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타고 싶다 / 저 가을 단풍이 / 붉은 물 뚝뚝 흘리며 / 제 몸을 태우며 / 사랑하듯 / 나도 가을 나무가 되어 / 봄 여름 가꾸어온 그리움일랑 / 외로움을 기름불로 하여…’
(신경인 시인의 ‘단풍을 바라보며’)
어느새 남도에 가을이 한창이다. 나무들은 앞다퉈 제 몸을 태워 산을 밝힌다. 꽃은 아무리 고와도 온 산을 물들이지 못했는데… 단풍은 시인의 시구처럼 산그늘에 앉은 여행자들의 가슴에도 붉은 기운을 댕겨놓는다. 선운사에도 단풍이 들었다. 일주문에서 도솔천 따라 도솔암 오르는 길이 온통 붉은색이다.
온몸에 붉은 물이 들 것 같은 길
선운사. 대웅전 뒷산을 뒤덮은 동백으로 기억되는 절. 미당 서정주가 이 동백의 처연함에 반해 읊조린 멋진 시 한 수는 웬만한 사람은 기억하고 있을 테다. 게다가 도솔암 가는 길 역시도 언제 걸어도 좋으니, 시인 정찬주는 이 길을 두고 ‘인간세상에서 하늘로 가는 기분’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선운사에 간다. 가을 끝 무렵, 화려한 단풍은 선운산을 물들이고 선운산에 들어앉은 선운사의 기와를 덮고 또 덮고 있다. 선운사에 도착한 순간, 입구부터 눈이 환해진다. 입장권을 끊고 절 경내에 들어서니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붉은색, 붉은색뿐이다. 선운사를 찾은 여행객들은 초입부터 ‘예쁘다. 예쁘다’를 연발하며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미당 시비를 지나 절 안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단풍숲이 짙어진다. 바람이라도 불면 단풍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머리 위 어깨 위로 붉고 노란 단풍이 쏟아진다. 온몸에 붉은 물이 드는 것만 같다. 10월 하순이면 선운사는 단풍으로 물들기 시작해 11월 초중순 절정에 달한다. 입구에서 도솔암으로 이어지는 약 2km의 숲길은 거대한 단풍터널을 이룬다. 선운사의 가장 큰 매력은 선운사 대웅전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점이다. 끝은 도솔암 마애불이다. 선운사 앞에서 흙길을 밟아 40~50분 동안 긴긴 오솔길을 따라 걸어야 한다.
먼저 선운사를 돌아본다. 평지사찰이지만 어수선해 보이지 않는다. 강당과 대웅전, 그리고 여러 법당이 한 마당에 깃들어 있다. 법당이 너무 조밀하게 배치돼 있지도, 어수선하게 펼쳐져 있지도 않다. 선운사는 백제 위덕왕 24년(577년) 검단선사가 창건했다. 당시 89개의 절집에 3,000명이 넘는 승려가 수도했다는 대찰이었다. 지금도 전북 지역에서 김제의 금산사와 함께 가장 크다. 보물 5점, 천연기념물 3점, 전북 유형문화재 9점이 있다. 사람들은 절 마당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고 천천히 마당을 거닌다. 그리고는 절 안에 있는 찻집에서 맑은 녹차 한잔을 나눈다. 가을 햇빛이 쏟아지는 절 마당으로 오후의 풍경소리와 여행객들의 웃음 소리가 내려앉는다. 자, 이제 선운사에서 나와 도솔암 가는 길에 오를 차례다. 이 길은 참 좋고 편안하다. 길은 높낮이가 뚜렷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완만하다. 걷기에 알맞다. 길 양 옆으로는 꼬불꼬불한 활엽수들이 고만고만한 모습으로 빼곡하고, 흙길은 오랜 세월 사람들의 발길에 다져져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에서 손자 손녀까지 온 가족이 가족 운동회라도 하면 좋을 정도로 평탄한 길이다. 여행객들은 단풍 숲을 거닐고 사진 작가들은 단풍을 찍느라 부산을 떤다. 오색 창연한 단풍 나무 아래에는 군데 군데 쉼터가 있다. 가는 길 중간중간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도솔천엔 지천으로 단풍이 떨어져 내려 물도 사람도 단풍도 함께 붉은 ‘삼홍’ (三紅)이다.
