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동백섬-해운대해수욕장-해운대달맞이길)
삶은 계속된다
새벽을 여는 해운대의 모습이 궁금했다. 예상대로 새벽의 해운대는 낮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다. 북적이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사라진 자리에 먼바다에서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햇살은 해운대의 모습을 사뭇 다르게 만든다.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진 해운대에서 종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해운대의 말간 얼굴이 보이는 것만 같다. 해수욕장으로 내려가 백사장을 밟아본다. 무게 중심이 옮겨질 때마다 들어가는 모래들, 조금씩 발을 감싸 안는 것처럼 여겨진다. 동백섬을 한 바퀴 돌아 다시 해운대해수욕장으로 돌아오자 해운대 앞바다에 떠 있던 안개들이 해운대 위쪽 건물들로 올라갔다. 이른 아침의 상쾌한 바람을 맞아서일까? 페달을 밟은 발에 바짝 힘이 들어간다. 해운대 산책로에는 도심지에 있는 산책로답게 다양한 모습으로 자전거를 타는 이들과 만날 수 있다. 완벽하게 라이딩 복장을 갖춘 자전거 라이더, 양복을 입은 채 출근길을 서두르는 직장인, 아침 운동을 나온 어르신 등 제각각 자전거를 타는 이유는 다르지만, 발이 움직인 동력만큼의 곳으로 데려다 준다는 동질감 때문일까? 자전거를 탄 사람과 마주칠 때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눈인사를 나누게 된다.
신라 왕족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안압지. 수천 년 전 왕족들이 거닐던 이곳은 이제 수학여행 온 학생들의 또 다른 추억의 장소가 되었다.
경주에서는 누구라도 자전거 라이더가 될 수 있다.
고대왕능 길을 따라 달리다 보면 자연이 풍경이 몸과 마음으로 들어온다.
길가에 야트막하게 자리한 오래된 집들이 정겹다. 오래전 모습이 많이 훼손되지 않아 더 좋은 경주다.
발이 움직인 동력만큼만
해운대 산책로를 뒤로하고 해운대 달맞이길로 향한다. 보행자와 자전거 겸용도로를 달리자 아침을 여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분주하게 아침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내가 떠나온 자리를 떠올린다. 머물던 자리에서 한걸음 물러나 스스로를 반추해 볼 수 있다는 것도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묘미. 자동차에 비해 속도감이 덜해 생각을, 기억을 차곡차곡 할 수 있다는 점도 자전거 여행의 매력이 된다. 자동차와 사람들을 지나오자 해운대 달맞이길 앞에 이른다. 해운대 달맞이길은 해운대를 지나 와우산을 거쳐 송정까지 해안절경을 따라 15번이나 굽어지는 고갯길, 일명 15곡도라고 불리는 것처럼 만만치 않은 언덕이다. 달맞이길 한쪽에 있는 하얀색 건물과 아래로 보이는 파란 바다가 흡사 그림처럼 보인다. 호흡을 가다듬고 언덕을 오른다. 숨이 찰 즈음이면 벚나무 사이사이로 보이는 바다를 보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자전거가 매력적인 또 하나의 이유는 오르막 뒤에는 내리막이 있다는 겸허함을 알게 한다는 것이다. 반대편에서 해운대 달맞이길 언덕을 내려오는 사람들의 홀가분한 표정을 보며 언덕을 지치는 발에 힘이 들어간다. 언덕을 오르느라 다리에 힘이 빠질 즈음, 해운대 달맞이길에 닿는다. 청명한 바람을 맞으며 언덕 아래 있는 해운대 앞바다를 내려다보자 훅 하고 가슴에 들어오는 바다가 마치 선물처럼 다가온다.
