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남양우체국 김충규 집배원이 소개하는 ‘화성 어섬(송산면 고포리)’
포도가 익는 바닷가 마을
봄부터 가을까지 어섬에서는 경비행기, 초경량비행기를 직접 몰거나 체험하는 사람으로 북적인다.
어섬의 간척호수는 가끔씩 팔뚝만 한 붕어가 올라오는 수도권 최고의 얼음낚시터가 되었다.
화성 어섬의 풍경은 달랐다. 분지에, 혹은 낮은 산기슭에 자리 잡은 보통의 농촌 마을이 아니었다. 어섬은 들판 한가운데에 바짝 엎드린 언덕 마을이었다. 가장 높은 곳에 교회 하나가 우뚝 솟아 마치 하얀 등대처럼 보였다. 그 교회는 포도밭에 둘러싸여 있었고, 그 포도밭은 또 몇 채의 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한때 섬이었던 마을이 독특한 풍경을 선사하고 있었다. 시화방조제가 완공된 것은 1994년이다.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인해 소문난 어장은 사라졌지만 그 대신 여의도 면적의 60배에 달하는 간척지가 생겼다. 자연에 기대어 살던 사람들의 삶도 크게 달라졌다. 바다를 찾아 많은 사람들이 떠났고 아직 남아 있는 원주민은 30명 정도다. 두어 집을 제외하면 대부분 혼자 사는 노인들이다. 젊은 날 고깃배를 탔던 그들은 이제 포도를 가꾸고 있었다. 어섬으로 진입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송산포도로의 양쪽은 모두 드넓은 포도원이었다. 풍부한 일조량과 해풍, 토양은 다행히 고소득 작물인 포도 농사에 적합하다. 포도 농사로 바쁜 시기는 4월부터 10월까지다. 포도알이 영글기 시작하는 5월에는 송이마다 봉투를 씌우고 9월이 되면 정성껏 수확해 도시로 실어 보낸다. 다시 봄이 올 때까지 긴 겨울의 대부분을 보내는 장소는 마을회관이다. 함께 밥도 해서 먹고, 마을의 대소사를 논의하며 이웃사촌이 아닌 가족으로 살고 있다. 손자들 재롱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던 명절이 지나고 어느 때보다 허전함이 커진 노인들은 늦은 조반을 물리자마자 마을회관에 모여들었다. 자식과 손자까지 스물여섯 명이 모두 다녀갔다는 김영자 할머니(78세)가 따스한 곳에 앉으라며 자리를 내주셨다. 끼니때도 아닌데 ‘밥은 먹었느냐’고 걱정하시며 커피까지 타주셨다. 열일곱에 시집와 섬에서 여섯 자녀를 낳았다는 할머니는 ‘살기는 불편했다’면서도 ‘옛날이 좋았다’고 회상했다. 그때 직접 따먹었던 굴이며 생선을 지금은 모두 사강리의 어시장까지 나가서 사와야 한다. 마을에 식당 하나, 구멍가게 하나, 작은 의원 하나 없으니 이래저래 시내 나갈 일이 많은 편이다. 전에는 육지에 나가기 위해 하루 다섯 번 뜨는 배를 놓치지 말아야 했지만 지금은 하루 다섯 번 들어오는 노란 버스의 때를 잘 맞추어야 한다.
겨울 해가 짧으니 심심풀이 화투 몇 판만으로도 벌써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서너 시간 잘 놀았던 판돈 몇 천원은 고스란히 마을회관 공동경비로 모아진다. 때마다 십시일반으로 내놓은 귤 한 박스, 쌀 한가마 등의 ‘기부자’ 리스트가 마을회관 거실에 ‘방’으로 붙어 있었다. 마실 나갔다가 막버스를 타고 돌아온 할머니들이 집으로 가는 대신 곧장 마을회관으로 들어섰다. 커피를 마시고 일어서니 이장님 계실 때 다시 오라며 손을 흔들어 주셨다.
