사람이 없다. 필자가 일년에 한두번 길흉사 관계로 고향을 찾을 때마다 이 모원재를 한 바퀴 둘러보고 마루에 우두커니 앉아 그 옛날 붐비던 때를 회상해 보면 왠지 마음이 착잡하고 무겁다.
동서고금 어느 시대, 어느 역사, 어느 가문, 어느 개인에 있어서나 흥망성쇠와 영고부침은 있게 마련이요,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이기도 하지만, 지금 잡초만 우거져 폐허가 되다시피 한 모원재를 볼 때 과거 당당하고 화려했던 영화는 간 곳 없고 계절 따라 들꽃만이 피고 지면서 무성한 들풀만 제 세상을 만난 듯 바람에 일렁이고 있다.
재실이란 원래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을 말하는데, 고려 말기 주자학이 들어온 이후 주자가례를 통하여 조상을 숭배하는 예의 법도를 중시하는 사회가 되면서 어린이를 교화 하고 후진을 양성하는 서당의 역할도 겸하게 되었다. 경상북도는 다른 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재실이 많은데. 특히 청도는 다른 어느 군보다 더 많다. 향토사학자 이종국씨의 주장에 의하면 서원, 서당, 재실이 330여 개소에 달하며, 이 가운데 대부분을 차지하는 재실은 이 고장의 애국적인 풍토와 충효의 전통, 그리고 면학 풍토의 조성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청도는 일찍부터 유학을 숭상하여 서원이 많았으나 조선 말기 대원군의 훼철령으로 대부분 없어지고 지금 이서면 서원동의 자계서원, 금천면 신지동의 선암서원, 각남면 일곡동의 학남서원 등이 남아 있으며 화양읍에 향교가 있다. 이와 같이 어느 지방보다 유교정신이 강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성씨별로. 문중별로 자녀 교육에 특단의 노력을 경주한 나머지 많은 재실을 보 유하고 있으며. 이를 활용하여 修學에 노력한 결과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세월은 가도 추억은 남는다. 그러니까 필자가 학교를 갓 졸업하고 모원재에서 청운의 꿈을 안고 공부한 일들이 연륜이 쌓여감에 따라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곤 한다. 이곳에서 보통고시를 공부한답시고 강좌 10권을 싸들고 두문불출 방안에 틀어박혀 삼라만상 다 잠든 깊은 밤에 어둠침침한 호롱불 밑에서 책과 싸워 2번 이나 응시하였으나 낙방의 쓴 잔을 맛보았고, 이 제도가 폐지되고 5급공무원제도가 있을 때 1년 동안 책과 씨름하면서 잠을 설치곤 했다. 그 어느 때 보다도 꿈 많고 감수성이 예민한 때여서 그런가. 그 동안 긴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밤을 새워가며 책장을 넘기던 일들이 나에겐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된다.
뿐만 아니라 한학자인 선친이 계실 때 이곳 모원재에서 여름, 겨울 방학 중에 공자왈 맹자왈 하면서 한문공부도 했었다. 그때 서당과 재실에서 제일 먼저 배우는 책이 기초 한자 교육을 위한 천자문과 四字小學이었고, 이어서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은 오륜을 가졌기 때문이라 하여 인간의 도리와 삼강오륜을 간략하게 설명한 동몽선습, 계몽편을 익 히며 그 다음에 명심보감이나 소학을 학습하였다. 그 내용은 다 함께 옛 고전에 수록된 현인들의 아름다운 언행을 가려 뽑아 만든 것으로 오늘날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는 민주사회에 있어 남존여비, 허례허식 등 다소 수용하기 어려운 대목이 간혹 있을지 모르나. 전편을 통하여 스며 있는 전통적 윤리정신은 아직도 우리 생활에 생명력을 갖고 살아 숨쉬고 있으며, 그 내용에 있어 영원불변적 진리성은 억겁의 세월이 흘러도 소홀히 취급할 수 없다.
해방 후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는 한글전용 교육과 한자 폐지론이 강하게 일고 있던 때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문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특히 한문 속에 숨어 있는 옛 성현들의 지혜있는 말씀은 지금도 새겨보면 마음에 와 닿는 것이 많다. 필자는 공채에 합격하여 체신부에 몸을 담고 부터도 가끔 시간이 있을 때 사서삼경 언해본을 走馬看山式으로 한번 훑어보았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청소년 비행, 폭력, 범죄, 패륜행위가 날이 갈수록 심각한 사회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인성교육. 예절교육, 질서교육, 생활철학을 담고 있으며 국민교화를 목적으로 한 한문교육은 우리 국민의 덕성, 윤리교육에 이바지한 공이 크다 하겠다.
어린이들에게 한자교육은 두뇌 개발과 성격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기억력. 창의력을 길러주는 데도 지대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이웃 일본에서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 있다. 어느 정도 한자 실력만 있으면 다른 사람보다 쉽게 일본어, 중국어를 학습할 수 있다. 필자가 잠시 우정연구소에 근무할 때 독학으로 쉽게 일본어와 중국어를 공부하여 어학보상금을 받은 사실이 있다. 한자는 획수가 많고 복잡하여 우선 배우기 어려운 점도 있으나, 部首의 뜻을 먼 저 알고 체계적 합리적으로 익히면 용이하게 배울 수 있다. 이 세상에서 노력 없이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느 나라,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정신적 가치를 대변해 주고 있는 윤리 · 도덕 정신이 바로 서 있는 나라는 건전하고 안정된 사회를 나타내고 있으며 윤리 · 도덕이 부재한 나라는 혼란과 무질서, 부패한 사회 현상을 보이고 있다.
지금 우리 민족이 서둘러야 할 과제는 正心修身의 덕성교육이다. 조상의 얼이 담긴 전통문화가 반세기 동안 서양의 물질문명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현시점에서 진정한 우리의 뿌리와 정신을 계승,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한문에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금언으로 삼아야 할 보석 같은 말들이 너무나 많다. 이것을 익히고 배워 생활에 이용한다면 우리의 삶이 그만큼 맑고 밝으며 풍요로워질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특히 극단적인 황금 만능의 물신주의 생활 풍토가 사회 전반을 휩쓸고 있어 자칫 방향 감각이 상실 되기 쉬운 오늘날에는 생활의 지혜와 슬기를 제공하는 명심 보감이나 논어를 한번쯤 읽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