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풍산우체국
김태원 집배원과 함께하는 하회마을
옥연정사의 풍경. 돌담 밑에 소박하게 피어난 들꽃과 햇살을 받아 더 하얗게 빛나는 고무신이 정답다.
600년 마을을 한눈에 보다
여느 때보다 일찍 돌아온 추석이라서일까, 한 달이 채 남지 않은 날임에도 날씨는 무척이나 더웠다. 그저 걷기만 했을 뿐인데도 등줄기로 이마로 굵은 땀이 연방 흘렀다. 경북 안동의 날씨가 그랬었다. 뜨겁고 후덥지근하고. 언제고 가을이 돌아오는 때면 가봐야지 했었던 곳이 있었다. 그런 몇몇의 장소들은 상상만으로도 어쩐지 내게 위안을 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고향집마냥, 언제나 내 할머니 어머니처럼 나를 안아 반겨줄 것만 같은 그런 곳들을 시간이 나면 언제고 찾아가 아무 생각 없이 몇날 며칠을 지내고 싶었다. 이번에 나선 경북 안동이 바로 그런 곳 중의 한 곳. 늘 그렇듯 여행지로 향하는 아침은 마음이 설렌다. 이른 새벽 허전한 배를 미숫가루 한잔으로 채우고 동서울터미널로 향했다. 평일이고 새벽이라 그런지 고속버스 안은 조용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미뤄두었던 생각도 끄집어내 하고 부족했던 잠도 청한다. 그렇게 3시간을 달려 안동에 도착해 하회마을로 향하는 시내버스로 옮겨 탔다. 구불구불 정겨운 시골길을 달려 도착. 경북 안동 하회마을은 풍산류씨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동성마을로 125세대 232명이 살고 있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옛 마을로 거주하는 인구가 타 지역 옛 마을들에 비교하자면 그 수가 적지 않다. 다른 지역의 옛마을, 전통마을이 보존의 의미가 크다면 안동 하회마을은 아직도 생생한 삶의 향기가 마을을 채우고 있었다. 그렇게 하회마을 사람들 더러는 농사를 짓고 더러는 전통한옥 민박을 운영하며 더러는 시내로 직장을 다니며 600년 세월에도 변함없이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집 앞마당까지 아무 때고 찾아오는 외지 사람들이 많아 불편할 일도 많을 텐데, 600년 마을을 지켜온 마을 사람들의 내공이랄까. 내 집 찾아온 손님처럼 마을 사람들은 외지사람, 관광객들을 싫은 내색 없이 반겼다.
마을 초입의 관광안내소를 지나 곧게 걸어가니 나루터가 나온다. 3천 원을 주고 나룻배를 타고 마을을 S자로 감싸 흐르는 낙동강을 건넜다. 나룻배라지만 현대식 모터가 장착되어 있어 2~3분이면 강을 건널 수 있다. 잠시 잠깐이지만 ‘나룻배’라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경험을 한듯하다. 옥연정사를 지나 부용대에 오른다. 도시인 대부분이 그렇듯 15분 안팎의 비탈진 산길을 오르는데도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부용대 정상에 오르니 절벽 아래로 그 옛날 위엄을 떨며 한시대를 풍미했을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한눈에 들어온다. 어림도 할 수 없는 600년 세월을 견뎌온 하회마을이 마음속 깊이 각인되는 순간이다.
갓 쓴 집배원, 그도 매일 고향집을 찾는다
부용대에서 내려와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입구에서 철저하게 차량을 제한한 탓일까, 마을은 관광객이 많았어도 생각만큼 소란스럽지도 번잡하지도 않았다(하회마을은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로 마을 거주자들을 제외한 관광객들의 차량을 제한하고 있다. 600년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한 노력 중의 하나다). 마을 사람들은 골목을 지나는 관광객에게 기분 좋은 인사를 건넸고 관광객들은 행여나 마을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세라 조심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래서 기와집 좁은 돌담길에서 만나는 사람은 주민이든 관광객이든 정답게 이야기 나누며 잠깐이지만 시골집 아버지, 어머니를 찾아온 느낌이 들기도 하고, 객지나간 자식을 맞이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고 했다.
