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사람들은 금강을 백마강이라고 부른다. 백마강은 부여 서쪽을 반달 모양으로 휘감아 흐르는데 부여군 규암면 호암리의 천정대에서 시작해 낙화암, 구드래나루를 거쳐 세도면 반조원리까지 약 16km를 달린다. <삼국사기>에는 백강, <일본서기>에는 백촌강으로 기록되어 있다. 백마(白馬)는 ‘큰 나라’라는 뜻으로 백마강은 ‘큰 나라가 있는 강’을 의미한다. 백마강을 한눈에 굽어보며 자리 잡은 곳이 부소산성이다. 위례성(서울), 웅진(공주)에 이어 백제의 마지막 왕도였던 사비(부여)의 역사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부여 여행 일정은 부여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 부소산성을 돌아본 후 가까운 정림사지와 국립부여박물관, 궁남지 등을 차례로 돌아보는 것으로 잡으면 된다.
백제를 산책하다
부소산성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사비성 또는 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로 수도를 옮기던 백제 성왕 16년(서기 538년)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소산성의 둘레는 약 2.2km. 해발 106m의 낮은 산인데다 소나무, 왕벚나무, 갈참나무, 상수리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 사이로 산책길이 잘 정비되어 있어 아이들과 노약자도 쉽게 걸을 수 있다. 부소산성의 여행은 사비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난 길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길은 소나무가 울창한데다 널찍한 돌이 깔려 있어 산책코스로도 손색이 없다. 처음 만나는 곳은 삼충사(三忠祠). 백제 삼충신인 성충과 흥수, 계백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곳이다. 삼충사를 지나면 백제시대 왕과 귀족들이 계룡산 연천봉에 떠오르는 해를 맞으며 하루를 계획했다는 영일루, 백제시대 곡물을 저장했던 창고인 군창지가 차례로 나타난다. 군창지를 지나면 반월루. 전망 좋은 누각이다. 부여읍내와 구드래 들판, 반월형으로 읍내를 감싸 도는 백마강까지 한눈에 둘러볼 수 있는 곳이다. 반월루 뒤 산책로 안쪽 길가엔 복원해 놓은 백제 때 움집터①(현대식 건물)가 있다.
반월루에서 낙화암이 가깝다. 낙화암은 부소산성 여행의 하이라이트다. ‘의자왕과 삼천궁녀’의 애틋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백제의 삼천궁녀들이 꽃처럼 목숨을 던진 낙화암 바로 앞에는 1929년 세운 정자 백화정이 있다. 백화정에 서면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소나무 가지 너머로 구드래나루터에서 고란사까지 운행하는 유람선이 미끄러지듯 강을 거슬러 오르는 풍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낙화암에서 10분쯤 걸어 내려가면 고란사가 나온다. 낙화암에서 뛰어내린 백제인들이 떨어진 곳은 백마강이 아닌 고란사 근처 바위 계곡이었다. 그 이름도 어여쁜 고란사(皐蘭寺)는 낙화(落花)가 된 백제인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이곳에 지어졌다. 지금도 식수로 애용되는 고란수가 나오고 바위틈에서 자라는 다년초 식물 고란초가 있다.
① 땅에 30~100cm의 깊이로 넓은 구덩이를 파서 만든 집터
백제 멸망에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궁녀들의 처연한 삶을 위로하고 싶다.
초록이 더 짙어지면 궁녀들의 원혼은
강물 따라 유유히 흐르며
백제 부여 땅을 보호할 것이다.
석탑의 아름다움을 느끼다
부소산성 가까이 정림사지가 있다. 부여읍 중간에 자리한 이곳은 이름 그대로 정림사란 절이 있던 자리다. 이곳을 빼먹으면 안 되는 이유가 정림사지 5층석탑 때문이다. 국보 제9호. 서기 660년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패망할 때, 사찰은 전소되었는데 다행히 석탑만은 남았다. 현존하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된 탑이며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고대 삼국시대 석탑의 원형을 밝혀주는 문화재로 꼽히고 있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소정방탑으로 알려져 있는데 비문에 대당평백제비(大唐平百濟碑)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대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했다는 뜻이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백제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여실히 보여준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아침 안개 속의 정림사탑은 엘리건트하며① 노블하며② 그레이스한③ 우아미의④ 화신이다’고 적고 있다. 그는 ‘정림사탑이야말로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다는 백제 미학의 상징적 유물’이라고 덧붙였다. 훤칠한 키에 늘씬한 몸매를 지닌 이 석탑을 보고 있노라면 이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오층석탑 뒤 복원된 강당 안에는 키 큰 석불이 모셔져 있다.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보물 108호)이다. 돌로 된 중절모를 쓴 듯한 멋쟁이 석불이다. 탑은 백제 때 지어졌지만 석불은 고려 때 것이다. 고려 때 재건축하면서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석불의 머리와 모자는 후대에 다시 올려놓은 것이라 한다.
