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포항’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포항제철과 호미곶 일출, 구룡포, 과메기 정도가 아닐까. 여행객들이 포항을 찾는 시기도 대부분 새해 무렵이나 찬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이다. 하지만 포항은 만추를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부담없이 가을 산행을 즐기기 좋은 계곡도 있고 산책하기 좋은 정원도 있다. 이국적인 풍광 속에서 색다른 체험을 즐길 수 있는 곳도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몰랐던 포항의 가을
포항 가을 여행의 첫 목적지는 내연산 계곡이다. 가을 풍경을 만끽하며 트레킹을 즐기기에 좋다. 내연산은 포항시 북구 청하·송라·죽장면과 영덕군 남정면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내연산 계곡의 입구 격인 보경사에서 경상북도수목원까지 총 12.8km의 계곡구간 숲길이 나 있으며 데크로드와 안전펜스 등이 잘 설치되어 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
내연산 계곡은 폭포 전시장이라고도 불린다. 4km쯤 되는 골짜기 곳곳에 폭포가 즐비하다. 그 중 제1폭포인 쌍생폭포부터 12폭포인 시명폭포까지 어디 내놓아도 손색없는 폭포가 12개나 된다. 은폭, 연산폭, 관음폭, 무풍폭, 상생폭 등의 이름이 붙어 있다. 내연산 계곡의 좋은 점은 굳이 모든 코스를 다 걷지 않아도 된다는 것. 특히 제7폭포인 연산폭포까지는 편안한 트레킹 코스가 약 2.7km 정도 이어지는데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을 만큼 평탄한 길이라 부담없이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아이와 함께 걸어도 왕복 2시간이면 넉넉하다.
내연산 계곡의 하이라이트는 연산폭포다. 연산폭포 가기 전 구름다리가 아찔하게 걸려 있고 그 아래로 관음폭포가 흘러내린다. 구름다리 뒤의 암벽은 학이 깃든다는 학소대. 출렁이는 구름다리를 건너면 굉음과 함께 쏟아지는 연산폭포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내연산의 빼어난 경치는 진경산수화의 대가로 불리는 겸재 정선이 이곳 현감으로 재직할 때 ‘내연삼용추’라는 연작 작품으로 그리기도 했다.
호수가 보이는 정원에서의 한때
포항을 가을 운치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곳이 또 있다. 영일대 호텔이다. 포항제철소를 지을 당시 외국의 귀빈들을 위한 영빈관을 호텔로 개방한 곳이라 아직 일반에게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박태준 전 포스코 명예회장은 아예 이곳에서 살면서 제철소 건설을 지휘했다.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제철소 부지를 둘러본 후 “이거 남의 집 다 헐어 놓고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 건가”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박태준 전 명예회장은 “목숨을 걸고 실패하면 우리 모두 사무실에서 나와 우향우 한 다음 동해바다에 빠져 죽자”고 했다고 한다. 아직도 사람들은 이를 두고 ‘우향우 정신’이라며 회자하곤 한다.
호텔은 작지만 운치 있다. 도도한 기품이 어려있는 것도 같다. 메타세콰이어와 전나무, 소나무 등이 울창한 호텔 뒷편의 정원은 유럽의 잘 가꿔진 정원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한때 호텔 투숙객에게만 개방되던 정원은 최근 들어 일반에게 개방되면서 포항의 숨겨진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자그마한 텐트를 치고 도시락을 나눠 먹는 가족도 있고 나란히 누워 음악을 듣는 연인의 모습도 다정하다. 정원 앞에 자리한 호수인 영일지는 가을 햇빛으로 반짝이고 고니 한 쌍도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며 유유자적 노닌다. 호텔로 변신한 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해 김수환 추기경, 나카소네 일본 수상 등이 묵기도 했는데, 이 정원을 보고 나면 굳이 왜 이곳을 숙소로 선택했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호숫길과 건너편 숲길을 한 바퀴 도는 둘레길도 정비됐다. 느릿느릿 걸어도 30분이면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다. 울창한 대나무숲이 상념으로 가득 찬 머릿속을 깨끗하게 씻어준다.
맛있는 포항, 죽도시장
자, 이제 배가 출출해질 때다. 죽도시장으로 가보자. 포항 여행에서는 빠뜨릴 수 없는 명소다. 동해안 최대의 상설시장이자 경북과 강원도 일대의 농수산물이 집결하고 유통되는 요충지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조그마한 시장이었지만 1970년대 초 포항제철이 들어서면서 대형 상설시장으로 규모가 커졌다. 지금은 2,000여 점포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어시장 구역 외에도 농산물거리와 먹자골목, 떡집골목, 이불골목, 한복골목 등이 만들어져 있다.
