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무늬가 새겨진 슬로시티 여행
1999년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느리게 먹기, 느리게 살기로 시작된 슬로시티. 슬로시티는 ‘자연’과 ‘전통문화’를 지키며 모두가 살만한 사회,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생겨난, 삶의 질 개선을 위한 국제적인 연결망이다. 우리나라는 2006년 한국슬로시티추진위원회를 조직, 2007년 담양군 창평면, 신안군 증도면, 완도군 청산면, 장흥군 유치면을 시작으로 하동군 악양면, 예산군 대흥면이 슬로시티로 인정을 받았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전통문화를 지키며 사는 슬로시티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있었다. 그것은 결코 낡고 모잘 것 없는 것이 아닌,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삶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그곳 슬로시티로 온전히 들어가 천천히 거닐어 보았다. 슬로시티로의 느린속도의 여행.
서울의 출근시간. 전동차 문이 열리면 경마장 출발총성이라도 울린 듯 말 대신 사람이 튀어나오며 뛴다. 그들 중 선두 몇 명은 정말이지 필사적이다. 대한민국의 근현대는 ‘빨리빨리’로 대변할 만큼 급하게 뛰어왔다. 그리고 여전히 급하다. 내게 달팽이가 줄기를 타고 잎사귀 끝까지 가는 모습을 지켜보라면 아마도 답답해서 끝까지 못 보고 가거나 달팽이를 들어 잎사귀 끝에 옮겨놓고 갈 것이다. 반면 한쪽에서는 느림과 슬로에 대한 이야기들이 부쩍 자주 들려온다. 느림의 미학, 슬로푸드, 슬로시티 같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빠르다는 KTX를 타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느린 마을 슬로시티 하동 악양에 발을 딛는 순간, 나는 주문에 걸린 듯 느릿느릿 걷기 시작했다. 그냥 바람이 밀어주는 만큼만 걸었다.
느려서 시간도 더디 가는 곳
드넓은 평야를 끼고 19번 국도를 따라 오르는 길 좌측으로 펼쳐지는 섬진강의 풍경은 차를 멈추게 했다. 강가에 고운 모래사장이 펼쳐졌고 맨발로 푹신한 강변을 걸으면 머릿속이 깨끗이 지워졌다. 대신 발자국이 기억처럼 새겨졌다. 평사리로 진입하기 직전 국도변에 있는 평사리공원은 운동장, 오토캠핑장이 있어 가족단위 여행코스로는 제격이었다. 지리산을 끼고 펼쳐진 넓은 보리밭을 지나 평사리 마을 언덕을 올랐다. 언덕의 꼭대기에 최참판댁이 보인다. 오르는 길에 나무새 몇 마리가 지붕 위에 앉았다. 솟대다. 같은 곳을 바라보는 녀석들이 하나도 없다. 그냥 편한 데로 앉았다. 그 모습이 자로 잰 듯 줄지어 늘어선 도시의 가로등과 대비되어 마음을 놓게 했다. 제멋대로 흐트러진 모습이 자연스러운 동네다. 최참판댁에 오르는 길에는 서희의 글 선생 김훈장네도 있고, 서희의 아비를 죽인 김평산네도 있다. 토지 등장인물들의 집들이 실재 존재하는 마을이다.
최참판댁은 백석지주의 집에 걸맞게 안채, 뒷채, 행랑채에 별당까지 갖추고 있다. 마을의 꼭대기에 있어서 시야에 걸릴 것이 없고 마당에 서면 대문 밖으로 마을과 평사리 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다들 어디에 있을까? 주인 없는 문패만 덩그런히 매달린 집들이라 주인공 없이 생일 파티하는 기분이 들었다. 저 들판 어디쯤에서 여문 보리 낟알을 살피고 있으려나, 들판 한가운데 소나무 아래 모여 봄날을 즐기고 있으려나. 아쉬운 대로 보리밭 물결을 향해 손가락질을 해본다. 다시 내려오는 골목길에는 올라올 때 보이지 않았던 기념품 가게와 커피숍이 보인다. 소설 토지 속에서 등장할 법한 생활한복 차림의 여인들이 지나가니 묘한 풍경이 연출됐다. 타박타박 발걸음을 옮기니 평사리 들판이 가까워오고 최참판댁은 멀어졌다. 시간을 따라가는 기분이 들어 발걸음을 더 늦춰보았다. 바람도 느리고 시간도 느리다.
짚풀로 엮은 지붕이 정겹다. 할머니가, 어머니가 끓이는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을 것만 같다.
아버지가, 어머니가 땅을 일군 저 도구들이 어쩌면 오늘의 우리를 만들었지도.
울창한 송림숲에 들어서면 선인들의 절개가 조금 아주 조금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최참판 고택, 그 옛날 부자처럼 함께 나눌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지리산문화학교에서는 모두가 선생님이고 모두가 학생이기도 하다.
보리가 익을 쯤, 우리 삶도 풍요로워졌으면 좋겠다.
