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차를 몰았다. 길은 남한강을 따라 달렸다. 가을 강이 맑아 심해보다 더 깊어진 가을 하늘을 그대로 담고 있다. 하루가 멀다고 내린 비에 티끌을 모두 씻어낸 강모래. 강섶을 보고 있노라면 바람이 몰고 오는 가을이 잡힌다. 서울에서 출발해 1시간 남짓 달렸을까. 이천에 닿자 공기는 한결 가벼워지고 상쾌해졌다. 비로소 서울을 벗어났음을 실감한다.
마음까지
넉넉해지는 밥상
배가 고프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따뜻한 쌀밥이 그립다. 그러고 보니 이천하면 쌀로 유명하다. 이천은 예로부터 산이 많고 물이 좋아 ‘낙토’(樂土)라 불렸다. 이 기름진 땅에서 난 이천 쌀은 예로부터 임금의 밥상에 올랐다. 이 쌀로 밥을 지으면 밥이 희어서 마치 청백색 도자기 같았다고 하는데 너무 차지기 때문에 처음 먹어 본 사람은 설사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천에서는 작은 식당조차 서울서 귀한 대접 받는 임금님표 이천쌀을 사용해 밥을 짓는다. 반찬도 20가지 이상으로 푸짐하게 낸다. 신둔 도예촌 일대에 ‘이천쌀밥’이라는 입간판을 단 음식점이 20여 곳 몰려 있다. 딱히 어디랄 것이 없이 어느 이천쌀밥집을 들어가도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쌀밥과 함께 20여 가지의 반찬들이 가득한 상차림을 받을 수 있다. 밥을 주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밥상이 나왔다. 말 그대로 상다리가 부러질 것만 같다. 반찬이 서른 가지가 넘게 올라 있다. 도대체 어느 것부터 젓가락을 댄단 말인가. 연근조림, 시금치 무침, 백김치, 콩자반, 깻잎무침, 조개젓갈, 굴비, 간장게장 그리고 돼지고기 보쌈까지. 밥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된장찌개는 아직 보글보글 끓고 있다. 멸치조림을 한 젓가락 집어 입으로 가져가 본다. 그래, 이 맛이다. 자극적이지 않고 수더분한 맛이지만 정말 맛있는 맛. 어릴 때 어머니가 차려주시던 밥상을 받은 느낌이다. 아이들도 숟가락, 젓가락질에 여념이 없다. 어느새 밥그릇이 깨끗하게 비워졌다. 반찬 그릇도 죄다 빈 그릇이 됐다. 배도 부르고 마음도 부르다. 오랜만에 밥다운 밥을 먹은 것 같다. 자, 이제 슬슬 이천 여행에 나서 보자.
이천에는 음식 말고도 손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또 있다. 바로 이천 도자기다. 예로부터 수많은 도공이 이천 땅에서 난 흙으로 도자기를 빚었다. 이천에는 도자기 원료가 되는 고령토와 가마 불을 지피는 데 쓰이는 화목이 넉넉한 탓에 해방 이후부터 가마터가 한둘씩 열렸다. 이천의 도자기 역사는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신둔면과 백사면 일대에서 발견된 삼국시대 유적을 통해 이미 청동기시대부터 이곳에서 토기 제작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기록에도 이천 지역의 주요 특산품이 도자기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중기 이천 도자기는 잠시 쇠퇴기를 맞는데 경기도 광주에 왕실의 도자기를 전담해 생산하는 사옹원 분원이 들어서면서 뛰어난 도공들을 이천 지역에서 징발해 갔기 때문이다. 이후 이천의 도자기는 쇠퇴하고 대중적인 옹기 제작이 번성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부터 이천지역 도요①의 선구자인 해강 선생 같은 이들이 수광리 등지에 자리를 잡으면서 이천이 우리나라 현대 도요의 산실로 다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순백의 도자기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깨끗해진다.
도자기 한 점 들여
놓고 싶은 계절이다.
눈을 즐겁게 하는
형형색색의 도자기들
이천 도자기 여행의 출발점은 설봉공원이다. 설봉호수를 품은 아름다운 호수공원이다. 공원을 한바퀴 돌아볼 수 있는 1km의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80m까지 치솟는 분수도 볼거리. 호수 주변에는 세계 각국 유명 작가들의 조각품이 전시돼 있고 야외에는 전통 도자가마와 다례시연장, 장독대 등이 있다. 설봉공원은 세계도자비엔날레가 열리는 주무대기도 하다. 설봉공원 내에 세계도자센터가 있다. 공모전에 입상한 세계 최고의 현대 도자 작품들을 상설 전시하는 곳이다. 꼭 한번 들러볼 만하다. 센터 내에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청자나 백자의 도자기의 전통적인 형식을 깨는 작품들이 많다. 옛날의 정형화된 형태에서 벗어나 다양한 기법과 색채로 만들어진 도자를 보다 보면 도자는 입체 예술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도자 예술에 문외한인 탐방객들이나 어린아이들에게도 흥미로운 곳이다. 설봉공원에서 가까운 곳에 설봉서원이 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진 것을 130여 년 만에 복원한 것이다. 대성전과 동·서재, 내·외상문 등 건물 10채를 갖추고 있다.
