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도 가는 길은 만만치 않다. 서울에서 가려면 버스를 이용해 완도까지 간 뒤 완도항에서 다시 뱃길로 50여 리를 가야 한다. KTX를 이용해 목포까지 간 뒤 목포에서 완도를 거쳐 청산도로 가는 방법도 있다. 어쨌든 청산도에 가기 위해서는 완도항으로 가야 한다. 비릿한 기름 냄새를 맡으며 철부선을 타고 40여 분을 달리자 뿌연 해무(海霧) 너머로 섬이 나타난다. 배가 닿은 곳은 도청항. 청산면사무소가 있는 도청항 일대는 청산도에서 가장 번잡하다. 작은 규모의 식당들이 항구를 중심으로 다닥다닥 붙어있다. 병원과 약국, 상점 등 각종 편의시설도 밀집해 있다. 방문자센터도 마련되어 있어 지도를 구할 수도 있고 다양한 여행정보도 얻을 수 있다. 사시사철 섬이 푸르다고 해서 붙은 이름 청산도. 옛날 사람들은 신선이 산다는 섬이라 해서 ‘선산도’로도 불렀고 ‘선원도’라고도 했다. 기록상으로는 1608년(선조 41년) 조선시대에 처음 사람들이 청산도에 정착했다. 누구든 그 앞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려야 하는 조선시대의 유적 하마비도 볼 수 있고 선사시대의 고인돌도 남아있다. 대모도, 소모도, 여서도, 장도 등 네 개의 유인도와 여러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는데 면적은 서울 여의도의 다섯 배 정도다. 1,500여 가구가 살고 있지만 대부분이 노인이다. 젊은이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느긋하게 걸으며 느끼는 청산도
청산도는 참 예쁜 섬이다. 황톳길은 꼬리 치며 언덕 너머로 달아나고 그 길을 따라 구불구불 돌담이 이어진다. 돌담 안에는 맥주보리, 쌀보리가 무릎만큼 자랐다. 바람이 불 때마다 푸르게 출렁인다. 청산도가 세간에 알려진 것은 영화 <서편제>를 촬영한 이후부터다. 도청리 선착장에서 내려 언덕길을 따라 1km를 가면 당리 돌담길이 나오는데, 바로 이 길에서 한국 영화사 최고의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5분 20초의 롱테이크 장면이 탄생했다.
“사람이 살면은 몇백 년 사나/ 개똥 같은 세상이나마 둥글둥글 사세/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이내 가슴속엔 구신도 많다/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에으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이웃마을에서 노래를 팔고 돌아온 유봉(김명곤)과 의붓딸 송화(오정해), 의붓아들 동호(김규철)가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돌담길을 따라가던 장면이다. 돌담길의 길이는 500m 정도. 한때 길 전체에 시멘트를 포장한 적이 있었는데 관광객들의 성화로 시멘트를 뜯어냈다. 흙길 위로 건초더미를 얹은 지게를 짊어진 농부들이 오가는 모습이 정겹다. 드라마 <봄의 왈츠>도 청산도에서 촬영했다. 언덕 한 쪽에 세트장이 그림처럼 서 있다. 세트장에서 화랑포로 가는 길이 이어진다. 섬 남쪽에 삐쭉 튀어나온 ‘새땅끝’을 한 바퀴 둘러 나오는 길인데, 바닥에 시멘트를 깔았다. 찾는 사람이 적어 고즈넉하게 걸을 수 있다.
2007년에는 담양군, 완도군과 함께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로 지정돼 국제슬로시티연맹으로부터
‘치타슬로(chittaslow, 슬로시티의 국제적 공식명칭)’ 인증을 받았다. 1999년 ‘느리게 살자’라는 구호 아래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슬로시티 운동은 국제연맹이 설립되며 전 세계로 확산됐다. 경쟁하듯 ‘더 많이, 더 빨리, 더 풍족하게’를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좀 더 느리게, 좀 더 작게, 좀 더 부드럽게’를 추구하며 영속성을 지켜나가자는 운동이다. 슬로시티로 인증 받기 위해서는 인구가 5만 명 이하여야 하고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어야 하며 패스트푸드점이 없어야 하는 등 수십 개의 까다로운 기준을 충족시켜야 한다. 슬로시티연맹은 청산도를 “슬로시티 정신의 원형이 구현된 곳이다”라고 평가했다.