시장에는 평일, 주말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몰려든다. 김, 파래, 매생이부터 상어, 고래고기까지 동서남해안에서 나는 거의 모든 수산물이 거래된다. 생선을 실은 손수레와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로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 억세지만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를 들으며 시장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는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것이 아니다.죽도시장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해산물은 문어다. 경상도에서는 문어를 귀하게 여긴다. 제사를 지낼 때 문어를 올리지 않으면 안 될 정도다. 개복치라는 생선도 볼거리다. 크기가 2m나 되는 물고기다. 물회로도 먹고 수육으로도 먹는데, 포항에서는 주로 등 부분의 흰색 창자를 삶아 초장에 찍어 먹는다. 운이 좋으면 시장 입구에서 개복치를 해체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시장구경에서 음식이 빠질 수 없는 법. 죽도시장의 가장 유명한 먹을 거리는 물회다. 시장 한 켠에 물회 골목이 만들어져 있다. 물회는 고기를 잡느라 바쁜 어부들이 한 끼 식사를 빨리 해결할 요량으로 먹던 음식. 방금 잡은 물고기를 회 쳐서 고추장 양념과 물을 넣고 훌훌 들이마셨던 데서 유래됐다. 처음에는 어부들 사이에서 유행했다가 차차 주민들에게 알려지면서 ‘포항물회’라는 지방특유의 음식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영일대 해수욕장 끝자락에 자리한 경주회식당은 자연산 도다리 물회로 유명세를 타는 곳이다. 도다리쑥국 때문에 도다리를 봄 생선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은데 회로는 오히려 가을이 낫다. 찰지면서도 고소한 맛이 봄 도다리와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 이 집은 특별 제조한 묵은 장을 내는데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장맛이 도다리의 쫄깃한 살과 기가 막히게 조화를 이룬다. 시원하면서도 칼칼한 도다리물회도 추천. 죽도시장 입구에 자리한 운하회대게식당은 가자미, 광어, 우럭, 도다리, 노래미 등 제철에 나는 흰 살 생선을 주로 사용해 물회를 만든다. 양념 역시 배, 마늘, 미나리, 양파, 오이, 당근, 쪽파, 고추장, 참기름, 김 등 12가지나 들어가니 맛이 없을 래야 없을 수가 없다. 갖가지 해산물 반찬에다 매운탕까지 곁들이는 것도 특징이다. 찬바람이 슬슬 불기 시작하는 이맘 때면 과메기가 나오기 시작한다. 과메기는 갓잡은 꽁치를 바닷물로 씻어낸 후 내장을 제거하고 해풍에 꼬들꼬들 말린 것. 본래 청어로 만들었으나 청어 조업이 부진해지자 꽁치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과메기는 김이나 월동 배추 속 위에 과메기, 생미역, 실파, 마늘, 풋고추 등을 얹어 쌈장과 초고추장을 곁들여 먹는다. 경북 포항시 구룡포읍 바닷가 주변을 돌다 보면 과메기 덕장의 풍광을 접할 수 있고, 주변 횟집에서 과메기 맛을 볼 수 있다.
가을 정취 가득한 바다풍경
죽도시장 앞으로는 포항운하가 흐른다. 1970년대 초 포항제철 준공으로 물길이 막혔던 동빈내항 일대에 오염물이 쌓이면서 죽도시장까지 악취가 진동했는데, 이를 과거의 모습으로 복원하면서 길이 1.3km, 폭 17~20m의 물길을 낸 것이다.포항운하 홍보관에서 출발하는 포항운하 크루즈를 타면 포항운하와 동해바다를 유람할 수 있다. 송도동과 해도동, 죽도동을 차례로 지나면 물길을 따라 산책로와 조각품들이 서 있는 공원이 따라온다. 이렇게 십여 분을 가면 물길이 넓어지며 동빈내항으로 들어선다. 영일만 깊숙이 들어와 있던 동빈내항은 예부터 작은 어선이 정박하기 좋았던 천혜의 항구이자 한때 포항의 경제를 쥐락펴락했던 동해안의 대표적인 항구였다. 지금이야 그 기능이 구룡포항으로 옮겨갔지만, 아직도 수많은 배들이 정박해 있다. 동빈 큰 다리를 지나면 커다란 포항함이 보인다. 2010년 서해에서 피격 침몰한 천안함의 원형모델로 1984년 취역해 250여회의 출동임무를 수행했고, 1986년에는 북한 무장선박을 침몰시키는 전공을 세우기도 한 군함이다. 25년 만인 2009년 퇴역해 동빈내항에서 영원한 휴식 중이지만 그 위용은 대단하다. 영일대해수욕장은 가을 바다의 정경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원래 이름은 북부 해수욕장이었지만 해상누각인 영일대가 새로 세워지면서 영일대해수욕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해수욕장 뒷편으로 카페와 레스토랑, 횟집 등 유흥시설이 밀집해 있어 젊은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곳이기도 하다.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맞기에도 좋은 곳이다.
여행정보
영동고속도로와 중부내륙고속도로, 익산포항고속도로를 이용해 서포항 IC로 나온다. 운하회대게식당(054-246-5656)은 죽도시장에 있다. 구룡포 지역의 토속 음식인 모리국수는 큼지막한 솥에 그때그때 잡힌 생선과 채소, 고춧가루, 칼국수 등을 듬뿍 넣고 걸쭉하게 끓여낸다. 예부터 어부들이 뱃일을 마치고 먹던 음식으로 매콤한 맛이 이마에 땀을 송송 맺히게 한다. ‘많다’라는 의미의 일본어 ‘ 모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까꾸네 모리국수(054-276-2298)가 유명하다. 구룡포초등학교 앞의 분식집인 철규분식(054-276-3215)은 찐빵으로 유명한 곳이다. SBS ‘생활의 달인’에서 찐빵 최강 달인으로 소개될 만큼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구룡포 할매국수(054-284-2213)는 구룡포 시장 안에 있다. 영일대호텔(054-221-9452, www.yeongildae.co.kr)은 예약이 필수. 갤럭시관광호텔(054-251-9988), 네이처풀빌라(010-6700-1200) 등이 시설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