레저족들의 조용한 은신처
섬의 북쪽으로 차를 돌렸다. 간척지의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다. 억새가 서로를 덮어주며 비스듬히 누워있을 뿐 지평선과 수평선이 맞닿는 곳까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공터에는 노랗고 빨간 경비행기 몇 대가 얼어붙어 있었다. 겨울에는 주말에만 비행이 있다고 했지만 늦은 오후가 되자 어디에선가 빨간 경비행기 하나가 잠시 나타났다 사라졌다. 봄부터 가을까지 어섬의 하늘에서는 경비행기의 출몰이 일상적인 일이라고 했다. 아직 쓰임을 찾지 못한 간척지가 넉넉한 비행장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활주로의 바퀴 자국들이 분주했던 지난 시즌을 보여주었다. 날이 따스해지면 오프로드를 즐기는 마니아, 시화호 제방을 따라 달려온 자전거 여행자, 솔숲에서 이륙하는 패러글라이딩 동호회원까지 이색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이 어섬을 찾아온다. 넓은 간척지와 비포장도로가 그들의 무대가 되어주고, 참견하는 사람도 만류하는 사람도 없기에 그들에겐 일종의 ‘해방구’인 셈이다. 섬의 남쪽에는 외지 사람들이 들어와서 세운 10여 개의 대형 펜션들이 모여 있다. 학생이나 기업 연수 단체들, 레포츠족이 주로 찾는다고 했다. 작은 어섬은 그렇게 두 개의 세상으로 나뉘어 있었다. 겨울이면 그 모든 활동들이 동면에 들어가지만 그렇다고 발길이 뚝 끊기는 것은 아니다. 한겨울에도 가끔 외지 사람들이 찾아와 하늘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들이 찾는 것은 새다. 시화호 일대의 갈대습지는 희귀조류 관찰지로 유명하다. 150여 종 15만 마리의 철새와 텃새가머무는 곳이다. 그런 새들만 좇아 전국을 돈다는 아마추어 조류사진가와 우연히 마주쳤다. 600mm 망원렌즈를 단 그의 카메라가 오늘 겨누고 싶은 것은 황갈색 목털이 도도해 보이는 국제적 희귀조류 ‘알락해오라기’라고 했다. 2007년 안산의 시화호갈대습지 공원에서 관찰된 적이 있다. 서울에서 멀지 않기에 화성 일대는 그가 자주 찾는 촬영 여행지 중 하나라고 했다. 인기척이 거슬렸는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갈대숲 사이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더니 수백 마리 오리 떼가 일제히 날아올랐다. 호수는 물론 바닷물도 일찌감치 얼어버린 지난 겨울이 새들에게는 더욱 혹독했을 것이다. 그러나 얼음낚시꾼들은 그런 추위가 오히려 반가운 듯했다. 두툼하게 얼어버린 호수에 구멍을 뚫고 하루 종일 기다리는 일도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이 근처의 간척호수는 가끔 팔뚝만 한 붕어가 올라오는 수도권 최고의 얼음낚시터가 되었다. 빙판 위에서 겨울날을 보내는 강태공들의 검은 실루엣은 마치 겨울철새의 무리처럼 보였다.
오후의 섬, 긴 그림자
경기 남양우체국 소속의 김충규 집배원이 어섬을 찾는 시간은 매일 오후 3~4시 사이다. 그래서 그에게 어섬은 오후의 섬이다. 택배기사들도 들어오기 꺼려할 만큼 오지라면 오지인 어섬에 대해서 김충규 집배원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도 드물다. 그의 고향이 바로 송산면이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까지 갯벌에서 ‘망둥어’를 잡았던 기억이 있고 담당 지역 내에 친척들도 살고 있다. 지금의 아내도 집배원 일을 시작하고 난 뒤 매일 집을 찾아가는 인연으로 맺어졌다. 그녀가 좋아하는 잡지를 몰래 구독해 일년 동안 익명으로 직접 전달해주었던 로맨틱한 구애는 집배원만의 특권이었다. 그는 앞으로 혹시 자신의 담당 지역이 바뀌게 되더라도 어섬의 우편배달에 차질이 없도록 벌써부터 후임자 걱정을 하고 있었다. 어섬은 별다른 일 없이 항상 조용할 것만 같은 농촌이지만 가끔은 색다른 일이 벌어진다. 큰 빌딩 하나 없는 주변 환경 때문에 어섬 인근은 영화나 드라마 촬영도 잦은 편이다.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남자주인공 김주원(현빈)이 혼수상태의 연인 길라임(하지원)을 오픈카에 태우고 번개 치는 도로로 질주하는 장면도 근처에서 촬영한 것이다. 때로는 씁쓸한 현장도 보게 된다. 어섬에서 멀지 않는 형도 역시 육지가 되어버린 섬인데 신도시 주거단지 조성 계획이 발표되면서 투기 열풍이 불어 닥쳐 30여 구밖에 되지 않았던 가구수가 한 때 200개로 치솟기도 했었다. 지금은 위장전입이 모두 정리되고 보상이 끝나서 섬은 텅텅 비어버렸다. 개발을 이유로 파헤쳐지고 있는 상황은 어섬이나 형도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느 서해안과 마찬가지로 어섬의 석양 역시 볼 때마다 그림이다.
명절이 끝난 후 마음이 허전한 어르신 몇이 마을회관에 모였다.
몇 시간을 신나게 놀아도 몇 천 원이 고작인 판돈이지만 그 돈은 고스란히 마을회관 공동경비로 모아진다.
마실 나갔다가 막버스를 타고 돌아온 할머니들.
멀리 시화방조제 너머 송도국제도시의 마천루들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것이 어쩌면 어섬과 형도의 미래일지 모르지만 지금의 어섬은 다행히 포도가 익어가는 마을이다. 김충규 집배원은 포도송이에 봉지를 씌우기 전인 5월의 어섬이 가장 아름답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월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그를 보내고 다시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나니 해가 눕기 시작했다. 바로 앞에 있는 큰 섬에 가로막혀 이글거리는 해가 바다로 떨어지는 낙조의 장관은 펼쳐지지 않았다. 해는 대부도의 능선으로 순식간에 숨어들었다. 하지만 어섬 일몰의 진면목은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시야가 닿는 곳에 그 어떤 인공조명도 없는 풍경. 오로지 해만이 이 땅을 비추는 ‘빛’이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완전한 암흑에 갇히기 전에 차를 돌려 나왔다. 대부도의 구불구불한 실루엣을 따라 해가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며 오랫동안 손을 흔들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