정림사지를 나와 길을 하나만 건너면 국립부여박물관이다. 백제문화의 진수로 손꼽히는 백제금동대향로를 볼 수 있는 곳이다. 능산리사지⑤에서 발굴된 세기의 보물로 백제 공예품의 절정을 보여준다. 6세기 말 백제 부여시대에 제작된 금동대향로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전체 높이 62.5cm. 용 모양의 향로받침 위에 연꽃 모양의 향로 몸체를 사뿐하게 얹혔다. 뚜껑 부분에는 산봉우리들이 솟아 있다. 산봉우리에는 온갖 것들의 형상이 빚어져 있다. 자세히 보면 말을 타고 사냥하는 사람도 있고 신선들도 노닌다. 호랑이와 사자, 원숭이 멧돼지, 코끼리, 낙타 등 여러 동물도 보인다. 하나같이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 생동감 있다. 뚜껑의 손잡이 부분은 봉황이 날아갈 듯 깃털을 움직이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봉황 바로 아래에는 다섯 악사가 각각 소, 피리, 비파, 북, 현금을 연주하고 있다. 불교문화연구가들은 백제금동대향로가 불교의 이상향인 연화장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고 말한다.
① 엘리건트하며(품격있고) ② 노블하며(숭고하며) ③ 그레이스한(우아한) ④ 우아함 속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 ⑤ 백제가 사비로 천도하면서 조성한 사찰의 절
백제의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부여.
어디를 가든
백제인들의 기품 어린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다.
백제의 우아한 정원
부여를 여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궁남지다. 궁남지는 ‘궁 남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국사기>에 ‘궁궐의 남쪽에 20여 리나 되는 긴 수로를 파 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사적 제135호. 634년 무왕시절 만든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연못이라고 한다. 1만 평 정도에 이르는 지금의 궁남지는 1965년에 복원한 것인데, 원래 규모의 3분의 1쯤이라고 한다. 궁남지 한 가운데의 ‘뜬 섬’에는 포룡정(泡龍亭)이라는 현판이 걸린 정자가 있다. 이는 백제 무왕의 어머니가 궁남지에 살던 용이 나타나자 의식을 잃은 뒤 무왕을 잉태하게 되었다는 탄생 설화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뜬 섬으로 이어지는 나무다리를 건너면 정자로 들어갈 수 있다.
사비궁. 백제 사비 시기의
중궁을 재현한 중궁전,
왕의 집무실 등을
볼 수 있다.
백제의 역사는 오늘도
우리 삶 속에서
계속되고 있다.
궁남지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가 깃든 곳이기도 하다. 두 사람이 신접을 차린 곳이 바로 궁남지 터다. 부여 여행의 마지막 코스는 백마강 건너에 자리한 백제문화단지다. 백제 왕궁과 마을을 재현해 놓았다. 당시의 생활상을 재현한 사비성에는 왕궁 및 능사, 생활문화 마을, 위례성, 고분공원, 역사문화관 등이 들어서 있다. 입구인 정양문을 지나면 사비궁이 나온다. 백제문화단지에 재현된 사비궁은 궁궐의 중심이 되는 천정전과 문사전, 무덕전 등이 회랑으로 둘러싸인 형태를 하고 있다. 천정전은 사비성의 상징적 공간으로 신년하례식, 사신 접견 등 왕실의 중요 행사 때만 사용하던 공간이다. 이곳에 가면 백제 사비 시기의 중궁을 재현한 중궁전, 왕의 집무실 등을 볼 수 있다.
사비궁을 나오면 오른쪽으로 커다란 목탑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능사’다. 능사는 백제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된 사찰이다. 능산리에서 발굴되었던 것을 원형과 똑 같은 크기로 이곳에 재현했다고 한다. 능사의 건축, 색채, 조각품 등은 백제 예술의 전형을 보여주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백제문화단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관람 포인트는 역시 생활문화마을. 백제 시대 귀족부터 군관가옥, 그리고 중류계급과 서민계급의 집들을 재현해 놓았다. 군관 계백의 집, 건축가 아비지의 집, 의박사 왕유릉타의 집, 불상조각가 도리의 집 등이 있다. 생활문화마을 위에 자리 잡은 위례성은 한성 백제(BC 18~AD 475)의 도읍을 재현해 놓은 공간으로 위례궁, 고상가옥, 개국공신 마려의 집 등을 당시 백제의 건축과 생활상을 볼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다.
여행정보
★ 가는 길 ① 서울 남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부여행 고속버스가 3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2시간 소요. ② 대전 서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2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 묵을 곳 롯데부여리조트(041-939-1000, www.lottebuyeoresort.com),백제관광호텔(041-835-0870), 스타팰리스모텔(041-833-3005) 등이 있다.
★ 먹을 곳 구드래나루터 주변으로 음식특화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구드래돌쌈밥(041-836-9259)의 쌈밥과 나루터식당(041-835-3155)의 장어구이가 유명하다. 장원막국수(041-835-6561)는 오래된 가정집을 식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어린 시절 뛰놀던 할머니댁이 생각나게 한다. 육수는 새콤하고 달콤하다. 면은 메밀 함량이 높아 가위가 굳이 필요 없다. 끼니 때마다 요란한 줄이 대문 밖에 진풍경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