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강릉에 가는 이유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다. 여행에는 많은 종류와 수많은 이유가 존재하는데,
꽉 막힌 고속도로를 뚫고 커피를 마시기 위해 300km 가까운 거리를 달려가는 것 역시 여행의 수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커피를 마시러
강릉으로 간다.
진한 커피향과
비릿한 바다향이
한데로
어우러진다.
우리는
이야길 나누고
사색에 잠긴다.
나의 마음이
당신에게로 옮겨간다
언제부터인가 강릉은 커피도시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젠 강릉하면 경포대도 아니고 오죽헌도 아니고 선교장도 아닌 커피가 먼저 떠오른다. 강릉에 커피가 ‘전해진’ 시기는 얼추 10여 년 전이라고 보면 되겠다. 박이추 씨가 강릉으로 내려오면서부터다. 박씨는 우리나라 커피계에서 전설로 불리는 ‘1서徐 3박朴(고 서정달, 고 박원준, 박상홍, 박이추)’ 중 한 명이다. 다크 로스팅①과 핸드드립②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강릉 연곡 바닷가에서 ‘보헤미안’이라는 커피점을 운영하고 있다. 서울 안암동 고려대 후문 쪽에서 커피점을 운영하다 2000년 대관령을 넘어 강릉으로 왔다. 보헤미안은 연곡이라는 곳에 숨어있다. 강릉 시내를 벗어나 속초로 가는 7번 국도를 따라가면 만나는 곳이다. 야트막한 언덕으로 난 시멘트길을 5분여 따라가다 보면 3층짜리 하얀색 건물이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을 본다. ‘보헤미안’이라는 간판이 없다면 아무도 커피 가게임을 눈치채지 못할 것 같다. 누가 이런 곳에 커피 가게를 차렸을까. 보헤미안은 세상사에는 별 관심을 두고 싶지 않다는 자세로 서 있다. 다방 같다. 열개 남짓한 갈색의 테이블과 의자가 별다른 장식 없이 놓여있다. 카페 한쪽에 로스팅실이 있다. 사람 키보다 큰 커다란 로스팅 기계가 웅웅거리며 커피를 쏟아내고 있고 검은테 안경을 쓴 더벅머리의 한 사람이 갓 볶아진 커피콩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것은 마치 보석세공사가 보석의 결점이라도 찾아내려는 결사적인 모습처럼 보인다. 커피콩을 노려보고 있던 사람이 박이추다. 커피는 어떤 맛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까, 하고 대뜸 물었다. 쓴맛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라고 그가 말했다.
로스팅실에서 그는 커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커피는 복잡하다. 콩의 종류에 따라, 볶는 시간에 따라, 볶는 방법에 따라, 콩을 분쇄하는 방법에 따라, 물의 종류에 따라, 물 온도에 따라, 불의 세기에 따라, 날씨에 따라, 장소에 따라, 커피를 내리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그의 마음에 따라, 함께 마시는 사람에 따라, 그의 기분에 따라, 커피맛은 달라진다. 그러니까, 커피맛은 수만 가지 경우의 수가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죽는 날까지 같은 맛의 커피는 결코 맛보지 못할 수도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중간중간 그는 시계를 살폈고 커피콩을 볶고 식혔다. 그리고 노트에 무언가를 꼼꼼하게 기록했다.
좋은 사람과
마시는 커피가
제일 좋은
커피라는
것을 안다.
비록 자판기
커피라도 말이다.
사람과
사람사이를
이어주는 커피
그와 그녀와 함께
마시고 싶다.
그가 커피를 권했다. 직접 블랜딩①한 ‘보헤미안 믹스’를 마시기로 했다. 보헤미안에는 직원이 있지만 그는 여전히 직접 커피를 추출한다. 왜 모든 커피를 직접 뽑으시냐는 질문에 그는,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에게 나의 마음과 에너지를 전달하기 위해지요.’라고 말했다. 직원이 커피 내릴 준비를 마친 후 ‘커피 준비되었습니다’라고 그를 호출하면 그는 주방으로 가 진한 갈색의 커피를 만들어낸다. 그가 직접 내려준 커피는 정말 맛있었고 느낌이 좋았다. 어딘지 모르게 몸이 따스해 지는 것 같다. 그가 내려준 커피를 마시는 일은, 일단 말로 해버리면 가장 중요한 뉘앙스를 잃어버리는 그런 종류의 경험이었다. 하여튼 박이추가 내려준 커피를 마시는 동안 ‘이 차가운 세계에 이런 맛도 있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커피가 맛있습니까. 커피잔을 비운 후 다시 그에게 묻자, “좋은 사람과 마시는 커피가 맛있습니다.” 라고 그가 말한다.
