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간만에 고전을 꺼내 들었다. 아주 깊숙이, 사람의 손길이 닿은 적 없는 책장 모퉁이에 유배된 채 먼지만 마시고 있던 책 중 하나다. 그 책을 꺼내 든 것은 단지 무료해서도 독서욕이 타올라서도 아니다. 읽기 좋은 시기였기 때문이다.
책은 의무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갖게 된 후부터 억지로 독서를 하지는 않는다. 다만 때마다 꽂히는 책을 구비해두는데, 몇 장 펼쳐보고 끌리지 않는 건 가차 없이 구석에 유배해둔다. 한 달이든, 일 년이든 얼마큼의 나이를 먹으면 그 책을 꺼내 들 때가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책은 십 년쯤 묵혔다가 읽기도 한다. 그렇게 읽은 책은 과연 소화가 잘 되기 마련이다.
그 시기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나이와 환경 등 모든 조건이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보고 살았는지, 무엇을 듣고 살았는지, 양심이나 죄책감 따위의 감정에 얼마큼 솔직해졌는지에 따라 묵힌 책을 펼쳐 들 시기가 다르기 마련이다.
많은 감정들 중에 양심이나 죄책감을 언급한 이유는 간단하다. 비슷한 선상에 있는 두 가지 단어는 내면을 깊게 패는 동시에 마음을 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단지 배가 고파서 허한 것이 아니라 기가 빠진 느낌. 밥이 아니라 홍삼 같은 건강보조식품을 찾을 때의, 기의 허기를 말한다. 책을 읽지 않는다고 죽지는 않겠지만, 책을 읽으면 반드시 내면의 기가 충전된다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때문에 책은 기의 면역을 높여주는 정신 건강보조제인 셈이다.
그런 맥락에서 독서는 사실 어른에게 더욱 필요한 보조제인데 유년기에 강요당하고 있다. 보고 듣는 사소한 모든 것들을 기로 흡수하는 유년기보다 대부분의 기를 탕진하며 살고 있는 성인기에 더욱 필수인 것이 독서다. 보양식이나 건강보조제를 찾기 전에 책을 들어 볼 것을 권한다.
할부로 문학 전집을 사다 놓고 전시만 해놓는다고 구박할 필요는 없다. 읽겠다고 사 놓은 것만으로 이미 반독서는 했다고 본다. 십 년을 묵히고 삼십 년을 묵히다 보면 읽어야겠다는 시기가 온다. 아직 오지 않았다면 영혼의 허기가 덜한 상태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나이가 들수록 빈자리와 빈 시각은 늘어날 테고, 그로 인해 헛헛해진 마음은 묵힌 책을 들여다볼 여유를 줄 것이다. 그때가 그 책을 읽고 소화할 수 있는 적절한 시기다. 나는 이제 와서야 고전 문학을 꺼내 들었다. 두꺼운 표지마저 마음에 드는 걸 보니 지금이 딱 좋은 때인가 보다.
출판된 새것 그대로 비좁은 책꽂이에서 강제 다이어트 중이던 책의 표지를 넘긴다. 쩌-억. 관절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린다. 몇 년 만에 기지개라도 켜는 모양이다. 참 오래도 기다리게 했다는 듯 저자가 나를 노려본다.
“예, 예. 미안합니다. 이제 때가 된 걸 어찌합니까. 대신 재미 없으면 두고 봅시다!”
나의 넉살에 저자가 싱겁다는 듯 빙그레 웃는다. 묵힌 독서에 빠지기 좋은 계절, 바야흐로 가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