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역에 내리니 어느덧 오후다. 남쪽 지리산 자락에 자리한 이 도시는 이미 봄의 한가운데에 들어선 것 같다. 역 앞 화단엔 동백이 굵은 꽃망울을 틔웠다. 두터운 외투가 오히려 거추장 스럽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한결 가벼워졌다. 자, 어디로 가볼까, 잠깐 망설이다가 진양호로 가기로 한다. 봄 햇살에 물비늘이 반짝이는 호수를 보고 싶다. 그러면 정말로 봄이 왔음을 실감할 수 있을 것 같다. 진주역에서 진양호로 가는 버스에 훌쩍 오른다.
진양호에 벌써
봄 햇살이
내려앉았다.
살포시 다가가
가장 먼저 이 봄을
만지고 싶다.
봄, 봄, 한 폭의 수묵화 속으로
진양호는 겹겹의 산이 둘러싼 넓은 호수다. 호수면적 29.4km2 유역면적 2,285km2, 저수량은 3억9,200만 톤에 이른다. 1969년 댐 길이 1,126m의 남강댐을 세워 만들었다. 진주시 내동면과 대평면, 사천시 곤명면, 산청군 단성면 일부가 수몰되면서 육지 속의 바다처럼 넓은 호수가 만들어졌다. 길이 40km 정도 되는 호반도로를 따라 호수를 한바퀴 돌려면 2시간은 꼬박 잡아야 한다. 호반로의 초입인 진양호공원이다. 아름드리 편백나무가 봄 향기를 물씬 풍기며 서 있다. 호수는 기름진 봄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난다. 양떼구름이 맑은 호수에 얼비치고 호반도로를 따라 봄꽃이 흔들린다. 진양호에 내려앉은 봄이 곱고 화사하기만 하다.
진양호의 물은 맑다. 1급수다. 진주를 비롯해 남해와 하동, 거제 등 서부경남 지역 주민들이 진양호에서 흘러나온 물을 식수원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찻집 등 위락시설이 들어설 수 없고 낚시도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철새도래지로도 유명하다. 큰고니와 청둥오리, 쇠백로, 황조롱이 등 각종 새들이 둥지를 틀고 있다. 진입로가 없어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경호강 줄기의 동쪽 수변은 우리나라 최대의 수달 서식지로 밝혀질 만큼 청정지역이다. 진양호가 가장 아름다운 곳은 상류의 대평교에서 하류의 진수대교를 잇는 약 14km 구간. 섬으로 변한 산봉우리와 크고 작은 수초섬들이 어울려 한 폭의 수묵화처럼 아름답다. 하촌리의 물안개휴게소 인근은 새벽 물안개가 예쁜 곳. 수면에 비친 고사목과 백로 등이 어울려 신비로운 풍경을 빚어낸다. 진양호를 한눈에 굽어보려면 남강댐 물홍보관이나 진양호공원의 전망대를 찾아야 한다. 남강댐 정상부에 가면 드넓은 호수를 바라보며 산책을 즐길 수 있다. 댐 아래 모여 있던 수십 마리의 왜가리들이 댐 주변의 물고기를 낚아채는 모습이 흥미롭다. 멀리 지리산 천왕봉도 아스라이 바라보인다. 아시아레이크사이드호텔의 테라스에서 차 한 잔과 함께 바라보는 진양호의 풍경도 여유롭다. 진양호공원에는 동물원, 산책로, 365계단, 선착장 등 다양한 놀이시설이 갖춰져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이나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인기다.
저물 무렵 진양호에 드리운 노을과 만났다. 진주 출신의 가수 고 남인수 씨를 기념한 남인수 광장 부근, 스피커에서 그의 노래 ‘애수의 소야곡’이 흘러나온다. 1962년에 44세의 나이로 요절한 진주 출신 가수인 고 남인수씨를 기리는 노래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곳에선 ‘애수의 소야곡’을 비롯해 ‘무너진 사랑탑’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 그의 대표곡들이 온종일 흐른다. 광장 아래로 난 소로를 따라 호숫가로 내려섰다. 무성한 수초들 위에 동그랗게 해가 걸렸다. 붉게 물들어가는 수면. 후드득 왜가리가 날고 한 무리의 조정 선수들이 길다란 배를 타고 스윽 지나갔다. 배가 지나간 자리에는 쇄기 모양의 물결이 인다. 진양호의 서정적인 저녁풍경이다.