온통 붉은색뿐. 사람들은
붉은색에 취해 계절을
느끼고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낀다.
참 좋은 계절, 가을이다.
암봉 속 작은 꽃처럼 들어앉은 내원궁
이 길을 따라가면 도솔암에 닿는다. 도솔이란 무슨 뜻인가? 불국토다. 기독교로 치면 천국이다. 그러니 도솔암으로 가는 길은 천국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겠다. 대부분의 절이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를 부처의 영역으로 삼았다면 선운사는 산 전체가 부처의 길이고 땅인 셈이다. 도솔암에 닿았다. 정확한 이름은 도솔천 내원궁. 벼랑 끝에 터를 겨우 닦아 만든 작은 암자다. 108배에 열중인 사람들 사이에서 스님이 경을 읽고 있다. 도솔천은 불교 성역 수미산 꼭대기의 천계(天界)요, 내원궁은 미래불인 미륵불이 머무는 거처다. 세파에 지친 민중들을 달래주는 존재. 19세기 말, 신천지를 꿈꿨던 동학 농민들도 이 도솔천과 인연이 닿아 있다. 바로 거대한 마애불이다. 이 부처님 배꼽에 있는 복장감실에 세상을 바꿀 비결과 벼락살이 숨겨져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여 1820년, 새로 부임한 전라감사 이서구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감실을 뜯고 책을 열었는데, 책 첫 문장이 이러했다. “이서구가 열어본다”. 기겁한 이서구 머리 위로 벼락이 쳤고, 이서구는 책을 되던져 놓고 도망갔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1892년, “이서구가 벼락을 맞았으니 안전하다”는 판단과 함께 동학도들이 다시 감실을 열어 책을 가져갔다. 이 일로 동학도 수백 명이 문초를 당하고 고문을 당했다. 뭐라 적혀 있었는지 알길 없지만, 세상 바꾸려는 의지가 그리 강했고, 그 일이 미륵불이 사는 도솔천에서 벌어졌다. 불상 앞에서 올려보니 부처님, 아무 말 않고 참선 중이다. “이게 무엇인고!”
내원궁에서 산 쪽을 보면 천마봉이 우뚝 서 있다. 한 동안 땀을 식힌 후 다시 천마봉으로 향한다. 능선 따라 저벅저벅 걷는다. 가는 길에 용문굴이 있다. 대장금에서 장금이 엄마가 죽은 곳이다. 돌무덤이 남아 있다. 굴 자체가 성문처럼 웅장하다. 그리고 능선. 까마득하게 멀어 보이던 낙조대가 나온다. 쫓겨난 최상궁이 떨어져 죽은 곳이다. 예까지만 가도 그저 좋건만, 또 아무렇지도 않게 길을 이으니 천마봉 정상이다. 천마봉에 오르면 내원궁, 그 작은 암자는 거대한 암봉 무리 한가운데에 꽃처럼 박혀 있다. 작은 절집 하나가 아니라, 그 봉우리 전체를 가지고 있는 거대한 공간이다. 이서구가 벼락살을 맞은, 동학꾼들이 비결을 빼내간 부처님이 오른편 아래에 자그마하게 걸려 있다. 한 동안 서성이다 선운사로 내려가는 길을 잡는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붉고 노란 단풍과 마주친다. 단풍에 취해 내려오는 길이 마냥 더디고 또 더디다. 선운사 앞 마당을 또 얼마나 서성여야 할지 모를 일이다.
천국으로 가는 길을
걷는다. 아득히 먼 옛날
이야기들이 남아있다.
길을 걸으며 하나둘
옛이야기를 꺼내보는
이 길이 더없이 좋다.
