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번 지방도로는 한적한 시골길이다. 길은 산모롱이✽를 따라 돌며 심전도 눈금이 요동치듯 이리저리 비틀거린다. 그리고 그때마다 강이 나타났다가 또 사라진다. 가을볕에 물든 강은 여행자의 발걸음을 느리게 만든다. 햇살 아래 키 큰 미루나무 한 그루가 강을 바라보며 서 있다. 미루나무 위로는 솔개 한 마리가 커다란 원을 그리며 맴돈다. 영월에는 강이 참 많다. 오대산에서 걸음을 시작해 봉평을 지나온 평창강, 횡성에서 출발한 서만이강, 서만이강에 법흥사 계곡수를 보탠 주천강이며 조양강 물길을 이어받은 동강 그리고 평창강과 주천강이 합쳐진 서강과 동강, 서강이 합쳐진 남한강 등등. 이 많은 강들이 영월 땅 구석구석을 적신다.
✽산모롱이 : 산모퉁이의 휘어 들어간 곳
평창강, 서만이강 주천강, 동강, 서강, 남한강까지 영월은 강이 많기로 유명하다. 가을 햇살이 오롯이 스민 강은 영월 구석구석을 굽이굽이 돌며 여행자들의 발목을 붙잡는다. 두 개로 쪼개진 선돌 사이로 보이는 강이 더없이 아름답다.
강은 가을빛에 눈부시고
아마도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강은 동강일 것이다. 태백 검룡소에서 흘러나온 물줄기와 대관령에서 흘러나온 송천이 아우라지에서 만나고 다시 조양강으로 이름을 바꿔 정선 가수리에서 동강으로 변한다. 동강은 굽이쳐 흘러 영월까지 흘러내려 오고 어라연계곡이라는 절경을 빚어낸다. 하지만 서강의 풍경도 동강에 뒤지지 않는다. 동강이 계곡을 따라 힘차고 굵게 흘러내린다면 서강은 잔잔하게 흘러간다. 그러면서 우뚝 솟은 선돌과 한반도 모양의 선암마을 같은 비경을 빚어낸다.
영월을 찾은 여행자들이 가장 먼저 달려가는 곳은 선암마을의 한반도 지형과 선돌이다. 한반도 지형은 영월시내에서 20분 거리에 있다. 서강의 침식과 퇴적이 되풀이되면서 만들어졌는데, 한반도 동쪽의 급경사와 서쪽의 완만함, 백두대간을 연상케 하는 빽빽한 소나무, 땅끝 해남마을과 포항 호미곶 등이 절묘하게 배치된 형상의 모습이 마치 하늘에서 한반도를 내려다보듯 똑 닮아있다. 선암마을에서 영월 방향으로 조금 더 가 소나기재에 내리면 선돌이다. 절벽이 반으로 쪼개져 두 개로 나뉘어 있다. 벼락을 맞은 것 같기도 하다. 쪼개진 절벽과 크게 휘돌아가는 강, 강 자락에 일구어놓은 밭이 어우러져 평화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선돌이란 이름은 돌의 모양이 마치 신선처럼 보였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푸른 강과 층암절벽이 어우러진 모습이 마냥 신비로워 신선암(神仙岩)으로도 불린다. 선돌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면 한 가지 소원이 꼭 이뤄진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1820년에 영월부사를 지낸 홍이간과 문장가이자 풍류가였던 오희상, 홍직필 등 세 명이 구름에 쌓인 선돌의 경관에 반해 시를 읊으며 선돌 암벽에 ‘운장벽(雲莊壁)’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고 붉은색을 칠한 흔적이 아직 남아있다.
