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든 떠나야 할 것 같다. 여름이니까. 왜냐고 다시 물어도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여름이니까. 그래도 다시 묻는다면 ‘바람이 좋으니까 또는 하늘이 맑으니까’라고 대답하겠다. 여행을 떠나야 하는 이유를 구구절절하게 설명해야 하는 건, 내가 당신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스물세 가지 이상 대야 하는 것만큼 촌스럽고 멋없는 일일 테니까. 여행은 어쩌면 자작나무 사이로 새어드는 따가운 여름 햇빛을 봐야겠다며 신발 끈을 질끈 묶는 것으로 시작되기도 하니까. 머물러야 할 이유는 없지만 떠나야 할 이유는 언제나 넘쳐난다.
구불구불 S자
길을 따라
드라이브를
즐긴다.
길은 비틀거려도
마음은 저 높은
하늘에 닿았다.
바람, 시원하다.
비틀비틀
고개 넘어 만나는
예쁜 간이역
차는 어느새 영동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 이번 여행의 행선지는 함백산 만항재다. 이 땅에서 가장 높은 도로인 414번 지방도가 있는 곳이다. 해발 1,300m. 정선 고한읍에서 만항재를 잇는 11.28km를 20여 분 동안 자동차를 타고 구름 속을 달려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드라이브의 하이라이트는 고한읍에서 함백산을 잇는 구간이지만 중앙고속도로 제천IC에서 새비재와 함백역을 지나 고한읍까지 가는 38번 국도와 421번 지방도를 번갈아 타는 길의 풍경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 10년 전인가, 이 길을 달렸던 적이 있다. 그러니까 낙우송이 노랗게 물들어가고 있던 때였다. 몰운대와 소금강을 지나 만항재에 닿는 긴 긴 길이었다. 몰운대에는 언뜻언뜻 단풍이 비쳤던가, 오대천에는 물안개가 피어올랐던가, 기억이 가뭇하다. 화암약수에서 들이켰던 약수 한 사발이 시원했던 것 같다. 새벽의 도로는 짙은 운무에 휩싸여 있었고, 나는 자동차 비상등을 켜고 굽이치는 길을 올랐다. 그때의 짜릿한 기분을 잊지 못해 지금 다시 그 길을 짚어가고 있다.
중앙고속도로 제천IC로 나와 올라탄 38번 국도는 영월을 지나 정선 신동 삼거리에서 함백, 예미 방향을 따른다. 여기서부터 421번 지방도. 이 길은 새비재로 향한다. 길은 S자로 비틀거린다. 스쳐 가는 산에 심겨진 나무들은 죄다 전나무며 낙우송이다. 그 사이에 언뜻언뜻 흰 자작나무숲이 섬처럼 떠 있다. 창문을 내린다. 차 속으로 들이치는 바람이 시원하다. 새비재는 일대 산세가 새가 날아가는 형상이라 해 붙은 이름이다. 전지현과 차태현이 주연한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배경무대로 ‘그녀’(전지현 분)가 ‘견우’(차태현 분)와 함께 타임캡슐을 묻었던 곳이다. 최근 들어 당시 영화에 등장했던 ‘엽기소나무’ 주변에 타임캡슐 공원이 조성되었다. 타조알처럼 생긴 캡슐에 추억의 물건들을 담아 100일, 1년, 2년, 3년 가운데 원하는 기간을 선택해 묻어 두고 나중에 열어볼 수 있다고 한다. 타임캡슐은 약 5만 8,000개가 준비돼 있으며 이 가운데 수십 개는 벌써 주인을 찾았다고 한다. 타임캡슐 공원에서 바라보는 풍광이 괜찮다. 새비재의 해발은 850m 밖에 되지 않지만 공원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1000m급 못지않다. 정선 최고봉인 두위봉(1,466m)을 비롯한 고산준봉들이 사방으로 어깨를 걸고 물결친다. 이 풍광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농사를 짓는다. 새비재는 정선의 대표적인 고랭지 배추밭. 이제 막 배추를 심은 푸른 배추밭과 수확을 끝낸 황토색 배추밭, 옥수수밭, 메밀밭 등이 어울려 패치워크 작품을 보는 것만 같다.
