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우체국 김재웅 집배원이 소개하는 삼학도
세 처녀가 세 마리 학이 되어 오른 자리
여객터미널에 내리자 비리고 거친 바닷바람이 뺨을 때린다. 때 아닌 눈발도 어쩐지 생각했던 봄의 풍경과는 생경스럽다. 예보에도 없이 흩날리는 봄의 눈… 바다의 운치를 더해준다. 여객터미널에서 가까운,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의 배경이었던, 여전히 애잔한 추억이 남아 있을 것만 같은 삼학도로 발걸음을 옮긴다. 섬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육지가 되어버린 지 오래. 삼학도는 더 이상 설움과 이별을 인내해야 하는 애잔하고 고단한 섬이 아니었다. 태곳적 전설을 되찾은, 삶의 휴식과 안식을 제공하는 장소가 되어있었다.
세 마리의 학이 섬을 이뤘다는 전설을 지닌 삼학도는 유달산과 함께 목포의 상징적 공간으로 존재하고 있다. 삼학도에는 흥미로운 전설이 있다. 옛날에 기품이 당당하고 수려한 젊은 장사가 유달산에 홀로 살며 두문불출 수도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때 유달산 밑 갯마을 처녀 셋이 이 젊은 장사를 제각기 짝사랑해 산 위에까지 물을 길어다 주고 빨래와 밥을 해주었다. 오직 수도를 위해 유달산에 들어온 장사는 세 처녀에게 자신의 꿈이 깨지기 전에 멀리 떠나 달라며 간곡히 부탁을 했고, 진정으로 사내를 사랑했던 처녀들은 새벽녘에 마을을 떠났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장사가 이내 사랑을 깨닫고 떠나지 말라고 소리쳤으나 배는 멈출 줄 모르고… 장사는 산에서 내려와 뱃전을 향해 활을 쏘았다. 활에 맞아 구멍이 난 배가 가라앉자 장사는 세 처녀를 구하기 위해 헤엄쳐 갔으나 처녀들은 이미 세 마리의 학이 되어 하늘로 오른 뒤. 장사는 크게 상심하였으나 그 뒤 다시 수도에 매진하여 훗날 큰 장수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삼 학도 부둣가의 새벽은 여전히 분주하다.
바다로 나가는 고깃배와 잡은 고기를 육지로 내는 작업이 수시로 이루어지기 때문. 언제나 치열했던 삶의 터전이었던 바다… 그래도 사람들은 삼학도 바다에서 위로를 받으며 살아왔다.
세 마리의 학이 하늘로 오른 자리가 섬이 되었다는 삼학도는 육지가 되기 전 조선시대 수군 진영인 목포 만호청에서 땔나무를 했던 곳. 때문에 삼학도는 일반인의 출입이 오랜 시간 통제되어 울창한 숲을 이룬, 물새만이 드나드는 자연 그대로의 섬이었다. 그러다 1968년부터 연륙공사와 간척공사로 육지가 되면서 정부기관과 공장들이 들어섰고 옛 모습은 사라지게 되었다. 목포시는 삼학도의 옛 모습을 되찾기 위해 2003년까지 ‘삼학도 산 형태 복원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다시 세 개의 섬의 모습을 되찾았다. 동시에 요트 전용 부두와 산책로가 들어서 레저를 즐기는 섬, 천천히 걷기 좋은 섬으로 거듭났다.
삼학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50대 중년의 여성이 곁으로 와 자연스럽게 말을 건넨다. 누구보다도 이곳 목포와 삼학도를 좋아한다는 그녀에게 낯선 여행자는 내 집을 찾아온 손님과도 같았을 것. 그렇게 오래도록 여행자의 무리에 섞여 삼학도에 얽힌 이야기들을 마치 소설처럼 읊어낸다. 여행에서의 행복한 만남이 삶을 사는 동안 순간순간 기억나는 기분 좋은 봄이듯, 이름도 알려주지 않고 자리를 뜬 중년여성이 들려준 삼학도 이야기 역시 어느 날 문득 기분 좋은 봄이 되어 찾아올 것 같다.
목포우체국 김재웅 집배원
삶의 향기가 뒤엉킨 기찻길을 걷다
삼학도를 돌아 목포역으로 가는 길…. 생각지도 못했던 그림이 여행자의 시야로 들어온다. 4차로 바로 옆, 그러니까 마을 집 앞으로 기찻길이 이어진 것. 정말 기차가 다녔던 길이 맞는지, 지금도 기차가 운행을 하는지 이런저런 궁금증을 안고 목포우체국 김재웅 집배원을 만났다.