솔잎 사이로 가을볕이 내린다. 영월에 가면 울창한 소나무 길을 평화롭게 또 여유롭게 걷기 좋다. 그러나 이 길 어디쯤 영월로 유배되었던 어린 임금, 단종의 깊은 슬픔과 시련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영월에 깃든 비운의 인물들
길은 빙빙 돌아 김삿갓면에 닿는다. 영월은 김삿갓의 고장이라 불린다. 김삿갓으로 기억되는 난고(蘭皐) 김병연은 순조 7년(1807년) 3월 3일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다. 자라면서 글 읽기와 시 쓰기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 그는 20세 되던 해 과거시험에서 ‘홍경래의 난’ 때 항복했던 김익순의 죄상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써 장원을 차지한다. 하지만 뒤늦게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임을 알게 된 김병연은 스스로 죄인임을 자처하며 삿갓을 쓰고 방랑한다. 깎아지른 듯한 계곡이 범상치 않은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에는 김삿갓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김삿갓 유적지가 만들어져 있다. 김삿갓의 묘와 주거지, 노래비, 시비 등을 돌아보다 보면 풍자와 해학, 슬픔과 웃음으로 가득했던 그의 일생을 되짚어볼 수 있다. 김삿갓 유적지 옆에 자리한 조선민화박물관도 추천한다. 서민의 삶이 녹아내린 옛 그림 3,500점을 감상할 수 있다. 2층엔 어른들만 볼 수 있는 ‘춘화방’도 있는데, 조선시대 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그려진 춘화와 중국, 일본의 춘화 5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김삿갓 말고도 영월에 뼈를 묻은 비운의 인물이 있다. 조선 역사상 가장 불행했던 임금으로 꼽히는 단종이다. 단종은 총명한 왕자였다.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의 뛰어난 학자들이 그의 스승이었다. 세종은 어린 손자를 유난히 귀여워했다. 8살의 나이에 세손이 됐고, 10살에 세자로 책봉됐다. 아버지 문종이 임금이 된 지 2년 만에 승하하자 단종은 12살의 나이로 보위를 물려받았다. 어린 임금 주변에서는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삼촌인 수양대군(세조)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황보인과 김종서를 죽이고 권력을 장악한 세조는 3년 뒤 단종을 멀고 먼 강원도 땅 영월로 유배시켰다. 어린 시절 글을 가르쳤던 성삼문과 박팽년, 세자 시절의 스승이었던 이개 등은 단종복위운동을 벌이다 발각돼 죽임을 당했다. 이들이 사육신이다. 김시습과 남효온 등은 벼슬을 버리고 은거해 생육신으로 불린다.
청령포는 단종이 귀양살이했던 곳이다. 앞에는 강줄기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는 벼랑이 솟은 청령포는 천혜의 감옥이다. 유일하게 육지와 이어진 곳은 육육봉이란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어 배가 아니면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임금에서 노산군으로 강등돼 영월까지 쫓겨온 단종은 청령포에서 두 달을 보냈다.
‘ 원통한 새 한 마리가 궁중을 나오니(一自寃禽出帝宮) / 외로운 몸 그림자마저 짝 잃고 푸른 산을 헤매누나(孤身隻影碧山中) / 밤은 오는데 잠들 수가 없고(假眠夜夜眠無假) / 해가 바뀌어도 한은 끝없어라(窮恨年年恨不窮)…’
단종은 자신의 신세를 하염없이 우는 ‘소쩍새’에 비유한 ‘자규시(子規詩)’를 쓰며 한을 달랬다.
큰 홍수가 닥치자 단종이 청령포를 떠나 영월 읍내로 보내졌고 17세가 되던 해 12월 사약을 받았다. 어린 임금의 시신은 강물에 버려졌다. 어느 한 곳에 정착할 수도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세조의 서슬 퍼런 후한이 두려워서일까. 아무도 시신을 거들떠보지 않았지만 엄홍도라는 관리가 몰래 시신을 수습해 지금의 장릉 자리에 묻었다. 장릉은 조선 임금 중 유일하게 강원도에 있는 능이다. 장릉 주변의 소나무들이 능을 향해 허리를 굽힌 모습이 이채롭다. 단종이 대군으로 복권된 것은 224년 뒤인 1681년 숙종 때. 그로부터 다시 17년 뒤에는 단종임금으로 완전한 복권이 이뤄졌다. 가을볕이 스미는 장릉은 따사롭기만 하다. 능으로 가는 길, 소나무가 울울창창(鬱鬱蒼蒼) 우거져 있다. 솔잎 사이로 새어나온 햇빛은 어깨를 따스하게 데우는데, 단종의 슬픔을 아는듯 모르는 듯, 여행을 떠나 온 이들의 발걸음은 차라리 소풍길마냥 평화롭고 다정하기만 하다.
영월에는 박물관도 많다. 그중 폐광되었던 영월광업소를 탄광문화촌으로 재현한 곳이 가볼 만하다. 그 시절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요선암, 신선이 놀던 기이한 풍경
영월 초입, 가장 먼저 만나는 강이 주천강이다. ‘주천(酒泉)’이란 이름은 인근에 ‘술이 솟는 샘’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주천강은 흐르고 흘러 무릉리까지 간다. 무릉리. 이름만 들어도 마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짐작할 수 있다. 강을 따라가다 보면 병풍 같은 절벽을 마주치기도 하고 밥 짓는 연기를 피워 올리는 정겨운 마을을 만나기도 한다. 주천강이 보여주는 풍경 중에서도 가장 으뜸이 요선암이다. 요선암은 강바닥에 있는 거대한 바윗덩어리인데 기묘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미륵암이라는 작은 암자 앞마당에서 돌계단을 따라 강가로 내려가면 거대한 암반지대를 만난다. 사과를 깎듯 돌려 깎은 바위며 요강 같은 구멍이 난 바위 등 하나같이 수많은 시간과 물살이 만들어 낸 작품이다. 조선 중기의 명필 양사헌은 이곳 경치에 반해 ‘신선이 놀고 간 자리’라는 뜻의 요선암이란 이름을 붙였다. 미륵암 뒤편으로 5분가량 솔숲을 오르면 요선정이란 정자와 고려 때 세운 마애불, 자그마한 불탑을 만날 수 있다. 정자는 1915년에 지어진 것이라 내력이 깊진 않지만, 정자 곁 무릉리 마애좌상 뒤편의 바위에 올라 뿌리를 내린 옹골찬 소나무 아래로 굽어 보이는 강물의 정취가 빼어나다. 마애불은 앞으로 기울어진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머리와 어깨는 높이 돋을새김 돼 있고, 그 아래로는 새김이 얕다. 정교하지 않지만 소박해서 정감이 간다.
