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우체국 이재한 집배원이 소개하는 검룡소
여름 더위도 비켜가는 고원의 땅
초여름이라고는 하나 섭씨 30도를 훨씬 웃도는 폭염이 전국을 강타했음에도 단 한 곳, 험산준령이 에워싼 강원도 태백은 예외였다. 열대야가 없는 이 축복받은 고원의 땅은 여름의 평균기온이 19℃에 불과하다. 지구에 한층 가까이 다가와 그 위세를 떨쳐 보이는 태양도 이곳에서만큼은 면이 서질 않는다. 그래서 산행을 기피하게 되는 이 계절에도 당골 석장승 부부에게 인사를 드리며 태백산으로 오르는 산꾼들이 많다. 제작시기를 알 수 없는 두 장승 앞에는 항상 막걸리 따위로 치성을 드렸던 흔적이 남아 있다. 단지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서가 아니라 기복의 대상으로서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사실 석장승은 미륵과 통한다.
그러나 이번 여정에 태백산은 들어 있지 않다. 대신 그 자리를 메우는 것이 그 태백산맥의 일부인 금대봉(1.418m)이다. 이곳에서부터 한강의 비밀을 간직한 검룡소를 향해 나아갈 생각이다. 쉽게 찾아가자면야 삼수동을 지나 35번국도를 타고 훌쩍 달리면 그만이다. 한강과 낙동강, 그리고 오십천 발원지인 삼수동은 석탄산업이 한창 흥했을 때만 하더라도 굉장한 호시절을 보냈지만, 요즘은 활기를 잃은 모습이다. 다만 이곳에는 태백의 손맛 좋은 사람들이 모두 모인 음식거리와 오래된 이발소며 구멍가게 따위가 그대로 남은 골목이 있으니 잠깐 들러 그 정취를 맛보고 가도 좋다.
검룡소는 국립지리원에 의해 1987년 공식 인정된 한강의 시원이다.
둘레 약 20m의 검룡소는 사계절 9℃ 이하의 지하수를 하루 2천 톤씩 폭포처럼 쏟아낸다.
환경부 지정 생태보호지역, 금대봉
편의와 편리를 버리면서까지 고단한 걷기를 택해야 하는 이유는 있다. 바로 그 길에 들꽃이 흐드러지게 피기 때문이다. 금대봉 일대는 1993년 환경부가 생태계보호지역으로 지정한 곳이다. 천연기념물인 하늘다람쥐와 꼬리치레도롱뇽을 비롯해 수많은 희귀동식물이 이곳을 터전으로 삼고 있다. 들꽃도 그 어느 곳보다 많다. 수십 종의 들꽃들이 철갈이를 하며 피고 진다. 6월을 기점으로 봄꽃은 거의 다 들어가고, 여름꽃이 불쑥불쑥 솟아나 금대봉에 향기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금대봉은 태백의 초입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제천에서부터 시작되는 38번 국도에 몸을 싣고 영월, 정선을 지나면 곧 두문동재터널을 만난다. 이 터널 조금 못 가서 오른쪽으로 길이 나 있는데, 이곳이 금대봉 산행의 들머리인 두문동재다. 싸리재라고도 불리는 두문동재는 해발 1,268m로 포장국도로서는 전국에서 가장 높은 고개다. 고려말 경기도 개풍군에 숨어 살던 일곱 충신이 이곳으로 피난 왔었다 해서 두문동재가 되었다. 두문동재는 금대봉으로 드는 길인 동시에 함백산 방향의 은대봉으로 드는 길이기도 하다. 산림감시초소 쪽으로 가야 금대봉인데, 아무나 그리고 언제든지 그곳으로 오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부터 무분별한 입산행위를 제한하고, 책임감 있는 생태탐방을 유도하기 위해 사전예약제를 실시하고 있다. 반드시 태백시청 환경보호과(033-550-2061)나 인터넷(http://tour. taebaek.go.kr)을 통해 예약해야 한다. 2월 1일~5월 중순, 11월 1일~12월 중순에도 산불감시를 위해 입산을 통제한다는 것 또한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최대한 느릿느릿 해찰하며 걷기
드디어 산행을 시작한다. 기점인 두문동재에서 금대봉까지는 약 1.1km. 30분이면 충분히 닿는다. 그러나 이곳에서 시간은 고무줄이 된다. 뚜벅뚜벅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게 아니라 꽃들에게 수작을 걸며 해찰하듯 걷는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전쟁터 같은 바깥의 시간과 다르다. 바깥의 시간을 이곳에 끌어들여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모든 긴장을2 이완시키고, 지고 있던 일이라는 짐과, 이고 있던 스트레스도 모두 던져 버린다.
