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셔널트러스트 선정자연 문화 유산
남평우체국 김진만 집배원이 소개하는 ‘나주 도래마을 옛집’
길이 닦이고 있었다. 얼어있던 땅이 녹으면서 파헤쳐진 자리는 질퍽해져 있었다. 놓인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솟대형 가로등이 공사 중 표지판처럼 서 있었다. 나주 시내에서 동남쪽으로 10km 이상 떨어져 있는 나주 다도면 풍산리의 도래마을은 오래된 한옥에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전통마을이다. 고려시대에는 남평 문씨가, 조선 초기에는 강화 최씨가 많이 살았지만 조선 중종 이후 풍산 홍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 되어 지금도 149가구 중 65%가 풍산 홍씨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전남지부의 관리팀장 김현숙 씨가 안내를 맡아주었다. 마을 입구 도로가 포장될 예정이라 한 주만 늦게 왔으면 돌아다니기가 불편했을 것이라고 했다.
홍기창가옥(洪起昌家屋)은 겉은 허술해도 안채만큼은 ‘남도 부잣집’의 당당한 기풍을 간직하고 있었다. 3년 동안 영광 앞 바다에 담가 놓았던 비자나무로 세운 기둥은 멀리서 보아도 독특한 문양이 선명했다. 영화 촬영지나 패션 화보 촬영지로 가끔 사용되는 곳이다. 홍기헌가옥(洪起憲家屋, 중요민속자료 제165호)은 대문채, 사랑채, 안채가 일직선을 이루며 안채를 완전히 숨기고 있었다. 근대 한옥으로 1790년대 세워진 사랑채는 누마루가 너무 사치스럽다는 비난을 사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1929년에 세워진 대문채는 사랑채를 위장이라도 하듯 소박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세워졌다는 안채로 들어가자 그 자랑하고 싶었던 ‘부(富)’가 다시 보였다. 마지막 순례지 홍기응가옥(洪起憲家屋, 중요민속자료 제151호)에 들어가자 안채에서 부자가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낯선 손님의 출현에도 불편한 기색을 비추지 않고 사시사철 대문도 잠그지 않는 집이다. 대문의 바깥쪽에는 발을 딛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은 가로대들이 붙어 있고 위쪽은 빈 공간인데, 가난한 이들이 몰래 들어와서 쌀 됫박이라도 퍼갈 수 있게 눈감아준 양반가의 마음 씀씀이였다고 한다. 지친 다리를 쉴 겸 툇마루에 걸터앉으니 김현숙 팀장이 뜰 구석의 홍매화를 가리켰다. 꽃이 피면 매화꽃차를 끊이는데 향기가 진하다고 했다.
동유(同遊)해서 좋은 옛집 (재)내셔널트러스트가 운영하는 ‘나주 도래마을 옛집’은 1936년에 지어진 가옥으로 세심한 복원을 거쳐 지금은 새집처럼 튼튼해졌다. 조촐한 대문채를 들어서면 바로 마당이 나오고 왼편에 잘 생긴 안채가 겸손하게 앉아 있다. 마당 우측 깊숙이 자리 잡은 별당채는 신축 한옥으로, 손님을 위한 다목적 공간이다. 1936년에 지어진 원래의 집은 공간 이용에 따라 칸살이를 자유롭게 배열한 19세기 근대 한옥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사랑채를 따로 두지 않고 안채와 붙어 있지만 사랑마루에 문을 닫아 공간을 구분하는 지혜도 보인다. 그런 집이 헐릴 위험에 처하자 (재)내셔널트러스트가 2006년 구입했고, 2009년 3월에 제2호 시민문화유산으로 오픈했다. 그 동안 (재)한국내셔널 트러스트가 시민들의 후원금으로 매입한 시민문화유산으로는 전 국립박물관장이자 미술 사학자인 고(故) 혜곡 최순우 선생이 남긴 옛집(서울 성북동, 등록문화재 제268호)과 테라코타와 건칠 작품으로 유명한 조각가 고(故) 권진규 선생의 아틀리에(서울 동선동, 등록문화재 제134호)가 있다.
나주 도래마을 옛집은 누구나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며 숙박(유료)을 할 경우에는 아침식사로 흑임자죽과 유기농 채소로 만든 나물을 1인용 나주 소반에 차려 준다. 시민과 지역 전문가를 위한 문화강좌 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으며 전통 음식 체험도 진행될 예정이다.
도래마을에 15년째 출입하고 있는 남평우체국 김진만 집배원은 도래마을에 올 때마다 마음이 차분해진다고 말했다.
나주 도래마을 옛집의 경우는 2010년 10월부터 사회적 기업으로 인증 받아 노동부의 지원을 받는 대신 ‘기업’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경영 수익을 창출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커진 상태다. 그러나 중요한 문화 자원을 시민에게 돌려준다는 정신은 굳건하다. 누구나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며 숙박(유료)을 할 경우에는 아침식사로 흑임자죽과 유기농 채소로 만든 나물을 1인용 나주 소반에 차려 준다. 한옥 건축 교육 강좌 등 시민과 지역 전문가를 위한 문화강좌 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다. 남도의 대표적인 향토과자로 임금님에게 진상되기도 했던 동아전과 만들기 등의 전통 음식 체험도 진행될 예정이라고 했다.
