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우리 문자인 한글이 창제 공포된 후에도 중국 문자인 한문(漢文)을 공용문자로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개화기에 들면서 비로소 한글이 공용문서에 쓰이기 시작하였다.
법제상 한글을 공용어로 정한 것은 1894년(개국 503년) 7월 8일. 외국 국명, 지명, 인명을 국문(한 글)으로 번역 시행한다는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의안(議案)이 공포됨으로써 비롯한다. 그 후 1895년 (개국 504년) 5월 8일 칙령(勅令) 제86호로 공문식 (公文式)을 개정하면서 한글 전용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第9 條 法律命令은 다 國文으로써 本을 삼고 漢譯을 附하며 或國漢文을 混用홈
이러한 한글 전용의 대원칙이 제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법률이나 명령을 순 한글로 제정한 예는 없고, 각 기관과 당사자 간에 내왕하는 공문서도 국한문 혼용이 상례로 되었었다.
필자는 다년간 통신사료(通信史料)를 섭렵하면서 우리나라 공문서에 최초로 한글을 전용한 예로 다음 페이지의 문서를 발견하고 한 때 흥분을 참을 수가 없었는데, 이 문서는 1897년(건양 2년) 3월 19일자이니 지금으로부터 104년 전의 일이며, 신문의 발행 인가장이다.
아울러 이 문서와 관련하여 몇 가지 신문에 관계되는 옛 이야기를 소개하겠다.
신문의 발행 인가는 우체관서가 주관하였다.
옆의 문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미국인 원두우 (Horace Grant Underwood) 등이 「그리스도신문」을 발행하겠다는 청원에 대하여 농상공부대신이 인가한 것은 다음의 규정에 의한 것으로 당시는 인가권이 우체관서에 있었음을 말한다.
國內遞規則(開國 504年 - 1895년 - 5月 260令 第124號)
第19條第二種便物(官報 新聞 등)은 官報外난 미리 其發行人으로써 其本題와 每日 或 每月에 幾次發行할만한 曲를 記한 書面에 本紙一個를 見樣으로 添附하고 農商工 部에 보내여 認可를 밧고 每號에 農商工部 認可라 하난 記를 見하기 容易케 함 이 可홈(이하 생략)
이 규칙을 어기면 신문사장이 볼기를 맞는다.
국내우체규칙은 규정을 어기는 자에게 볼기를 치는 형벌을 가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문사장이 우체관서에 불려가 태장(杖)으로 볼기를 맞는다. 그것도 하나요, 둘이요, 80대까지. 그러나 규칙을 어겼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았다.
미국목사원두우
의사변 돈 각하
귀함을 접하온즉 사월 초일일붓터 그리스도신문을 츌판함은 아국 인민의게 유익할 바이라 본 데신이 깃
버 인가하오며 이 신문을- 외방에 보내는 우체요금은 국내 우쳬규측에 증한 바를 의하야 츌부하시압
건양 이년 삼월 십구일
농상공부대신 니 윤 용 돈
참조: 이 문서의 원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농상공부거첩존안」(도서번호 奎18152 ) 그리고 이 문서 가운데 하온즉’ ‘하오며 따위 하자의 'ㅏ’ 는 아래아 ’.’자로 쓰여 있으며,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띄어쓰기로 고쳤다.
파격적인 우편요금 감액 제도
이 공문의 말미 “우체요금은 국내우체규측에 증한 바를 의하여 출부하시압'이라는 대목은 기안문의 초고문은 “우체요난 독립신문과 갓치 무애 체송케 하겠삽나니다'로 되었던 것을 결재 과정에서 수정한 흔적이 있다.
국내우체규칙이 정한 우편요금과 독립신문에 특혜 한 요금과는 다음과 같이 큰 차이가 있는데, 인가 당시에는 요금 감액의 특혜를 주지 않았다.
* 국내우체규칙(제3조) 1號 1個 1兩 6錢重(60g)까지 5分(푼)
* 독립신문 특혜 요금 1張(4면 1일분) 1分(푼)
당시에는 1분(문) 액면의 우표가 없었고, 독립신문에 대하여는 곤보(官報) 우송에 적용되던 요금약수 (料金約) 제도가 적용되었다. 그리스도신문에 대하여도 1898년 5월 21일, 독립신문에 준한 우편요금 감액 특혜를 부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