“하회마을은 역사 문화적으로도 특별한 가치를 지닐 테지만 제 개인적으로도 특별한 곳입니다. 오랜 시간 이곳을 담당하면서 마을은 두 번째 고향이 되었고 마을 분들은 고향 부모님처럼, 형님처럼 늘 반갑게 맞아주시니 일일이 발품으로 전하는 우편물 배달이지만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방송에서, 신문기사에서만 만났던 한복에 갓을 쓴 김태원 집배원을 만나 나눈 이야기 끝에 들려온 말이다. 김태원 집배원은 늘 고향집을 찾는 마음으로 매일 하회마을 골목골목 집집마다에 우편물을 배달하고 있다.
한복에 갓을 쓰고 옛날 복장을 한 김태원 집배원은 하회마을의 또 다른 명물이 되었다. 우편물 배달만으로도 바쁜 그는 전통복장의 집배원에게 사진 한번 찍자는 관광객의 요청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했다. 해서 김태원 집배원은 아무리 바빠도 관광객의 청을 거절하지 않는다. 함께하는 짧은 순간이 마을을 알리고 풍산우체국을 알리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의 생각이기 때문. 대신 김태원 집배원은 누구보다도 빠른 걸음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다. 때마침 만난 그 자리도 베트남 관광객들의 사진 모델이 되어 주고 있었다. 어느 집 우편함에 우편물을 넣고 돌아서는 그늘 신기하게 여긴 외국 관광객들이 달려가 붙잡아 세운 것. 웃는 얼굴로 몇 번이고 카메라 셔터에 웃음꽃을 피운 그다. 그들 눈에 왜 신기하지 않겠는가, 우리들도 갓을 쓴 집배원이 그저 신기할 뿐인데…. 그런 생각을 해본다. 지역마다 그 지역의 문화적 특징을 나타낼 수 있는 집배원, 집배복장이 있다면 어떨까 하는.
경북 풍산우체국 김태원 집배원
63년 종부, 모두의 할머니이자 어머니를 만나다
600년 풍산류씨 동성마을로 유명한 안동 하회마을의 가장 오래된 종택은 풍산류씨 대종택 양진당과 서애 류성룡 선생의 종택 충효당이다. 두 종택은 좁다란 길을 사이로 있다. 마침 양진당은 제사를 모시는 날이라 안채로 들어가지 못하고 사랑채를 둘러보며 한때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귀감이 되었을 양반가의 지난날을 상상해보았다. 발길을 옮겨 엘리자베스 여왕과 故노무현 전 대통령이 방문했던 충효당으로 갔다. 충효당은 서애 류성룡 선생이 임종할 무렵 자손들이 꼭 지킬 덕목으로 권한 ‘충과 효 외에 달리 할 일은 없느니라’는 시 구절을 받들어 지은 것이다. 총 52칸의 건물로, 행랑채 뒤편에 ‘ㅁ’자형 안채와 안채 앞쪽 우측에 연접되어 돌출한 ‘ㅡ’자형 사랑채가 자리 잡고 있다. 이날은 우연히도 국내 3번째 이지스함인 서애 류성룡함을 기념해 14대 종손 류영하(85세) 선생이 사랑채에서 해군 장교들에게 서애 선생의 학문과 정신을 강의하고 있었다. 최근 몸이 안 좋아 입원했다 퇴원한 류영하 선생은 1시간을 선채로 서애 선생의 가르침을 전했다. 고령에 편치 않은 몸이지만 선생은 조상의 유고한 정신문화를 전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나중에 선생과 이야기 나누며 힘이 드신데 왜 앉아서 하시지 않았느냐 묻자, 조상을 알리고 나라의 중요한 일을 하는 장교들 앞에서 어찌 앉아 이야길 하느냐는 것. 힘들어도 서서 전하는 것이 도리다 했다).