경주 시내(분황사-황룡사지-안압지-첨성대-대릉원)
자전거도 쉬어가는 벚꽃 그늘
7번국도를 타고 올라와 닿은 경주는 표지판이 없어도 경주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다. 이곳저곳에서 보이는 능이 고대왕들의 꿈이 묻혀 있는 도시라는 걸 알려주는 까닭이다. 멀리 보이는 산이 도시 전체를 둥그렇게 감싸 안아 대지가 낮은 듯 여겨지는 착시현상 덕분일까? 자전거를 달리느라 팽팽하게 당겼던 다리 근육이 조금씩 풀리는 것만 같다. 7번국도를 따라 점차 개화한 벚꽃이(4월초) 경주에서 절정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소담스러운 벚꽃을 가까이에서 보려 다가갔더니 벚꽃은 이미 벌들이 점령을 해버린 상태, 하지만 벌이 꽃을 찾는 건 당연한 일이니 놀란 가슴을 벌에게 탓하는 건 무리일지도 모르겠다.
경주에 있는 7번국도를 달리다 보면 길 양옆에 있는 문화유산과 맞닥뜨릴 수 있다. 경주의 동부사적지대인 이곳은 신라왕경의 중심부였던 만큼 중요한 사적이 밀집되어 있다. 신라 왕족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안압지도 그중의 하나. ‘오리와 기러기가 날아다니는 연못’이라는 뜻의 안압지는 신라의 궁궐터였던 곳이다. 수천 년 전 왕족들이 거닐던 이곳은 지금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 물결을 이루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경주는 봄가을만 되면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로 시끌벅적하니 땅속 깊은 곳에 머물고 있는 고대왕들이 심심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안압지에서 분황사 가는 길은 큰 건물이 없어 자연과 유적지에 빠져들기에 충분하다. 분황사 가는 길로 접어들자 2차선도로를 마주하고 있는 벚나무들의 벚꽃이 흩날린다. 벚나무 아래를 달릴 때는 자전거 속력 때문에 벚꽃이 떨어질까 싶어 저절로 페달에 들어갔던 힘이 빠진다. 그렇게나마 이 찬란한 봄을 잡아두고만 싶다.
경주우체국 최성우 집배원
눈이 아닌 가슴으로 보라
경주는 도시 전체가 평지로 되어 있어 초보자라도 자전거 라이딩에 부담이 없다. 12km의 분황사-황룡사지-안압지-첨성대-대릉원 코스는 산들산들 부는 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타기에 딱 좋은 코스. 각 유적지마다 5분이면 이동이 가능하므로 홀가분한 마음으로 둘러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경주에서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유난히 눈에 띤다. 굳이 라이딩 복장을 갖춘 자전거 라이더가 아니더라도, 경주로 여행 와서 자전거를 타고 유적지를 둘러보는 사람, 가까운 곳으로 마실 나가는 주민 등 자전거를 타는 사람과 쉽게 만날 수 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경주에서의 페달 밟기는 저절로 슬로가 된다. 자전거로 달리는 사이, 자연과 유적지는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걸 알아가기 때문이다. 자동차로 지날 때 찰나에 지나치던 풍경을 가슴에 차곡차곡 쌓아놓기 위하여 페달을 조금씩만 밟으며 달린다.
1400년이 지났어도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첨성대 앞에 서니, 어쩐지 생경스러워 보인다. 어릴 적에 분명 본 기억이 나는데, 높이가 이렇게 낮았나 싶어 낯설기까지 하다. 능에 잠들어계신 왕족들에게 불호령을 들을까 싶어 얼른 첨성대를 나온다. 첨성대를 지나 유채꽃 단지를 지나는데, 자전거 한 대가 멈춰있다. 주인 없이 혼자 서 있는 자전거, 자전거를 타고 온 이는 봄의 정취에 빠져 봄과의 마실이라도 나간 걸까? 궁금증을 뒤로하고 경주우체국 최성우 집배원을 만나러 다시 페달을 밟는다. “경주, 여행하기 참 좋은 곳이죠. 자전거 타면서 천천히 둘러보는 역사유적은 걷거나 자동차를 이용할 때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습니다.” 휴일이면 산책 삼아 자전거를 탄다는 최성우 집배원이다.