“기차 운행하던 길 맞습니다. 지금도 일정하지는 않지만 운행하고 있습니다. 화물을 운반했던 기찻길이자 마을 사람들이 오가는 마을길이기도 합니다. 이 길을 따라 지난 20년간 희로애락이 담긴 소식을 전달해왔습니다. 세월만큼이나 마을 주민도 연세가 지긋해지셨고, 저도 나이를 먹었네요. 삼학로 기찻길 마을에선 누구라도 인사를 건네면 반갑게 맞아주시지요. 고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목포에는 ‘8경’이라 하여 뛰어난 자연경관을 갖춘 여행지가 있음에도 김재웅 집배원이 이곳을 추천한 이유는 따로 있다. 삶의 애잔함이 묻어나는, 그래서 살아 있는 역사이기도 한 삼학로 기찻길이야말로 목포를 대표하는 이미지라는 것. 올해로 운행한 지 61년째 되었다는 삼학도선은 목포 외항부두에서 삼학도 안길, 삼학로 기찻길을 따라 목포역까지 이어진다. 석탄을 운반하는 화물기차로, 하루 1~2회 물량이 있을 때만 운행을 한다고. 여행자들이 삼학로 기찻길에 들어선 시각은 이미 오전 한 차례 기차가 지나간 후.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느린 발걸음으로 마을길을 걷는다. 손 내밀면 기차가 닿을 지척에, 찾아오는 손님이 있을까 싶은 쌀가게, 정비소, 여관, 구멍가게가 이어진다. 더러는 문을 닫기도 했고 더러는 드나드는 손님이 있기도 한 그 가게 앞, 일흔을 넘긴 노인들이 모여앉아 타닥타닥 나무난로를 앞에 두고 너무나 한가로워 지루하기까지 한 오후 한낮을 보내고 있다. 한눈에 봐도 깊게 패인 주름에 검버섯 퍼진 노인들의 얼굴에서 고단한 지난 시절이 보인다. 애잔하고 불편한 마음. 왜 그렇게도 치열했어야 했는지, 그저 먹고사는 데 급급했던 노인들의 과거를 위로라도 하고 싶다. 노인들 곁으로 다가가 말을 건넨다. 앞으로 1~2년 안에 사라질지도 모르는 이 마을 앞 기찻길을 추억하러 오는 외지인들이 많아서 그런가? 마을을 서성거리는 여행자들에겐 별 관심이 없는지 첫마디가 퉁명스럽다. “어디서 왔어? 방송국에서도 얼마 전에 왔다가더니…. 뭐 볼 게 있다고들 자꾸들 찾아오는지 도통 모르겠어.” 올해 일흔여섯이 되셨다는 오옥렬 할아버지는 별 볼일 없는 마을에 외지인이 드나들며 이것저것 물어보는 게 귀찮은지 묻는 말에 대답이 짧다. 자식들은 외지로 나가고 마땅한 일거리 없는 노인들에게 그나마 낙이 있다면 막걸리 한잔에 이씨 김씨 찾으며 젊은 시절 무용담을 늘어놓는 일일 텐데…. 외지인이 올 때마다 비슷한 질문을 해대니 귀찮기도 할 터다. “여기서 태어나고 나이 먹었으니 추억이야 많지. 외지인들이야 신기하다고 자꾸 찾아오는데, 사는 사람들은 불편한 게 많아. 이제 이 기찻길도 걷어낼 계획이라니 서운하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하고 그래.” 삼학도 육지 만들던 시절도, 처음 기차 운행했던 때도 다 기억하고 있다는 오옥렬 할아버지. 살면서 기찻길이 불편하기도 했지만 없어진다니 자신의 지난 모습도 사라지는 것 같아 서운한 마음이 더 크다고. “지금이야 그렇지 옛날에 이 기차 없었으면 생활이 안 됐어. 석탄 나르고 뭐 나르고 먹고사는 데 도움이 되었으니까. 근데 여기 사는 사람은 불편하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기차 들어온다고 하면 일하다 말고 세간이며 자전거며 뭐 물건들 옮겨 놓느라고 바빴어.” 오옥렬 할아버지의 불평 섞인 추억담은 그렇게 계속되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가늠할 수 없는 여관 앞을 지키는 강아지의 모습이 정겹다.
오랜만에 찾아든 외지인이 반가운 모양.
목포 외항부두에 요트전용 경기장이 생겼다. 레저와 휴식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장소로 탈바꿈했다.
하루 1~2회 운행하는 삼학도선. 삼학로 주민들의 애환과 추억을 안고 운행한다. 이제 곧 운행을 중단하게 된다.
기찻길을 따라 마을 곳곳을 돌고 나니 뉘엿뉘엿 해가 진다. 여행자의 하룻밤 안식처가 될 곳을 찾아 피곤한 몸을 누인다. 다음 날 아침 10시 30분. 저 멀리 기차가 보인다. 기관사 두 명 중 한 명은 운전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은 몸을 내밀어 마을 사람들에게 손 인사를 한다. 내려와 기찻길 위 채 들여놓지 못한 것들을 함께 치우기도 한다. 시속 10km/h. 기차의 속도가 그리 중요하지 않은 삼학도선이다. 제주부터 짙어진 봄은 바다 건너 또 다른 바다 목포에도 그렇게 짙게 물들고 있었다. 삼학도 전설 구비 돌아, 삼학도선 기찻길 따라, 느리지만 천천히, 짙고 향기롭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