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가 무섭게 휘몰아치는 깊어 가는 겨울밤. 온돌방 한 가운데에 화로를 놓고 그 둘레에 온 가족들이 모여 앉아 오순도순 정담을 나누던 때의 일들이 떠오른다. 시골 마을에서 자란 나는 그 포근했던 화롯가의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화롯가에 부젓가락이나 불 주걱으로 솔잎이나 짚을 태운 고운 재로 속에 든 불씨를 잘 덮어 매끈하게 다독거리며 옛 이야기며 정담을 나눴다.
무엇보다도 끝없는 그리움을 느끼게 하는 것은 할머니와 어머니 방에 놓여 있는 널찍하고 거무튀튀한 질화로다. 그 질그릇 화로에는 항상 예쁜 인두가 꽂혀 있어 바느질 할 때 수시로 쓴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잠시라도 화롯가를 떠나지 않았다. 가족들의 옷을 만들고 바느질, 인두질을 하며 밤새도록 이런 저런 이야기를 정답게 한다. 밤공부를 하고 조금 시장기가 돌 무렵에는 질화로 속에 꼭 묻어 익힌 밤이나 고구마를 먹는다. 어느 사이에 구워졌는지 노릿 노릿한 것이 여간 맛이 있는 것이 아니다. 별로 볼품없는 질화로지만, 그 둘레를 감싸고 살아왔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정성은 실로 대단하였다.
건너편 사랑방에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계실 때에는 화롯가 담뱃대 터는 소리로 방안의 분위기를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방에 있다는 것을 안방 가족들에게알리는 신호로서 ‘에헴’하고 두서너 번 담뱃대로 화로를 두드린다. 속이 상하거나 화가 났을 때는 담뱃대 터는 소리가 요란하고 길다.
즉 담뱃대로 화로 둘레를 치는 소리는 집안 식구들을 안심시키기도 하고, 불안 속으로 넣는 하나의 신호이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방에 어른들이 없을 때에는 화롯가에서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졌다. 아이들이 부젓가락이나 부삽을 가지고 화롯불을 뒤적이며 장난을 치다가 화로를 뒤엎어 소동이 벌어진다.
또 잠결에 화로를 차서 화재를 일으키는 등 웃지못할 사건이 심심찮게 발생했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따끈따끈한 온돌방과 따듯한 화로의 정서를 잊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아궁이에 불을 때는 집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고 화로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졌다.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뜨겁게 할 수 있는 보일러와 금방 뜨거워지는 갖가지 난로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의 젊은이와 어린이들은 화로에 대한 애착과 향수 같은 정감이 없을 것이다. 은근히 항상 따스함을
지닌 화로와 그 주위에서 벌어지는 재미있는 일들이 무척 그립고 아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