유화처럼 명징한 백양사의 가을
전남 장성 땅 백양사. 선운사를 지나 단풍은 백양사로 간다. 장성호가 물안개를 피워올릴 무렵이면 백양사로 가는 길의 가로수들은 붉은 홍조를 띤다. 백양사는 내장산과 같은 뿌리를 둔 백암산에 자리 잡고 있다. 내장산은 두말할 것 없는 국내 최고의 단풍 명산. 장성쪽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산을 백암산이라 하고 정읍 내장사 쪽에 있는 산을 내장산이라 부른다. 백양사는 근대 종정 큰스님만 5명을 배출한 명찰이다. 백제 무왕 때 세워졌다고 전해지며 본래 이름은 백암사였다. 조선 선조 때 명칭이 백양사로 바뀌었는데 사연은 이렇다. 환양선사가 영천암에서 금강경을 설법하는데 법회 3일째 되던 날 하얀 양이 내려와 스님의 설법을 들었다. 그 양은 법회 7일째가 되는 날 ‘나는 천상에서 죄를 짓고 양으로 변했는데 이제 스님의 설법을 듣고 다시 환생해 천국으로 가게 되었다’고 절을 했다고 한다. 그 이후 절 이름을 백양사라 고쳐 불렀다.
백양사 단풍은 ‘작은 잎 단풍’, 흔히들 이야기하는 ‘애기 단풍’이다. 크기는 작게는 어른 엄지손톱, 큰 것은 어린아이 손바닥 정도다. 이 애기단풍에 붉은빛이 들면 색깔이 곱다. 바람이 불면 어린아이가 손을 흔들듯 단풍나무 가지가 흔들리며 단풍잎을 우수수 쏟는다. 백양사 들머리에서 약 1,5km가 이어지는 산책로와 매표소에서 천진암까지 이어지는 500미터 길이의 오솔길에 애기단풍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다. 고려말 학자 목은 이색은 “왼쪽 물에 걸터앉아 오른쪽 물을 굽어보니 누각의 그림자와 물빛이 위아래로 서로 비치어 참으로 좋은 경치”라고 했다. 백양사로 들어가기 전 쌍계루 앞에 있는 개울을 두고 한 말이다. 이색의 찬사대로 개울은 쌍계루를 담고, 단풍의 붉은빛을 담고 가을의 짙푸른 하늘을 오롯이 담고서 물결에 흔들린다. 그 물에 비치는 가을 풍경이 한폭의 수묵채색화 같기도 하고 유화 같기도 하다. 백양사 단풍만 눈에 넣고 가기는 아쉽다. 장성 땅에서 단풍 못지않게 붉은 것이 감이다. 장성은 감의 고장으로도 유명하다. 인근 가인마을과 중평마을에서 감이 많이 난다. 지금 감나무에는 주렁주렁 감들이 매달려 있다. 백양사 천진암 추녀 끝의 풍경소리가 맑다. 곧 곶감을 파는 노인들이 천진암 가는 길에 앉을 것이고 비구니들이 태우는 낙엽 냄새가 산사에 그윽하게 퍼질 것이다. 그러면 백양사는 완연한 가을 속에 묻힐 것이다.
백양사 애기단풍에
사람들의 시선이 멈춘다.
바람에 애기단풍잎
한잎 두잎 떨어지고
그러고 나면 계절은
더 깊어질 테다.
선운사, 백양사 단풍여행 팁
★ 가는 길 /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사IC로 나온다. 이정표가 잘 되어 있어 길을 헤맬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백양사는 호남고속도로 백양사 IC로 나오면 된다.
★ 잠잘 곳 / 선운사 앞에 선운산 관광호텔(063-561-3377)과 선운사 유스호스텔(063-561-3333)이 있다. 백양사 입구에 백양관광호텔(061-392-0651), 백운각(061-392-7531), 은혜파크(061-392-7200), 백양산장(061-392-7500) 등 모텔과 여관이 즐비하다.
★ 먹을 곳 / 선운사 입구에 풍천장어집이 많다. 갯벌에 실장어를 풀어놓고 최소 6개월 동안 자연 방사시켰다가 잡는다. 양념장어도 있고 소금구이도 있다. 연기식당이 풍천 장어를 잘한다. 양념장어를 구워 1인분씩 담아 내준다. 백양사 초입 별궁민속식당(061-392-7401)의 산채정식이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