동아전과 명인인 안송자 여사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 홍기헌 가옥을 둘러보고 다시 옛집으로 돌아왔을 때 바로 그 동아전과가 메밀차와 함께 등장했다. 별당 마루에 앉아 천천히 차를 마시는 시간. 동과(冬瓜)라고도 하는 ‘동아’는 겨울에 두고 쓰는 커다란 열매로 박속과 비슷한 식감을 지니고 있으며 나물, 물김치, 장아찌 등으로 먹는다. 그런 동아로 전과를 만드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우선 꼬막 껍질을 불에 세 번 구운 후 곱게 빻아 사회가루를 만들어야 한다. 한입 크기로 썬 동아에 그 사회가루를 듬뿍 묻혀 24시간 동안 숙성시켜야 한다. 숙성이 끝난 동아를 깨끗이 씻어서 물과 엿을 넣고 푹 고면 드디어 달달하고 아삭한 전과가 완성된다. 동아는 그냥 잼으로 만들어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데, 옛집에서 예쁜 단지에 담아 판매 중이었다.
계은정 오솔길을 따라
마을 뒤편의 계은정(溪隱亭)으로 올라가니 마을의 뒤태가 드러났다. 계은(溪隱) 홍대식이 아침, 저녁으로 즐겨 찾았던 장소에 자손들이 세운 것이다. 정자 밑 인공연못은 물이 많이 빠져 있었다. 산길로 올라가면 감투봉을 오르는 40분 산책 코스, 석산을 오르는 2시간 30분의 등산 코스도 나온다. 마을을 조금 어수선하게 만든 한옥 마을 정비 사업은 70여억 원이 투자되는 것으로 올해 안으로 마무리될 예정이라고 했다. 지중화 사업은 이미 끝나서 전봇대가 모두 사라졌고 마을 입구 연못 확장공사가 거의 완성단계였다. 연못 바로 뒤에는 마을의 중심 마당 역할을 하는 양벽정(樣碧亭)이 있다. 1586년 홍진(洪澄)이 화포리에 세운 것을 1948년 후손 홍찬희(洪纘憙)가 중건 이전한 건물이다. 일본풍이 섞인 겹솟을대문과 로고가 새겨진 기와가 눈에 크게 거슬리지만 그것도 역사의 한 부분이라 아직은 손을 대지 않고 있다고 했다. 연못 우측에는 ‘도천학당’의 일부였다가 지금은 마을정자로 개조된 영호정(永護亭)이 400년 된 물버들나무와 함께 서 있다. 도래마을이 타지의 한옥마을과 다른 점은 옛 한옥뿐 아니라 근대 한옥, 근대 양옥까지 한데 어울려 가옥 형태의 변천사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시의 지원금으로 새로 지은 한옥 민박도 15채나 되고 ‘왕년’에 꽤나 비쌌다는 빨간 벽돌로 담을 둘러친 모 기업가의 집도 적당히 주름져 한옥마을의 식구로 잘 어울렸다. 마을이 내다보고 있던 앞 들판은 그 옛날 풍산 홍씨 가문이 호령하던 땅이었다. 벼슬이 높아 위세를 떨치기보다는 천석지기, 만석지기로 부를 누렸던 가문이었다고 했다. 지금 마을에 ‘돈’이 되어주는 특산 작물은 취나물이다. 야생취가 나오기 전에 시장에 내다 팔면 제법 쏠쏠한 수익이 된다. 여린 잎들을 밀어올리기 시작한 취나물 하우스 안에서 땀에 흠뻑 젖은 아낙들이 나왔다. 봄볕에도 하우스 내부는 찜질방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점심 무렵 도착한 김진만 집배원의 얼굴도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도래마을을 15년 째 출입하고 있는 남평우체국 소속 집배원이다. 집성촌의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을 지켜봤기에 명절 즈음에 고향을 찾아온 그들과 마주치면 가족처럼 반갑다. “먹고 사는 게 풍부한 양반 마을이라 사람들이 예절 바르고 인심도 좋아요. 집배원들이 보통 처음에는 엄청나게 고생을 많이 하는데, 이 마을에서는 친절하게 잘 가르쳐주고 도와줬어요. 서로 다 친척지간이니까 잘 알잖아요.” 격주로 교대해 가며 마을을 찾는 그는 도래마을에 올 때마다 마음이 차분해진다고 말했다. 대문 잠그고 사는 집이 없는 곳. 이곳저곳으로 바쁘게 달려야 하는 마음도 이곳에 오면 조금 느려진다는 것이다. 그런 느낌은 도래마을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효한 감상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