바다가 있고 커피가 있다.
삶을 마주 하는 사색에 잠기는
그런 여유를 만났다.
때론 성난 파도처럼
삶에 거친 시련이
다가와도 커피 한잔이
위로를 해줄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바다로 강릉으로
커피를 마시러 간다.
그곳에서 얻은 삶의 위로는
내일을 살게 하는 힘이 되리라.
이토록 화려한
맛과 향
강릉에서 커피를 이야기할 때 ‘테라로사’②를 빼놓을 수 없다. 구정면 어단리, 도저히 카페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자리에 테라로사가 자리하고 있다. 강릉 커피축제 기간이면 주차요원이 등장할 정도로 유명한 곳이다. 테라로사는 겉으로는 카페로 보이지만 사실은 생두 공장으로 보는 것이 맞다. 테라로사는 세계 유수의 커피 산지에서 ‘생두(Green Bean)’를 들여와 직접 로스팅해 유명 카페와 호텔 등에 납품한다.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등 총 22개국에서 커피 생두를 들여오고 있는데, 이 가운데 니카라과, 과테말라, 브라질, 에티오피아, 인도네시아 5개국에서는 직거래로 수입한다.
테라로사 커피는 강렬하다. 커피 문외한이 마시더라도 특별한 ‘포스’를 느낄 수 있다. 보헤미안의 커피가 전통적이면서도 과묵하다면 테라로스의 커피는 화려하고 직설적인 것 같다. 테라로사에서는 과테말라 라스 마카다미아스를 마셨다. 한 모금 머금으니 입안에서 축제가 펼쳐지는 것 같다. 풍부하고 깊고 강렬하다. 신맛과 단맛, 쓴맛이 꽃처럼 만발한다. 비싼 가격이 아깝지 않다. 테이스팅(Tasting) 코스에 도전해 봐도 된다. 그날그날 로스팅 해 밀봉 유리병에 보관해 둔 원두를 ‘핸드드립’으로 내린다. 커피가 각기 다른 종류로 2잔, 이어서 기호에 따라 에스프레소 혹은 에스프레소 위에 우유 거품을 소량 얹은 커피 1잔 등 총 3잔의 커피를 맛볼 수 있다.
사실, 보헤미안과 테라로사보다 커피로 더 유명했던 곳이 안목해변의 커피자판기였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해변을 따라 늘어선 횟집 앞에 어마어마한 수의 자판기들이 늘어서 있었다. 자판기마다 커피와 설탕과 ‘프림’을 다른 배합으로 만들어냈다. 안목해변에 자주 드나드는 이들은 저마다 ‘단골 자판기’가 있었다고 한다. 한때는 횟집거리였지만 이제는 카페거리가 됐다. 하나둘 커피전문점들이 문을 열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바다를 마주 보는 건물들에 10여 곳이 넘는 커피전문점들이 늘어서 있다. 커피콩을 직접 볶아내 만든 커피를 선보이는 곳도 있고 요일마다 다른 품종의 커피를 내놓는 곳도 있다. 커피전문점이 늘어나면서 커피 자판기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안목해변의 ‘커피커퍼’에 갔다. 커퍼란 커피 맛 감별사라는 뜻. 커피커퍼 역시 커피 애호가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다. 커피커퍼는 정색하고 커피를 마시지 않아도 되는 편안한 분위기가 좋다. 무엇보다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 풍경이 압권이다. 파도소리가 테이블까지 밀려드는 것 같다. 커피커퍼는 왕산면 대기리에 커피박물관도 운영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박물관으로 전시관에는 세계 각국의 원두를 비롯해 진귀한 커피용품들이 전시돼 있다. 커피 로스팅, 에스프레소 추출 등 체험도 가능하다.
