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우체국 마소영 대리가 소개하는 ‘무등산’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 했다. 이 우화의 실제 무대라는 중국 타이항산(太行山)을 가보니 길이가 400km나 되는 큰 산맥이었다. 그렇게 거대한 산도 사람의 끈질김으로 옮겨졌으니 70%가 사유지인 무등산이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는 일도 시간문제일 뿐이다. 무등산 공유화 재단을 대표로 한 광주 시민들이 우공의 각오로 임하고 있다. 지난해 개방된 무돌길을 따라 무등산을 ‘탑돌이’하듯 돌며 마음을 보탰다.
무돌길은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이라서 어느 코스를 걷든지 반드시 마을의 당산나무와 정자를 만나게 된다.
차별 없는 어머니의 산
무등산(無等山)이라는 이름은 불교에서 말하는 최고의 경지인 무유등등(無有等等)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차별 없는 산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광주 시민의 60~70%를 무등산이 먹여 살렸다고 해요. 10개가 넘는 약수터에 땔감도 주고, 정말 어머니와 같은 산이죠.” 무등산 문화유산해설사 이애심 씨의 말에서 진심어린 감사가 느껴졌다. 멀리서 보면 젖무덤, 가까이서 보면 돌무덤을 닮았다는 무등산은 광주, 담양, 화순에 걸쳐 있는 도립공원이다. 그런 무등산을 구입한다고? 이 ‘봉이 김선달’스러운 이야기에 5만 6000명이 지갑을 열었다. 무등산 공유화 재단에 대한 이야기다. 광주 시내에서 무등산 정상까지 겨우 9.2km, 찾아가기 쉬웠던 조건은 난개발로 고통 받기 쉬운 조건이기도 했다. 면적(30.32㎢)이 큰 산은 아니지만 해발 1,187m로 우뚝 솟아있는 무등산에 150만 명의 광주 시민이 기대어 살고 있다. 놀랍게도 무등산의 67%(20.27㎢)가 사유지다.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높아지자 1989년 지역의 단체들이 대거 참여한 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가 창립되었다. 이후 ‘무등산시민 땅 한 평 갖기 1,000원 모금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고 2000년에는 (재)무등산공유화운동재단이 설립되어 본격적인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20년간 모은 성금과 개인의 기증으로 재단은 2009년에 0.55㎢의 면적을 확보했다. 미미한 숫자지만 자연 경관을 해치는 군부대, 통신 시설, 상업 시설을 철거·이전시키는 등 보이지 않는 성과가 적지 않다. 사유지가 많아 갈등이 있지만 적극적인 보존을 위해 국립공원 지정도 건의하고 있다. 실제 무등산으로 깊숙이 들어가 보면 이 산을 잘 보존해야 할 이유들이 더욱 분명해진다. 흙산이라는 인상이 강한 무등산의 정상부에는해안가에서만 보아왔던 주상절리대의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서석대(1,100m)와 입석대(1,017m)로 불리는 주상절리대는 중생대 백악기 후기의 화산활동으로 형성되었으며 천연기념물 제465호다.
그러나 일행은 무등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산행이 아니라 자락을 도는 무돌길을 선택했다. 총 50km에 걸쳐 있는 15개의 길은 재를 넘어 마을과 마을로 이어지던 옛길을 복원한 것이다. 일본 강제점령 시절인 1910년대에 제작된 고지도를 바탕으로 했다. 구전되어 오던 무등산의 옛 이름인 ‘무돌뫼’에서 이름을 땄다. 광주 북구 구간(1~4길, 14km), 전남 담양구간(5~6길, 8km), 전남 화순 구간(7~11길, 17km), 광주 동구 구간(12~15길, 12km)중 가장 교통이 편리한 광주 북구 구간을 선택했다.
경상마을의 노거수인 느티나무는 상상 이상의 아찔한 위용(높이 35m, 둘레 7.9m)을 보여준다.