서편제 영화 속의
한 장면을 걷는다.
오늘만큼은 내가
주인공이 되어
이 영화 같은 마을을
천천히 걷는다.
청산도는 작심하고 나서면 반나절, 느긋하게 걸어도 하루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다. 물론 차로 돌아볼 수도 있지만 발목 시큰하게 걸어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 청산도를 일주하는 슬로길이 만들어져 있는데 모두 11개 코스(17길), 길이는 100리(42.195km)에 달한다. 모두 걸으려면 약 14시간이 걸린다. 길마다 제 나름의 이야기와 주제가 있으니 취향대로 골라 걷는 것이 좋겠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이 길을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로 지정했다. 꼬불꼬불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청산도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코스마다 ‘느림보 우체통’이 놓여 있는데, 느림엽서에 하고 싶은 말을 적은 뒤 느림보 우체통에 넣으면 1년 후에 편지가 배달된다. 여행객들을 즐겁게 하는 해수욕장도 여럿 있다. 도청항에서 서쪽으로 가면 지리해수욕장으로 1.2km 길이의 모래밭이 곱다. 수령 200년이 넘은 곰솔 800여 그루가 모래밭 뒤편으로 군락을 이루고 있다. 지리해수욕장은 청산도의 해를 보내는 곳이기도 하다. 대모도와 소모도 너머로 지는 일몰이 가슴을 저릿하게 만든다. 섬 동쪽에는 신흥해수욕장이 있다. 썰물 때가 되면 물이 십 리나 빠진다. 상산포에서 목섬까지 깨끗하고 부드러운 모래사장이 2km가량 펼쳐진다. 아무도 밟지 않은 백사장을 걷는 것 자체만으로도 낭만적이다. 지리해수욕장과 신흥해수욕장 사이에는 갯돌이 깔린 몽돌해변이 있다. 축구공만 한 크기의 돌들부터 아기 주먹만 한 크기의 돌들이 널려 있다.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잘그락잘그락하는 소리를 낸다. 발로 바닥을 치면 퉁퉁하고 울린다. 당리마을에서 3km 거리다.
청산도는 2007년
국제슬로시티연맹으로부터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로
지정되었다.
느리게 사는 삶의 여유를
만끽하기 좋은 곳이다.
청산도에서 가장 수려한 해안 절경을 간직한 곳이 바로 범바위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제법 가파른 길을 30분 정도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정상에 오르면 수고는 충분히 보상받는다. 범바위 앞바다에 떠있는 무인도인 상도와 여서도의 모습이 여유롭기만 하다. 맑은 날이면 제주도까지 보인다고 한다. 청산도에 살던 호랑이가 자신이 울부짖는 소리가 범바위에 부딪히면서 더욱 크게 울려 퍼지자 더 크고 힘센 호랑이가 살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겁을 집어먹고 섬 밖으로 내뺐다는 재미있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이기도 하다. 범바위 주변은 늘 바람이 세차다. 이 바람소리가 꼭 호랑이의 울음소리 같다. 신기하게도 범바위 근처에서는 나침반이 작동하지 않는단다. 범바위 자체가 자성이 있는 암석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삶은
녹록하지 않다.
그래도 오늘보다
내일이 나으리라는 믿음으로
청산도 사람들은 느리지만
열심히 삶을 산다.