새비재에서 내려오면 오른쪽으로 서 있는, 노란색 칠을 한 예쁜 간이역과 만난다. 함백역이다. 1957년 3월, 영월~함백을 잇는 함백선의 개통과 함께 문을 열었다. 정선군의 첫 철도역사로 함백광업소의 엄청난 탄을 실어 나르기 위해 만들었는데 국내에서 가장 긴 나선형터널(2.6km)이 있는 곳이기도 했고 함백과 영월을 잇는 함백선의 유일한 역이기도 했다. 당시 개통식 때 주요 장관과 주미대사 등 500여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이렇게 예쁜 역이 없어질 뻔했다. 1993년 광업소가 문을 닫으면서 함백역도 그 기능을 다했고 열차여행 마니아들이나 찾는 간이역으로 겨우 존재했다. 그러다 2006년 10월 함백역이 낡았다는 이유로 허물어졌다. 사라진 함백역을 다시 지은 건 주민들이다. 탄광은 없어졌어도 삶의 터전을 떠날 수 없었던 그들에게 함백역은 열차역 그 이상의 상징이었다. 주민들은 자신의 생을 복원하듯 스스로 힘을 모아 다시 역사를 짓기로 했다. 그리고 2년이 흘러 2008년 11월 마침내 함백역은 옛 모습 그 모양으로 다시 태어났다.
정선 최고봉인
두위봉을 비롯한
고산준봉들이
어깨를 걸고
물결을 친다.
사람들도 그렇게
어깨를 맞대고
여름을, 이 삶을
산다.
제일 높은 곳에서
저 아래를
내려다본다.
지나온 삶과
앞으로의 날들이
펼쳐진다. 삶은
그렇듯 강함과
약함이 높은 곳과
낮은 곳을 오가며
춤을 추듯 계속될
것이다.
만항재,
공중정원에서
마음은 만발하다
함백역을 나와 수리재를 넘는다. 길은 뱀의 똬리처럼 굽이치며 달아난다. 오른쪽 차창으로 고원의 풍경이 펼쳐진다. 발아래 산의 능선을 거느리고 달려가는 기분이 상쾌하다. 근두운을 타고 반공을 주유(周遊)하는 손오공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다. 이 기분 때문에 드라이브를 떠난다. 수리재를 내려온 길은 정선 남면에서 38번 국도로 바뀌고 다시 고한읍에서 414번 지방도로 바뀐다. 이 길을 따라가면 정암사를 지나 만항재에 닿는다. 만항재를 넘으면 내처 영월로 갈 수도, 태백으로 갈 수도 있다.
사북과 고한을 지나면 곧 정암사다. 신라 선덕여왕 14년(645)에 자장율사가 창건했다.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국내 5대 적멸보궁① 중 하나다. 종각 뒤로 돌아가면 적멸궁이 있다. 적멸궁은 ‘부처님이 열반에 들어 항상 머물러 계시는 궁전’이라는 의미다. 법당에서 스님의 목탁소리 흘러나온다. 합장하고 적멸궁을 들여다본다. 수미단에는 불상이 없고 방석만 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까닭. 부처의 진짜 몸이 있으니 따로 상을 만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처님 진신사리는 이곳이 아닌 적멸궁 뒤편 수마노탑에 봉안되어 있다. 냇물 건너 숲으로 난 돌계단을 7~8분 정도 올라가면 만날 수 있다. 수마노탑은 마노석으로 지은 벽돌탑인데 상륜부에 청동장식을 한 7층 모전석탑이다. 여기에선 정암사의 아늑한 정경 너머로 고한이 멀리 내려다보인다.
정암사에서 만항재는 지척이다. 10여 분이면 지날 수 있는 짧은 길이지만 이번 드라이브의 하이라이트라고 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만항재가 가까워질수록 창밖의 풍경도 바뀐다. 소나무와 전나무는 사라지고 쭉쭉 뻗은 낙엽송들이 늘어난다. 훤칠한 키의 낙엽송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달리는 기분이 상쾌하기 그지없다. 북국의 어느 나라를 달리는 느낌이다. 만항재 정상은 해발 1330m. 우리나라에서 승용차로 오를 수 있는 포장도로 중 가장 높다. 구름도 쉽사리 이 고개를 넘지 못한다. 이런 까닭에 운무 속을 주행하는 듯한 기분도 맛볼 수 있다. 만항재는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석탄을 나르던 고갯길이었다. 더 옛날엔 정선의 고한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 태백의 황지를 거쳐 봉화의 춘양까지 가서 소금을 사왔다. 얼마나 험하고 먼 길이었던지 소금 한 가마를 지고 고한에 돌아오면 소금이 녹아 반 가마도 채 남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만항재 정상 이르렀다. 정상은 꽃밭이다. ‘산상의 화원’이란 이름으로 약 10만 평의 야생화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꽃들이 만발한다. 산책로도 만들어놓았으니 꼭 걸어보시길. 발길이 만항재까지 이르렀다면 내친김에 영월 쪽으로 화방재를 넘어 칠량이골의 지류 중 하나인 이끼계곡을 찾아가보자. 이렇다 할 이정표도, 가늠할 만한 지형지물도 없어 찾아가기가 까다롭지만, 화방재에서 31번 국도를 따라 상동 쪽으로 달리다가 장산 야영장을 지나 왼편에서 합수하는 작은 물길만 찾으면 된다. 물길 옆으로 좁은 숲길이 나 있는데 20m만 걸어가면 딴 세상과 만난다. 계곡이 온통 이끼로 뒤덮여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속에 들어온 것만 같다. 진초록의 이끼 바위 위에는 이제 하나둘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부디, 부디, 부디 숲길을 따라 조심조심 발길을 딛으시길. 이끼가 상하면 안 되니 말이다.