최참판은 왜 만석꾼지주였을까
만석꾼 지주라는 말이 있다. 곡식 만 섬을 거두어들일 만큼 큰 논을 가진 지주라는 말이다. 쌀이 만 섬이면 20kg 쌀이 네 포대씩 만 번이니 20kg 쌀 4만 포대를 거두어들일 논을 갖고 있는 지주라는 말이다. 그럼 대략 쌀값만 따져도 20억 가까운 소득을 올리는 부자가 된다. 소설 ‘토지’의 최참판은 만석꾼지주라는데 눈앞에 펼쳐진 보리밭을 보니 그 말에 쉽게 믿음이 간다. 섬진강과 지리산을 끼고 있는 너른 들판의 비옥한 토지가 충분히 그리하고도 남음이 있어 보였다. 전북 장수에서 시작해 남도평야의 기름진 양분을 실어 나른 섬진강 물줄기는 하류의 악양 땅에 퇴적물을 쌓았다. 섬진강 물이 드나들며 기름진 땅을 만들었고 악양 땅은 옥토가 되었다. 봄 들판을 초록으로 물들인 악양 땅 평사리 들판은 고개 숙인 밀과 보리로 연두와 초록이 물결치며 장관을 이룬다. 곧 수확이 끝나면 물을 대고 모내기가 시작될 테지, 그럼 하얀 백로들이 먹이를 찾아 평사리 들판 위로 우아하게 날아들 것이다. 밀과 보리가 자라는 한쪽에는 자운영이 알알이 꽃잎을 피워 아름다움을 더했고, 부부송을 둘러싼 배나무를 손질하는 노부부의 손길은 바빠졌다. 5월의 평사리 들판은 풍요와 평화가 깃든 작은 낙원 같았다.
소나무는 악양에서 더 푸르다
너른 평사리 들판을 따라 고개를 돌리다 자연스레 시선이 멈춘다. 비닐하우스 한 동도 없는 평사리 들판에 시선을 멈추게 하는 건 소나무 두 그루다. 얼굴을 맞대고 서로 의지하며 섰는 두 소나무는 마치 부부처럼 다정하다 해서 부부송이라 불렀다. 부부송이라 하니 왠지 발랄한 노래라도 불러야 되나 싶다가도 보고 있자니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드넓은 들판 한가운데 소나무 두 그루만 덩그러니 놓인 것이 그렇다. 아니면 서희와 길상의 슬픈 인연이 서려서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이런 연유로 악양 사람들은 서희송(松), 길상송(松)이라고도 한다. 두 사람이 만나 하나가 된다는 부부의 의미를 전하기라도 하듯 부부송은 애틋한 자태를 뽐낸다. 섬진강을 건너왔을 산들 봄바람이 서울에 있는 아내의 살 냄새를 전해오고 길상송에 기대앉은 마음은 평온해 져 간다. 평사리 들녘의 사계를 지켜온 부부송의 푸르름은 억겁의 시간을 껴안아 아련하거나 혹은 아늑한 공간으로 그 자리에 서 있을 것이다.
하동우체국 이승재 집배원
그 많던 재첩은 다 어디 갔을까?
하동포구에 해가 떠오른다. 아니 떨리는 강 물결 위로 내려 바닥까지 갈아 앉는다. 포구에 배는 떠날 채비도 않고 어제도 오늘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처량해 보였다. 인적도 드물던 포구에 허리를 구부린 할머니가 지나간다. 왜 재첩 철인데 배가 나가지 않는지 묻자 재첩이 많지 않다고 했다. “올봄, 날이 차가워서 갱조개가 통 잡히지를 않어. 걱정이구만….” 하시며 큰 숨을 내 뱉는다. 그도 그럴 것이 환경오염에 따른 기후변화로 근래에 들어 재첩의 개체 수가 줄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 하동지방 방언으로 재첩을 갱조개라 부른다. 5~6월 제철인 재첩은 인공적인 양식법이 발달하지 않아 자연이 주는 대로 감사하며 거둬들이는 것이 하동 재첩마을을 지키는 이들의 습성이다. 슬로시티를 지키는 이들의 심성을 엿 볼 수 있는 대목이지만, 맛과 영양 면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길목의 입맛을 돋우는데 제격인 재첩마저도 중국산이 밀려온다하니 씁쓸하다. 포구에 닻을 내린 재첩잡이 배는 품 너른 섬진강변에 내려앉은 물안개 속에서 한 폭의 그림이 된다.
바쁜 도시를 떠나온 게 하루가 채 안 됐건만 악양 땅의 느린 시계를 따르다보니 어느새 도시의 강박은 스르르 사라졌고 이내 목적 또한 사라져 버린 듯했다. 차가운 도시에서 우리는 잉여인간이 아니 되기 위해 경쟁의 광장에 뛰어들어 몸을 비비곤 했지만, 악양 땅에서 나는 잉여인간이 되기로 했다. 남아돌아도 자연과 합일되는 이곳 악양 땅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