주천에서는 법흥사가 가깝다. 선덕여왕 12년(643)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하기 위해 만든 사찰이다.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영취산 통도사, 태백산 정암사와 함께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국내 5대 적멸보궁의 하나이기도 하다. 적멸보궁 안에는 불상이 없다. 대신 뒤쪽 풍경이 훤히 보이는 유리창 하나가 뚫려 있다. 유리창 너머로 사자산의 봉우리 3개가 보인다. 창에서 직선을 뻗으면 보이는 봉우리에 부처의 진신사리가 봉안돼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캠프장 가운데 한 곳이 영월 솔밭캠프장이다. 어린아이부터 온 가족이 함께 하기 좋은 캠프장이다.
가슴 따스해지는 영월의 옛 풍경을 만나다
영월은 박물관 고장이기도 하다. 곤충박물관이며 책박물관, 베어가곰인형박물관 등이 잘 알려져 있다. 아이들과 함께라면 박물관을 중심으로 여행 일정을 짜도 될 정도다. 영월에 자리한 많은 박물관 가운데서도 꼭 가보라 권하고 싶은 곳이 북면 마차리에 자리한 탄광문화촌이다. 마차리는 한때 무진장의 석탄 광맥으로 번성했던 곳이다. 1935년 조선전력주식회사가 채탄의 첫 삽을 떴던 한국 1호 탄광이 마차리에 있다. 가장 잘 나갔을 때는 6만여 명이 모여 살기도 했다. 마차탄광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이 잇따라 시찰했던 국가 중요 기간산업 시설이었다. 하지만 ‘개도 만원자리를 물고 다닌다’고 비유했던 마차리의 영화는 1972년 제1차 폐광 이후 쇠락의 길에 들어선다. 지금은 주민 2,500여 명이 살아가는 폐광촌이다. 을씨년스럽던 마을에 탄광문화촌이 들어서면서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여행객들도 알음알음 찾아온다. 탄광문화촌에는 1960~70년대 영월광업소가 있던 탄광촌 마을 풍경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광부들이 탁주 한 사발로 피로를 푸는 주점과 이발관, 양조장, 배급소와 버스정류장 등 그 시절 그 모습이 보는 이의 마음을 아리거나 훈훈하게 한다.
여행정보
가는 길
동서울터미널에서 영월 가는 시외버스를 탈 수 있다.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이용해도 된다. 영월시내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영월 여행을 즐기기는 다소 힘들다. 일행이 있다면 택시를 전세를 내어 당일 여행을 하는 것도 한 방법. 청령포와 장릉, 선돌, 조선민화박물관, 김삿갓유적지, 한반도 지형 등을 돌아본다.
박물관
베어가곰인형박물관은 테디베어(Teddy Bear)✽ 전문 작가인 고현주 씨 등 국내·외 작가 30명의 수제 곰인형 작품 5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는 곳. 전통 테디베어는 물론 단종, 김삿갓, 스포츠, 별자리 등과 접목한 인형들이 흥미롭다. 영월곤충박물관은 국내 최초로 개관한 곤충 전문 사립박물관이다. 순수 국내 곤충만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폐교된 분교 건물을 개조해 나비, 나방, 잠자리, 딱정벌레 등 1만여 종 3만여 점의 곤충을 전시하고 있다. 책박물관은 책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소중함을 가르쳐 주는 곳. 이광수의 ‘무정’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그리고 ‘소년’ ‘어린이’ 등 다양한 책과 잡지가 원본 그대로 전시돼 있다.
✽테디 베어(Teddy bear) : 손바느질로 만든 곰 인형
먹거리
다하누촌(033-372-2280)은 삼겹살보다 더 싼 가격으로 한우를 먹을 수 있는 곳.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다하누촌에서 판매되는 한우는 영월, 평창, 횡성, 안동 등지에서 공수해온 소로 지방이 골고루 퍼져 씹는 맛을 좋게 하는 ‘마블링’이 높은 암소와 거세한 수소만 쓴다. 매장에서 고기를 구입해 인근 식당에 가서 테이블비를 내고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다.
주천면 주천묵집(033-372-3800)은 메밀과 도토리로 만든 묵밥이 맛있다.
영월 솔밭캠프장(033-374-9659, www.solbatcamp.co.kr)은 한국에서 가장 멋진 캠핑장 가운데 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