영덕에서 포항까지 이어지는 해안도로. 바다와 어우러진 풍경은 늘 마음에 여유를 준다.
4월 초. 영덕에서는 김 말리기가 한창이었다. 지나가는 여행객에게 반가운 손인사를 잊지 않았던 어촌마을 아낙들
풍력발전단지. 이국적 풍경으로 와 닿는다. 천천히 자전거를 타도 좋고 한번쯤 걸어 봐도 좋겠다.
영덕 해안도로(고래불해수욕장-풍력발전단지-해맞이공원-강구항)
은빛 물결로 춤추는 바다
봄빛을 받은 바다는 은빛물결이다. 언뜻언뜻 해송 너머로 바다가 보일 때마다 페달에 올려놓은 발에 힘이 들어간다. 바다 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온다면 해안이 가까워졌다는 신호다. 그렇게 닿은 고래불해수욕장, 이곳은 사람이 마음이 허할 때 바다를 떠올리는 까닭을 설명해주는 곳이었다. 하늘과 바다가 만나 수평선을 이루고, 그 안을 쪽빛으로 채운 바다는 가슴을 뻥 뚫어주기에 충분하였다. 가슴으로 들어온 파도가 가슴에 있던 뭔가를 되가져 가는 것 같은 착각도, 오직 바다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멋진 바다를 눈으로만 보는 건 올바른 여행자의 태도가 아니다. 소매를 걷고 두 손을 바다에 담가보는데, 머리칼이 쭈뼛 설 정도로 차다.
영덕에서 포항까지의 53km의 해안선도로는 동해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동해안 해안도로의 대명사였던 7번국도가 왕복 4차선으로 확장되면서 육지쪽으로 들어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다를 끼고 달리는 도로가 사라진 건 아니다. 7번국도를 타고 가다 보면 해안쪽으로 연결된 지방도로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축산항에서 강구항에 이르는 22km의 918번 지방도로는 눈이 아닌, 가슴으로 들어오는 바다를 만날 수 있는 곳. 게다가 기암절벽을 타고 오르는 파도까지 덤으로 보여준다.
바다를 따라, 하늘을 따라 달리다
918번 지방도로는 길이 구불구불해 속도를 내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구불구불한 탓에 천천히 달리는 게 오히려 나을 성싶다. 자전거를 빨리 달리다 보면 먼바다를 떠다니는 쪽배나 떼를 지어 나는 갈매기를 놓치기 십상이니까. 그렇게 자전거에 몸을 내맡기고 있을 즈음, 산 너머 프로펠러가 보이기 시작한다. 흰색 프로펠러의 정체는 풍력발전단지의 풍차. 언덕 위에서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모습이 흡사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프로펠러의 손짓에 이끌려 올라간 풍력발전단지에는 막 봉우리를 터뜨리기 시작한 벚꽃이 바다를 향하여 멋을 뽐내고 있다. 봄빛을 받은 은빛 바다에 눈이 부셔 바다를 맞대고 앉아 있는 어촌마을로 시선을 돌린다. 낮은 산을 깎아 나란히 파란 지붕을 이고 있는 어촌마을은 영덕의 분위기처럼 순박해 보인다. 마을에서는 삼삼오오 아주머니들이 모여 미역말리기가 한창이다. 가장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미역을 말리는 아주머니들의 모습에서 소박한 삶의 지혜를 엿본다. 청명했던 바다 내음에 바다의 비릿한 내음이 섞이기 시작했다면 강구항에 닿았다는 뜻이다. 몇 년 전에 했던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의 배경지였던 강구항은 영덕대게로 이름이 난 곳. 빨간 대야에서는 생선들이 펄떡이고 있고, 목청 높여 손님을 부르는 아주머니들의 모습에서 바닷가 특유의 삶의 활력이 넘친다. 김이 펄펄 나는 찜통에서 갓 쪄낸 대게가 출출한 여행객의 발길을 잡아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