길은 거의 산책을 하는 수준이다. 전혀 부침이 없다. 길에 들자 반가운 들꽃들이 반긴다. 수더분한 우리의 들꽃들은 화려하지 않은 대신 정감이 있다. 쉽사리 질리지 않고, 들여다볼수록 기품이 느껴진다. 먼저 붉은병꽃나무의 연분홍치마 같은 꽃들이 반긴다. 섬장대의 하얀 꽃은 햇발에 부서지며 눈을 시리게 한다. 분홍빛 큰앵초, 자줏빛의 현호색도 걸음을 잡아챈다. 미나리아재비와 갯괘불주머니는 개나리보다 더 선명한 노란빛이다. 금대봉에서는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쪽은 매봉산으로 이어지고, 왼쪽은 분주령 방면이다. 검룡소로 가려면 왼쪽을 택해야 한다. 이곳에서부터 검룡소까지는 5.5km쯤 된다. 그 거리에 지레 겁을 먹을 필요는 전혀 없다. 내리막인 데다가, 들꽃들이 있지 않은가. 그저 들꽃들과 놀며 걷노라면 오히려 그 거리는 짧아서 못내 아쉽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걸어야 할 길의 거리가 아니라 그곳이 얼마나 사랑스러운가의 문제일 뿐이다. 풍경의 크기를 우선시하는 사람이라면 이 길의 매력을 폄하할 수도 있다. 재미 하나 없는 길이라고 투덜댈 가능성이 크다. 만리장성에 감탄하며 고창의 모양성이나 수원의 화성에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축이다. 그러나 걷기 좋아하고, 들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길은 분명 오랜 시간 동안 감동으로 남을 것이다. 도감에서나 보았던 하얀빛 청초한 졸방제비꽃이며, 노란장대, 보랏빛 벌깨덩굴, 이름부터 우스운 다홍빛 쥐오줌풀 등과 함께 한 그 특별한 시간이 그리 쉽게 잊힐 리 없다.
분주령. 곰배령 같은 드넓은 초원은 아니지만 수만은 야생꽃들이 그동안 일상에서 지친 피로를 말끔하게 풀어준다.
낡고 오래된 태백의 동네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여전히 열심히 삶을 산다.
하늘 높이 솟은 솟대에 바람이, 구름이 지나간다.
한껏 게으름을 필 수 있는 자유지대
금대봉에서 약 30분쯤 내려가면 양 갈래 길이 나온다. 왼쪽이 우암산, 오른쪽이 고목나무샘길이다. 그런데 어차피 두 길은 다시 만나니 어느 쪽을 택하든 상관없다. 우암산으로 간다면 그 기슭의 벌개미취와 망초군락을 볼 수 있다. 고목나무샘은 한강의 진짜 발원지라고 일부 학자들이 말하는 곳이다. 여기의 물이 검룡소로 흘러든다는 것이다. 더 높은 곳에 있으니 이곳이야말로 한강의 시원이 아니겠느냐는 주장이다.
고목나무샘에서부터 분주령까지도 이제껏 걸어왔던 그런 길이 계속된다. 들꽃들이 마중하고 또 배웅하는 그런 길이다. 걷다가 지치면 잠시 앉아 들꽃에게 말을 걸고, 이마에 흐른 땀을 시원한 바람으로 씻는다. 바쁠 것 없는 걸음, 아예 등을 땅에 대고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하면서 게으름을 즐긴다. 게으름, 그것야말로 이곳에서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자유이자 호사다.
그렇게 기약을 두지 않고 걸어간 끝에 도착한 분주령은 천상의 화원이다. 인제의 곰배령 같은 드넓은 초원은 아니지만, 이곳에도 수많은 들꽃들이 무더기로 피어 있다. 조금 더 들꽃들과 시간을 보내자면 대덕산 쪽으로 길을 잡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검룡소와는 멀어지는 방향이다. 분주령에서 정면으로 가면 대덕산, 오른쪽으로 틀면 검룡소다.
태백우체국 이재한 집배원
514km 여정의 한강 시작점 검룡소
37° 13′ 50.6″ N, 128° 56′ 0.25″ E. 검룡소의 좌표는 이렇다. 분주령 갈림길에서부터 약 1.7km를 걸으면 검룡소다. 걷기의 방점을 찍는 곳이자 한강의 발원지가 바로 이곳이다. 이깔나무숲을 지나 점점 크게 들리는 물소리를 따라가면 그 끝에 검룡소가 자리하고 있다. 서해바다의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 강을 거슬러 올라 이곳에 머물렀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신성한 곳이다.
고목나무샘이니, 제당궁샘이니, 예굼터니 말이 많고, 오대산 우통수에 의해 잠시 그 지위를 빼앗긴 적도 있었지만 검룡소는 국립지리원에 의해 1987년 공식 인정된 한강의 시원이다. 둘레 약 20m의 검룡소는 사계절 9℃ 이하의 지하수를 하루 2천 톤씩 폭포처럼 쏟아낸다. 석회암반을 뚫고 나온 물은 장장 514km에 이르톤씩 고 긴 여행을 떠나 한강이라는 이름을 얻고, 바다로 흘러간다. 그 물은 증발하여 구름이 되고, 그 구름은 다시 비를 뿌리고, 비 되어 내린 물은 땅으로 스며들고, 그것은 다시 수맥을 따라 흐르다가 검룡소로 나올 것이다. 그 과정이 마치 돌고 도는 윤회와도 같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