해강도자미술관도 빼놓지 말아야 한다. ‘고 해강 유근형(1894~1993)’ 선생과 그의 아들인 이대(二代) 해강 유광열이 설립했다. 해강 선생은 1911년부터 고려청자의 재현을 위해 생을 바친 분이다. 2대에 걸친 고려청자의 복원을 위한 결과 ‘도자기공예 대한민국 명장’으로 지정받았다. 세계도자센터의 현대적 예술 감각과는 다른 청자, 백자, 분청사기 등 전통 도자기들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다. 도자는 이천을 대표하는 문화이자 산업이기도 하다. 300여 도자기 생산업체와 100여 도자기 전시판매장이 자리 잡은 데다 도예 인력만 800여 명에 달하는 이천은 도자기 연간 매출액이 160억 원대에 이르고 있다. 도예공방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은 사음동과 수광리 일대. 예로부터 사기막골로 불렸는데 현재 300개가 넘는 도예업체가 있다. 도예공방 곳곳에서는 아이들과 체험 학습을 해볼 수도 있다. 이왕 이천 나들이에 나선 김에 몇 가지 생활도자들을 사면 어떨까. 이곳에서는 높이 1m에 이르는 거대한 청자, 백자, 분청사기 등 전통 도자기와 옹기 등 생활도자기를 싼값에 만날 수 있다. 찻잔이나 머그잔, 액세서리 등의 소품은 백화점 가격에 비해 50% 이상 싸게 구입할 수 있다.
멀리 가지 않아도 여행은
여행 자체만으로도 좋다.
경기도 이천으로의
힐링여행 떠나봄이 어떨지.
마음까지
느긋해지는 온천
이천은 예로부터 ‘온천배미’라 불릴 정도로 온천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근처에 농사를 짓던 한 농부가 사철 솟아나는 더운 샘물을 이상히 여기고 이 물에 세수를 했더니 오래 앓았던 눈병이 완치됐다. 이후 안질과 피부병 환자들이 각지에서 찾아와 이천 온천의 효험을 경험하게 되면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현재 이천에는 테르메덴을 비롯해 미란다호텔 온천, 설봉호텔 온천 등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국내 대부분의 온천이 단순히 온천욕만 즐기고 나오던 일본식 온천인데 반해 테르메덴은 독일식 온천이다.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독일식 온천은 일본식 온천과는 달리 평균 30만 평방미터 이상의 광활한 부지에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것이 특징. 온천욕뿐 아니라 삼림욕, 각종 스포츠를 온천욕과 함께 즐길 수 있다. 테르메덴은 독일식 온천을 재현했다. 로비를 지나 2층에 오르면 대욕장이 나오는데, 레몬, 허브, 녹차 등 다양한 아이템탕과 사우나 시설이 갖춰져 있다. 대욕장은 동시 3,000명이 입욕할 수 있을 정도로 넓으며 레몬, 허브, 녹차 등 아이템탕과 한증막, 삼림욕장 등 다양한 시설이 들어서 있다. 마음에 여유가 필요할 때, 맛있는 쌀밥 한그릇 먹고 도자여행 후 온천으로 마무리하는 여행 권해본다.
각주 ① 도요(陶窯) : 도기를 굽는 가마
이천 여행정보
★ 가는 길 /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서이천 IC로 나오거나 영동고속도로에서 이천 IC로 빠진 뒤 이천 방향 3번 국도를 이용하면 설봉공원에 닿는다. 해강도자미술관과 도예촌 등도 설봉공원과 가깝다. 이정표가 잘 되어 있어 길 찾는데 어려움은 없다. 서울에서 경기 광주읍에 이르는 3번 국도를 이용해도 된다. 테르메덴(031-645-2000)은 영동고속도로 이천 IC로 나와 안성, 설성 방면으로 약 15km, 중부고속도로 서이천 IC로 나와 안성, 설성 방면으로 약 20km 직진하면 된다.
★ 잠잘 곳 / 호텔 미란다(031-633-2001)는 숙박과 온천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곳. 도자펜션(031-638-8359)은 도예 체험과 숙박을 같이 할 수 있는 곳. 도예가인 최한규 작가가 운영하며 단순한 펜션의 개념이 아닌 문화공간으로 활용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초가집으로 지어진 펜션은 옛 정취가 물씬 풍긴다.
★ 먹을 곳 / 도예촌 주변에 쌀밥집이 많다. 고미정(031-634-4811), 이천쌀밥집(031-634-4813), 청목(031-634-5414), 정일품(031-631-1188), 임금님 쌀밥집(031-632-3646) 등이 유명하다. 청학동한정식(031-631-8187)은 허영만의 ‘식객’에 소개된 곳으로 조미료를 쓰지 않는 반찬이 담백하면서도 맛깔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