촉석루에 가면
논개의 순절을
어렴풋이나마
마주할 수 있다.
촉석루는 고려
공민왕 때
세워져 중건과
보수를 여러 차례
이겨내고
고고한 자태를
여전히 뽐내고 있다.
아름다운 경관이
더없이 좋다.
전란의 아픔을 담고 유유히 흐르는 강
진양호에서 내려와 남강 줄기를 따라 시내로 들어서면 진주성이다. 남강 절벽을 따라 우람한 성곽을 쌓았다. 진주성은 행주대첩, 한산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히는 진주성대첩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전투는 치열했다. 왜군은 부산, 동래, 김해지역에 포진하고 있던 정예병 3만여 명을 동원해 1592년 10월 5일 진주성을 공격했다. 진주성에는 김시민 목사의 본성군사 3,700명과 곤양군수 이광악의 100명 등 고작 3,800명의 군사가 있었다. 10대1의 싸움. 진주성민들은 죽기를 결심하고 싸웠고 그 결과 3만의 왜병 중 2만여 명을 죽거나 다치게 하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전투는 10일까지 6일간 계속됐다.
진주성 풍경의 절정은 촉석루다. 평양 부벽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국내 ‘3대 명루’로 꼽히는 대형 누각이다. 촉석루(矗石樓)라는 이름은 강가에 뾰족 솟은 바위 위에 만들어진 누각이란 뜻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이 거대한 누각은 1365년 고려 공민왕 때 처음 세워져 여러 차례 중건과 보수를 거쳤다. 임진왜란 때 소실돼 1618년 다시 세워졌지만 안타깝게도 6·25전쟁 중 또다시 불탔다. 지금 누각은 1960년에 재건된 것이다. ‘북에 평양 부벽루(浮碧樓)가 있다면 남에는 진주 촉석루가 있다’는 옛말이 있을 정도로 뛰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굽이쳐 흐르는 남강 물줄기의 좌우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 누각을 찾아와 숱한 묵객들이 읊고 또 읊었다. 시깨나 읊는 풍류객들이 이토록 진주 땅에 몰려든 건 경치도 경치거니와 그 유명한 진주 기생 때문이기도 했겠다. 북에 평양 기생이 있고 남에 진주 기생이 있었다. 미색을 갖추고 학문·예술에도 조예 깊은 이들이었다. 평화로울 때에는 과거 시험장으로 쓰였지만 전쟁 중에는 지휘대로 변했다. 임진왜란 때도 총지휘대와 성 남쪽 지휘대로 사용됐다. 촉석루의 다른 이름이 남장대(南將臺)인 것은 이런 연유다.
촉석루하면 순절(殉節)의 여인 논개(論介)가 떠오른다. 임진왜란이 소강 국면이던 159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시 진주성을 공격했다. 협상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서였다. 관군과 의병 등 7만 명이 희생되는 치열한 전투 끝에 왜병은 성을 다시 함락했고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에서 한바탕 잔치를 벌였다. 이때 논개는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를 촉석루 아래의 바위로 유인해 강으로 함께 몸을 던졌다. 그때 논개는 당시 열 손가락에 모두 가락지를 끼고 있었다고 한다. 강물로 뛰어들 때 왜장을 끌어안은 손이 미끄러져 풀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논개가 몸을 던진 바위에는 아직도 ‘의암(義巖)’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꽃이 활짝 피는 봄이면 사람들은
시장으로 와 집안 단장에
필요한 것들을
사갈 것이다.
입맛 살아나는 비빔밥도
맛볼 것이다.
