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춘 듯 서 있는 간이역
중앙선은 서울 용산에서 출발한다. 용산역부터 팔당역까지는 1시간 정도가 걸린다. 도심역을 지나니 차창 밖으로 시야가 탁 트인다. 양수리 가는 강변도로 너머로 한강이 보인다. 팔당역에서 내려 가볼 첫 여행지는 능내역이라는 예쁜 간이역이다. 팔당역에서 운길산역까지, 옛 경춘선 구간은 이제 폐철로가 됐다. 기차는 더 이상 다니지 않는다. 기차가 다니던 철로는 자전거길로 다시 태어났다. 주말이면 헬멧을 쓰고 자전거를 탄 이들이 기차 대신 달린다. 산책을 즐길 수도 있다. 길은 산모퉁이를 따라 슬그머니 휘어지기도 하고 쭉 뻗어 나가다 소실점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북한강을 바라보며 걷는 길이라서 조망도 좋다.
팔당역에서 철로를 따라 걷다 보면 걸음은 어느새 능내역에 닿는다. 팔당역에서 자전거를 빌려 자전거 길을 따라 라이딩을 즐길 수도 있다. 능내역은 예쁜 초록색 건물이다. 시간이 멈춘 듯 옛 모습 그대로 서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능내역은 먼지만 쌓여가던 폐역이었다. 자칫 사라질 뻔했던 능내역이 다시 붐비기 시작한 것은 남한강 자전거길이 생기고 나서부터다. 역사 앞에는 기차카페가 들어섰고 간이음식점과 자전거 대여점도 생겼다. 능내역사 안에는 고향사진관이라는 사진관도 문을 열었다. 능내역으로 추억 여행을 떠나온 이들이 교복과 교련복을 입고 사진을 찍기도 한다. 능내역 문을 열고 들어서면 따스한 난로가 방문객을 위해 온기를 내어준다.
시간이 멈춘 듯 옛 모습 그대로
서 있었던 능내역.
새롭게 남한강 자전거길이
생기고 다시금
사람들이 찾아들며
활기를 되찾았다.
다산의 실학을 만나다
능내역 앞은 마현마을이다. 실학의 대가였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고향이다. 다산은 조선을 대표하는 실학자로 신유사화에 연루돼 전남 강진 다산초당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목민심서>를 비롯해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을 썼다. 다산은 1762년 한강의 두물머리(양수리)가 환히 바라보이는 마현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의 행정 구역은 광주군 초부방 마현리. 지금은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다. 다산은 75년의 일생 중 10여 년의 벼슬살이, 18년의 귀양살이를 제외하고는 50년 가까운 세월을 이곳에 머물렀다. 마을 앞에 펼쳐진 강변 풍광을 읊은 ‘환소천거’라는 그의 시가 있다.
‘서둘러서 고향 마을 도착해보니 / 문 앞에는 봄 강물이 흐르는구나. / 기쁜 듯 약초밭둑에 서고 보니 / 예전처럼 고깃배가 보이는구나. / 꽃이 만발한 숲 사이 초당은 고요하고 / 소나무 가지 드리운 들길이 그윽하네. / 남쪽 천리밖에서 노닐었지만 / 어디 간들 이 좋은 언덕 얻을 거냐.’
다산 유적지에는 그의 생가를 복원한 여유당과 기념관, 실학박물관 등이 있다. 다산기념관에는 관리들이 백성들을 다스리는 도리를 설명하는 다산의 사상이 담긴 저서와 다산이 직접 그린 서화 등이 전시되어 있다. 다산의 생가인 여유당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떠내려간 것을 1975년에 복원한 것. 여유당(與猶堂)은 1800년 다산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서 살 때 지은 당호다. ‘여유당’이란 이름엔 ‘살얼음 건너듯이 조심하고 경계하며 살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다산 묘소에 참배하고 내려와 밤나무 숲을 지나 한적한 호숫가로 나간다. 호수는 겨울바람에 몸을 뒤척인다. 이 호숫가는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위대한 학문적 성과를 이뤄낸 다산을 만나러 온 이들에게 자연이 덤으로 선사하는 선물이다.
두물머리, 겨울 강변의 그윽한 정취
다음 코스는 두물머리다. 중앙선 양수역에 내리면 가깝다. 두물머리 가기 전 먼저 찾을 곳은 세미원. 물과 꽃의 정원이다. 경기도가 27억원을 들여 조성했다. 면적 18만㎡ 규모의 정원 안에 연꽃으로 뒤덮인 6개의 커다란 연못과 산책로, 창덕궁 장독대를 모방한 분수대, 유상곡수(流觴曲水) 등 풍성한 볼거리가 들어앉아 있다. 세미원이라는 이름은 <장자>에 나오는 ‘관수세심 관화미심(觀水洗心 觀花美心 물을 보면 마음을 씻고, 꽃을 보면 마음을 아름답게 한다)’에서 따왔다. 세미원의 정문은 불이문(不二門)이다. 태극무늬가 그려져 있다. 불이문은 <유마경>의 ‘불이법문(진리는 하나다)’에서 따온 말로, ‘자연과 인간은 하나’란 뜻을 담고 있다. 작은 개천이 있고 돌다리가 운치 있게 놓여 있다. 졸졸졸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귀를 씻어준다. 시냇물을 건너면 한반도 모양의 공원이 있다. 고산식물과 무궁화가 심어져 있다. 그리고 수많은 항아리로 장식된 분수가 눈길을 끈다. 새벽마다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가족을 위해 비는 어머니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크고 작은 항아리 365개를 이용했다. 항아리분수를 지나면 커다란 연못이 펼쳐진다. 여름이면 이 연못은 백련, 홍련, 가시연, 수련 등 100여 종의 연꽃으로 뒤덮인다. 400종의 수생식물도 자란다. 연못을 돌아보며 산책을 즐길 수 있는데 천천히 걸으며 돌아봐도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이곳의 길은 돌 빨래판으로 되어 있어 걷는 느낌도 색다르다. 끝자락엔 ‘모네의 정원’도 들어서 있다. 프랑스의 화가 모네가 그린 수련 정원을 옮겨놓은 것이다. 연못 곳곳에는 청계천 수위를 재던 수표, 조선시대 청화백자용문항아리 등 선인들의 지혜를 더듬어 볼 수 있는 다양한 조형물이 세워져 있어 산책의 재미를 더해준다.