팍팍한 섬 생활 그래도 아름다운 섬
청산도는 아름다운 섬이지만 이 섬을 일궈 살림을 꾸리던 사람들은 참 고단한 생을 살았다. 청산도 삶의 팍팍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구들장논이다. 구들장논은 산을 깎은 다음 구들장 같은 평평한 돌을 깔고 그 위에 다시 흙을 덮어 만든 논. 청산도에는 돌이 많아 물이 고이지 않기 때문에 농사를 지으려는 방편으로 돌을 깔았다. 그러다 보니 흙이 기름지지 못했고 퇴비를 매년 해야 했다. 지금도 도락포 양옆에는 구들장논이 남아있는데 아직도 그 논에서 농부들은 누렁소를 끌고 논갈이를 한다. 청산도에서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으면 ‘청산도 처녀 시집갈 때까지 쌀 서 말 먹기 힘들다’는 말도 있었고 ‘여자들은 청산도로 시집가지 말라’는 말도 있었을까. 논과 밭이 여인네들의 일터였다면 바다는 남정네들의 일터였다. 한때는 삼치와 고등어가 파시(波市)를 이뤄 돌아오는 어선마다 산더미같이 고기가 쌓이고 흥겨운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단다. 지금도 발길 닿는 곳마다 낚싯대를 드리울 수 있는 사계절 갯바위 낚시터로 유명하다. 도미, 우럭, 농어가 잘 잡힌다. 특히 감성돔이 지나는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는 전국에서 강태공들이 몰려들어 성시를 이룬다.
청산도는 돌섬이기도 하다. 그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돌담이다. 대부분의 집담이 돌담으로 되어 있다. 돌이 흔하다 보니 돌로 지은 외양간까지 있다. 돌담은 높지도 반듯하지도 않다. 내 것 남의 것 이웃 간의 경계가 별로 없어 보인다. 가장 보존이 잘된 곳이 상서마을이다. 상서마을 돌담은 흙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돌만 이용해 담을 쌓아 올린 것이 특징이다. 마을 전체가 돌담으로 형성돼 있는데 자연석을 이용해 견고하게 쌓아 올렸다. 1970년대 초 새마을운동 당시 마을길을 넓히면서 일부 담장을 옮겨 쌓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원형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청산도는 봄에 가는 것이 가장 좋다. 푸른 보리들이 바람에 쓸려 물결치는 모습은 눈물 나게 아름답다. 푸른 보리밭뿐 아니라 모내기를 위해 물을 댄 무논도 장관이다. 계단처럼 층층이 쌓인 무논은 해질 무렵이면 석양을 오롯이 받아낸다. 거름을 대려고 일부러 베지 않은 풀밭에는 보라색 꽃을 피운 자운영이 가득하다. 새참을 이고 자운영 밭 사이를 걸어가는 아낙들의 모습이 평화롭기만 하다.
푸른 보리밭과 끝없이 이어지는 돌담, 보라색 양귀비가 어울린 청산도. 이 계절이 가기 전, 서둘러 가 청산도를 즐겨볼 일이다.
여행정보
★ 교통편 청산도로 들어가려면 완도 연안여객터미널에서 배를 타야 한다.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항한다. 청산도에서 완도로 가는 배도마찬가지다. ‘가보고 싶은 섬(island.haewoon.co.kr)’에서 예매할 수 있다. 완도에서 출발할 경우 어른 7700원, 청산도에서는 7000원. 자동차 도선이 가능하며 자동차는 예약을 받지 않고 여객터미널에서 선착순으로 표를 판매한다. 소형차 기준 왕복 4만 8000원. 완도 여객선터미널 061-550-6000. 청산매표소 061-552-9388. 청산도에는 순환버스와 투어버스가 운행된다. 순환버스(5,000원)는 구매 당일에 한하여 반복승차가 가능하다. 투어버스(7,000원)는 지정된 시간 동안 섬을 돌아본다.
★ 묵을 곳 느린섬 여행학교(slowfoodtrip.com, 061-554-6962)는 청산중학교 동분교를 리모델링해 만든 펜션이다. 청산도의 톳을 넣어 만든톳밥, 전복구이, 제철 나물 등이 반찬으로 나오는 건강밥상을 맛볼 수 있다. 1인 1만원. 도청항 근처에 식당과 숙박업소가 밀집되어 있다. 민박은마을마다 여러 곳에서 운영하고 있다. 청산도 홈페이지에서 (www.cheongsando.net) 정보를 얻을 수 있다.
★ 먹을 곳 도청항 근처에 식당이 많다. 백반, 아귀탕, 전복죽, 생선회 등을 내놓는다. 전복물회, 전복죽 등이 1만 2000~1만 5000원. 청산도 여객선 매표소 옆의 어시장에서는 싼값에 청산도산 전복과 해삼 외에 싱싱한 생선회를 맛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