주문진에서 연곡과 사천, 경포를 지나 정동진까지 바다를 옆에 끼고 달리는 강릉의 길은 길고 길다. 이 길고 긴 길 중에서도 콕 찍어 심곡항에서 금진항까지 이어지는 2.4km 구간을 가보시라고 추천한다. 이 길은 헌화로라 불린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헌화가’의 그 헌화로다. 암소를 끌고 가던 노인이 벼랑에서 꽃을 꺾어 수로부인에게 바쳤다는 곳이다. 해안길은 뱀처럼 굽이친다. 게다가 수면과의 차이가 2m 정도밖에 안 된다. 진짜로 파도가 차창을 친다. 일출도 볼만하다. 헌화로 구간에 사납게 생긴 갯바위가 많다. 갯바위와 파도, 고깃배, 갈매기가 어울린 드라마틱한 일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탓에 사진작가들도 많이 찾는다. 지척인 정동진에서 ‘선상 일출’을 보기 위해 바다로 떠나는 유람선도 훌륭한 소품이 되어준다.
각주
로스터리 카페(Roastery Cafe) - 직접 커피를 볶아 커피를 판매하는 커피숍
다크 로스팅(Dark Roasting) - 오랫동안 원두를 볶는 것을 말하며 로스팅이 길어지면 더 풍부한 원두향을 내, 쓴맛, 달콤한 맛이 더욱 드러나고 신맛과 카페인은 줄어든다.
핸드드립(Hand Drip) - 드리퍼(Dripper)와 종이 필터를 사용하여 커피를 추출하는 것
커피 블랜딩(Blending) - 특성이 다른 2가지 이상의 커피를 혼합하여 새로운 향미를 가진 커피를 창조하는 것
테라로사 - 강릉에 위치한 커피공장으로 직접 로스팅한 커피를 핸드 드립으로 만들어 주는 카페를 함께 운영하는 곳. ‘커피가 잘 자라는 비옥한 보랏빛 땅’이라는 뜻을 지녔다.
강릉 여행 팁
★ 강릉 커피 거리 / 강릉에는 약 200곳의 커피전문점이 있다.
강릉커피축제(www.coffeefestival.net) 홈페이지에서 강릉 커피지도를 볼 수있다.
보헤미안, 강릉시 연곡면 영진리 181, 033-662-5365, www.ebohemian.co.kr.
테라로사, 강릉시 구정면 어단리 973-1, 033-648-2760, www.terarosa.com.
커피커퍼, 안목해변에 1, 2호점.
박물관은 강릉시 왕산면 왕산리 806-5, 033-655-6644, http://cupper.kr.
커피브라질은 박이추 선생이 추천한 커피전문점. 드립커피가 맛있다. 강릉시 연곡면 영진리 73-2, 033-662-1259.
★ 선교장 / 경포호가 지금보다 훨씬 넓었을 때 배를 타고 건너다녔다고 해 ‘배다리(船橋)’라는 이름에서 유래했다. 효령대군 11세손인 무경 이내번(李乃蕃)이 처음 자리를 잡았는데, 무경이 이곳에 터를 잡은 후 가세가 크게 번창했다. 대문이 달린 행랑채와 안채 사랑채(悅話堂) 별당 사당 및 연당과 정자(活來亭)까지 갖춘 완벽한 조선 사대부가다. 선교장 행랑채 바깥마당 앞 방형 연당에 활래정(活來亭)이 있다. 활래정은 마루가 연못 안으로 들어가 돌기둥으로 받쳐놓은 누 형식으로 건물 일부가 물 가운데 떠있는 듯한 형상을 갖추고 있다.
영화 <식객>을 비롯해 <황진이>, 드라마 <궁> 등을 촬영했다. www.knsgj.net, 033-646-3270
★ 초당 두부 / 강릉 경포대에서 남쪽으로 1km쯤 가면 키 큰 소나무들로 둘러싸인 마을이 나온다. 두부로 유명한 초당마을이다. 초당(草堂)이란 이름은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부친 허엽의 호에서 따왔다. 초당두부는 16세기 중엽 당파싸움에 밀려 강릉 바닷가에 정착한허엽이 만들어 먹던 두부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집 앞 샘물로 콩을 가공하고 바닷물로 간을 맞추어 만든 두부 맛이 뛰어나 찾는 이들이 많자 허엽의 호를 따서 초당두부로 명명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농촌순두부를 추천한다.
강릉시 강문동 126-1, 033-653-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