조심스럽게 안채로 들어섰다. 대청마루를 오가며 집안일을 하는 할머니 한 분이 보인다. 바로 충효당 14대 종부 최소희 할머니(83세). 최소희 할머니는 20살에 시집와 종가를 살피며 자식들을 번듯하게 키워낸 장한 종부이자 어머니. 경주에서 알아주는 최부잣집(최준 선생이 할아버지)의 둘째딸로 태어나 20살에 22살 안동 류영하라는 총각과 얼굴도 모른 채 혼인을 했다. 당시 류영하 선생은 서울에서 의대를 다니고 있었고 그런 그가 졸업을 하고 안동에 내려와 의사를 하며 마을 사람들을 돕고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류영하 선생은 그러나 전공을 생물학과로 변경, 1971년까지 서울에서 생물교사를 했다. 1971년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종부 최소희 할머니는 주저 없이 남편을 따라 하회마을 충효당으로 들어왔다. 당연한 삶이라 생각했고, 결혼해서 지금까지 63년째 충효당 14대 종부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하회마을. 팔작지붕 대궐 같은 전통한옥도 아름답지만 나지막한 초가지붕은 그 옛날의 정취를 더하고 그 골목에서 만나는 사람들, 풍경들은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을 만큼 정겹다.
최소희 할머니는 일 년이면 큰 제사만 14번, 위로 5대까지 제사를 모신다고 했다. 지금이야 부엌일 하기가 수월해졌지만 그 옛날 특히나 겨울이면 부엌일 하기가 너무나 힘들었다고. 그래도 조상을 모시고 종가를 살피는, 나아가 남편과 자식의 안위를 돌보는 일이라 생각하고 정성을 다했다고 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 종부의 마음가짐, 행실에 따라 종가의 앞날이 달렸다는 믿음 때문이다.
최소희 할머니는 3년 전까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시어머니님과 나는 고부유친(姑婦有親) 했어. 부자(父子) 사이도 좋아야 하지만 고부 사이가 좋아야 집안이 편안해. 시어머니는 남편의 두 번째 어머니였는데 나랑은 12살 차이밖에 안 났어. 그래도 어머니로, 며느리로 서로를 아끼며 살았지. 시어머니랑 나랑 사이가 좋으니까 자식들 사이도 좋고 집안 사람들도 두루두루 사이가 좋았어.” 최소희 할머니는 자신의 며느리들에게도 ‘고부유친’을 이야기한다고. 딸이든 며느리든 서로 존중하며 사이좋게 지냄이 최고라고 말씀하신다.
사랑채에서 강의를 끝낸 14대 종손 류영하 선생이 다소 지친 기색으로 대청마루에 올라앉으신다. 할머니는 시원한 물을 드리며 이마로 흐른 땀을 손수 닦아주신다. “이 사람 덕분에 종택이 편안해. 종가 사람들한테 양보 잘하고 잘 거두고, 윗사람 티 안내니까 다들 좋아하지. 그러니까 집안이 편안하고. ‘당신 그동안 수고했소’” 류영하 선생이 넌지시 할머니의 손을 잡는다. 63년 함께한 사랑이고 믿음이고 정의 표현일터. 남편을 높이고, 아내를 존중하니 집안은 당연히 편안할 터이다. 그래서 그 집은 자식들이 언제고 찾아가 쉬고 싶은,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하고 싶은 그런 고향집일 테다. 어느새 점심상이 차려졌다. 종손, 종부의 밥상이 소박하기 그지없다. 평생을 그리 살아온 종손부부의 지난날이 전해진다. 가을의 길목, 고향집이 그립다.
충효당 내부. 52칸 충효당의 집은 나이 든 종부의 손길이 곳곳에 닿아 600년 세월이 흘렀어도 반짝반짝 윤이 났다. 할머니에게 보낸 손자들의 애틋한 편지를 간직한 종부의 마음도 느껴진다.
안동 하회마을 여행을 마치고 안동우체국에 들러 하회별신굿탈놀이 관광통신일부인을 찍었다. 하회마을의 여운을 오래도록 기억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