광주우체국 마소영 대리
인간적인 길, 무돌길을 걷다
마을과 마을 간의 거리는 인간적이었다. 다리가 적당히 아파오고 호흡이 가빠질 무렵이면 어느새 다음 마을이 나타났다. 재는 봇짐을 이거나 지게를 지거나 소달구지를 타고 건널 수 있을 만큼만 높았다. 그것이 보통 5리나 10리의 거리고, 무돌길을 한 바퀴 돌고나면 35개의 마을을 지난다고 했다. 제 1코스의 시작은 각화마을의 각화중학교다. 이곳에서 들산재를 넘으면 신촌마을이 나오고 등촌마을까지 나아가도 거리는 불과 4km에 불과하다. 갈림길마다 안내판이 서 있고 헛갈릴만한 곳에는 어김없이 코스를 기록한 노란 리본과 화살표가 눈에 들어왔다. “무돌길은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이라서 어느 코스를 걷든지 반드시 마을의 당산나무와 정자를 만나게 되죠. 참 정겨운 길이예요.” 이애심 씨가 줄곧 동행하며 여러 가지 구전을 들려주었다. 임진왜란 이후 생겼다고 해서 ‘신촌 마을’, 들싸리에서 유래한 ‘들산재’, 싸릿대로 만든 조리에서 유래한 ‘지릿재’ 등 이름마다 사연이다.
푸른 이끼가 두터운 등산마을의 돌담을 지나 지릿재로 들어서자 금세 우거진 숲이었다. 서어나무를 발견하고 그녀가 다시 말했다. “숲의 천이 과정 중에서 가장 마지막 단계에서 볼 수 있는 나무예요. 그만큼 무등산의 숲이 오래되고 성숙했다는 뜻이죠.” 숲과 길은 자신만의 나이테를 가지고 있었다. 무돌길도 최소 100년, 길게는 500년이 넘은 코스도 있다. 초입을 통과한지 오래지 않아 돌무지의 흔적이 보였다. 도적을 만나거나 다치는 일 없이 무사하게 통과하게 해 달라는 기복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길을 모두 걷지는 못하고 담양으로 넘어가자 경상마을(제6코스) 입구에서 ‘백남정재’를 만났다. 100명의 장정들이 모여야만 넘을 수 있었을 만큼 숲이 깊고 위험했다는 곳이다. 경상마을의 노거수인 느티나무는 상상 이상의 아찔한 위용(높이 35m, 둘레 7.9m)을 보여주었다. 마치 여러 그루의 나무를 합쳐 놓은 듯 중심가지가 8개나 되고 코끼리 다리 같은 기근(공기뿌리)들이 지면으로 나와 있어서 가히 신목(神木)으로 여겨질 만 했다.
먼길을 돌아 광주우체국 지원과의 마소영 대리를 만난 것은 증심사(證心寺) 아래 의재미술관이었다. 남종화의 대가였던 의재 허백련 선생은 마지막 30년 동안 광주 운림동 일대의 무등산 계곡에서 서화 작업을 했고 농업학교를 짓는 등 지역에 많은 공헌을 했다. 그를 그리기 위해 세워진 의재미술관은 건축적으로도 주목받는 작품이다. 의재 선생은 특히 차를 좋아하여 지금도 미술관 뒤편과 맞은편에서 그가 남긴 차밭을 견학할 수 있다. 녹차 한잔의 여유를 대신해 마소영 대리와 등산로를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증심사 코스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무등산 등산 코스로 광주에서 나고 자란 그녀도 이 길을 따라 산에 올랐던 초등학교 소풍의 추억이 있다. 지난해 11월까지 해남에서 3년 넘게 근무했던 그녀는 오랜만에 다시 찾은 무등산에서 큰 변화를 하나 발견했다. 증심교 주변 산기슭에 모여 있던 식당이 모두 이전되고 근사한 소나무 숲으로 식생이 복원된 것이다. ‘깨끗해진 모습이 보기 좋다’며 그녀는 앞으로 좀 더 자주 무등산을 찾아오겠다고 했다. 무등산은 그렇게 누군가의 ‘어린 시절’보다 오래전, 가장 아름다웠던 옛날로 천천히 되돌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