오래된 것과
새것이 공존
하는 곳 정선.
정선은 그렇게
옛것과 지금 것이
어우러져 찾아
오는 사람들을
반기고 있다
정선의 땅에
닿으면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고
푸근하다.
그곳에 머물며
이 여름 새로운
추억을 만든다.
정선 드라이브 여행 팁
★ 드라이빙 팁 / 영동고속도와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해 제천IC로 나온다. 국도 38호선을 타면 정선을 지나 신동삼거리에 이른다. 여기서 421번 지방도로 갈아타고 예미, 함백 방향으로 10여 분 가면 새비재 입구다. 타임캡슐공원(033-375-0121)까지 차가 갈 수 있다. 새비재를 내려와 421번 지방도를 타고 증산 방향으로 계속 가면 수리재를 넘어 자미원(역)에 닿는다. 수리재 넘어 정선 남면에서 38번 국도로 바꿔 타면 고한읍에 닿는데, 고한읍에서 414번 지방도로 다시 바꿔 타면 만항재로 간다. 새비재 오르는 길이 다소 험하다. 승용차라면 주의가 필요하다. 수리재 넘는 길이 가파르고 급커브 구간이 많다. 브레이크에 유의할 것. 함백산 정상까지 차로 갈 수 있다. 정선 쪽에서 만항재 정상에 닿기 직전, 왼편으로 나 있는 태백선수촌 분촌 팻말을 보고 사잇길로 접어들어 달리다가 다시 갈림길이 나오면 왼쪽 길을 택하면 된다.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 있는데 정상의 방송중계소 운영 때문에 놓인 것이다. 일출을 보기 위해 찾는 사람이 많다.
★ 정선의 맛 / 옛날 정선식 토종음식을 맛볼 수 있다. 정선 장터에 온 이들이 꼭 먹고 가는 음식이 콧등치기국수와 메밀전병, 곤드레비빔밥, 황기족발이다. 콧등치기국수는 국수 가락이 억세서 먹을 때 콧등을 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우라지에서 마포나루까지 나무를 날랐던 떼꾼들의 별식이었다. 국숫발을 굵게 눌러 내린 탓에 구불구불한 국숫발을 씹을수록 구수하고 담백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뜨거울 때 먹으면 코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하여 ‘콧등튀기’라고 불렀는데 이에서 유래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오일장 내에 따로먹자골목이 만들어져 있다. 동면집(033-562-0506), 별미집(033-562-1474), 여량집(033-563-0503) 등이 줄지어 있다.
정 선의 특산물은 황기다. 황기는 기를 보하고 면역력을 길러주며 땀을 멈추게 하고 독성 또한 제거해 주는 만병통치 약재라 했다. 황기족발은 오직 정선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음식이다. 황기를 잔뜩 넣고 삶아낸 족발을 들기름으로 반짝 윤을 낸다. 그 맛은 우리가 지금까지 먹던 족발과는 또 다른 맛이다. 썰어서 내지 않고 찢어서 내는데, 달짝지근한 맛이 입에 착착 감긴다. 황기족발은 정선읍내의 동광식당(033-563-0437)이 유명하다.
곤드레밥은 정선의 토속음식으로 밥을 지을 때 곤드레나물을 함께 넣어 쪄낸다. 나물의 향이 밴 밥에다 직접 담근 된장과 고추장, 양념간장을 넣어 비벼 먹는 맛은 봄철 뚝 떨어진 입맛을 살려놓기 충분하다. 정암사 못 미쳐 함백산돌솥밥(033-591-5564)의 곤드레돌솥밥이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