세미원을 나와 체육공원 앞을 지나 다리를 건너면 왼쪽 물길을 따라 산책로가 나온다. 20분쯤 걸으면 두물머리다. 금강산에서 발원한 북한강이 남한강과 만나는 곳. 양평여행에서 찾지 않을 수 없는 대표적인 명소다. 400년간 두 물줄기가 만나는 모습을 지켜본 거대한 느티나무가 두물머리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원래 이곳은 나루터가 있던 자리지만,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1999년 복원해 두물머리 앞에 띄워놓은 황포돗배만이 이곳이 나루터 자리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하나로 만나는
두물머리로 향한다.
호젓한 겨울강 풍경에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청량하고 상쾌한 겨울 산책
마지막 여행지는 용문산 용문사. 양평 용문산은 아름다운 봉우리와 계곡으로 ‘경기의 금강산’으로 불리는 곳. 계곡 깊숙이 용문사라는 천년고찰이 들어앉아 있다.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 2년(913)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일설에는 경순왕(재위 927~935)이 친히 행차하여 창사하였다고 한다. 용문역에서 셔틀버스를 이용하거나, 일반버스를 이용해서 쉽게 갈 수 있다. 용문사 일주문을 지나 동네 뒷산 오르듯 나지막하고 편안한 산길을 따라 1km 정도 가면 용문사다. 가는 길에는 키 큰 소나무들이 모여 만든 울창한 숲이 내내 기분 좋은 산책을 할 수 있게 해준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용문사보다 은행나무가 먼저 시야를 압도한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높이 42m, 둘레 11m가 넘는다. 유실수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나무로 알려져 있다.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맏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나라 잃은 설움을 가슴에 안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던 길에 심었다는 전설이 있는가 하면, 신라 고승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은 것이 뿌리를 내려 이처럼 자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선 세종 때는 정3품 이상 벼슬인 당상 직첩을 하사받아 벼슬을 한 나무이기도 하다. 고종이 승하했을 때 큰 가지가 부러지는 등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미리 알려주는 영험함을 가지고 있다고도 한다.
여행정보
★ 가는 길 용산역에서 출발하는 중앙선 전철을 이용하면 된다. 능내역은 팔당역을 이용한다. 팔당역에서 남한강 자전거길이 시작된다. 중앙선 복선화로 쓸모없어진 폐철도 구간과 폐철교, 간이역사 등을 자전거길로 활용한 것이다. 자전거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팔당댐, 봉안터널, 간이역사, 다산유적지 등을 만난다. 두물머리와 세미원은 양수역에서 내려서 걸어가면 된다. 용문사는 용문역에서 내려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용문사 홈페이지(www.yongmunsa.org)에 들어가서 정보를 더 얻을 수 있다.
★ 묵을 곳 중미산자연휴양림(031-771-7166)은 옥천면 신복리에 있다. 총 56개의 캠핑 데크가 있는데 숲에 둘러싸인 느낌이 일품이다. ‘생각속의집’ (031-773-2210, www.mindhome.co.kr)은 현대 미술관이나 예술 작품을 대하는 것 같은 분위기의 펜션이다. 건축가 민규암 씨가 지었다. 노천탕을 갖춘 객실도 있다.
★ 먹을 곳 옥천냉면(031-773-3575)이 유명하다. 메밀에 감자가루를 적당히 배합해 만든 면발이 튕길 듯 탱탱하다. 양지와 설낏(엉덩잇살)으로 우려낸 육수를 살짝 얼려 내놓는데 그 맛이 시원하고 담백하다. 편육과 돼지고기를 양파와 함께 다져 뭉친 고기완자도 맛있다. 적당한 기름기가 돌아 부드럽고 촉촉하다. 팔당역 인근 팔당밀빛초계국수(031-576-0330)의 초계국수도 맛있다. 닭 육수를 차게 식혀 먹는 음식으로 북한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향토음식 중 하나이다.
★ 둘러볼 곳 아이들과 함께라면 남양주 종합촬영소(031-579-0605, http://studio.kofic.or.kr)에 가보자. 영화 ‘공동경비구역JSA’, ‘취화선’ 등의 배경을 실제로 확인할 수 있으며 영상체험교육센터와 영상지원관, 야외촬영장 등 볼거리가 풍성하다. 운이 좋으면 영화 촬영 현장도 직접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