봄 참 좋다.
볼 것 많고 먹을 것 많은 진주 여행
진주성 서문을 나서면 인사동 골동품 거리다. 20여 년 전 흩어져 있던 골동품 가게들이 하나둘씩 모여 생긴 거리다. 상점이 대형화하고 거리가 정비되며 예스러운 맛은 사라졌지만 지금도 20여 집이 남아 길가에 돌절구 맷돌 불상 등 갖가지 석물들을 늘어 놓고 있다. 진주시와 남강을 한눈에 보고 싶다면 망진산(172.4m) 봉수대로 가면 된다. 이곳에서 진주 시내를 옆에 끼고 흐르는 남강을 촬영할 수 있다. 진주 시가지를 가로지르며 유유히 흘러가는 남강의 푸른 물결에 눈이 시리다. 진주 중앙시장은 서부경남 최대의 상설시장이다. “중 상투 빼곤 다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크다. “서부경남에서 자식 시집·장가 보낼라카모 여기 안 오곤 몬한다”고 주장하는 시장이다. 아침이면 길마다 발 디딜 틈 없이 온갖 좌판이 깔린다.
진주 음식도 독특하다. 진주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은 비빔밥이다. 전주비빔밥, 해주비빔밥과 함께 3대 비빔밥으로 통한다. 진주비빔밥은 전주비빔밥에 비해 소박하다. 고사리, 도라지, 버섯, 미나리, 애호박 등을 사용하고 육회와 고추장을 얹는 것은 비슷하다. 하지만 대부분 전주비빔밥들은 볶은 나물을 사용하는 데 비해 진주비빔밥은 삶은 나물 혹은 데친 나물을 물기를 뺀 다음 무쳐서 내놓는다. 또 하나 큰 특색은 비빔밥에 곁들이는 국에 있다. 전주가 콩나물국을 주로 사용하는 데 반해 진주비빔밥은 소고기 선짓국이 나온다. 예부터 소를 많이 키웠기 때문이다. 진주냉면 역시 오직 진주에서만 만날 수 있는 음식이다. 쇠뼈에 멸치, 새우, 황태, 홍합, 바지락 등 온갖 해산물을 넣어 국물을 우려낸다. 진하면서도 풍부한 맛은 지금까지 먹던 냉면과는 전혀 다른 맛이다. 냉면 한 그릇으로 부족하다면 달걀옷 노랗게 입힌 육전을 곁들여도 괜찮다.
여행정보
★ 가는 길 진주역을 이용한다. 무궁화, 새마을호 기차가 다닌다. 진주시 문화관광과(055-749-2055).
★ 묵을 곳 진주 시내 남강 둔치를 따라 동방호텔(055-743-0131), 평화호텔(055-743-3301) 등 숙박시설이 몰려 있다. 진양호에 위치한 아시아레이크사이드호텔(055-746-373)은 진양호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 전망대도 만들어져 있다.
★ 먹을 곳 진주비빔밥으로 유명한 곳은 천황식당(055-741-2646). 3대째 맛을 이어오고 있다. 온전하게 보존된 일본식 목조건물에 낡은 인테리어가 정감을 더한다. 모든 나물을 정석대로 데치고 삶아서 무쳐 밥 위에 얹는다. 시장통의 제일식당(055-741-5591)은 천황식당과 더불어 앞뒤를 다투는 곳이다. 하연옥(055-746-0525)은 진주비빔밥과 냉면을 함께 맛볼 수 있는 곳. 비빔밥은 천황식당과 제일식당보다는 화려하다. 육전도 맛있다. 서부시장 안의 진주냉면집(055-741-0525)은 60여 년째 진주식 냉면을 파는 식당이다. 진한 해물육수와 듬뿍 올려주는 쇠고기전 고명이 매력이다. 진주는 조선시대 교방문화가 꽃피웠던 지역으로 음식문화도 잘 발달했다. 천수교 부근의 아리랑한정식(055-748-4556)은 교방 교자상을 차려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