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우체국
원상호 집배원과 마음의 어머니 만나다
백두대간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바우길
섭씨 35도를 넘는 불볕보다 더 괴로운 것은 대지가 흠뻑 머금고 있다가 뿜어대는 습기다. 하지만 다행히 숲에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다. 숲은 여름철 태양의 무자비함으로부터 안전한 지대다. 총연장 300km 17개 구간으로 이루어진 바우길은 전체의 70%가 숲을 관통한다. 바우길은 이태 전 이맘때부터 강릉이 고향인 소설가 이순원과 산악인 이기호가 매주 발서슴하며 낸 산책로다. 백두대간에서 경포와 정동진까지 이어지는 바우길은 산과 바다를 아우르는 매력적인 길이다. 타 지역 사람들이 강원도를 가리켜 흔히 ‘감자바위’라고 부르곤 하는데, 바위의 강원도 방언이 ‘바우’다. 그러니까 바우길은 단지 현재 개척된 강릉이나 평창에 국한된 길이라고 할 수 없다. 앞으로도 그것은 고성이든, 태백이든, 정선이든 감자바위 구석구석의 걷고 싶은 길로 더 연장될 것이기에 특정 시·군의 길이 아니라 강원도의 길이라고 해야 맞다. 한편 ‘바우’에는 건강이라는 키워드가 중의적으로 담겨 있다. 바빌로니아 신화에 등장하는 건강의 여신 이름이 바우다. 타박타박 걷노라면 심신의 병이 치유되는 길, 강원도 바우길은 생명수를 머금은 축복의 길이다. 이토록 멋지고 소중한 길을 강릉우체국 원상호 집배원과 함께 걸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바우길 중 11구간에 해당하는 신사임당길을 걸었다.
도배의 미풍 남아 있는 시골마을
길은 강릉시 성산면 위촌리 송양초등학교 앞에서 시작됐다. 바우길을 낸 이순원의 모교다. 위촌리는 해마다 설 다음날이면 도배식을 할 만큼 전통이 남아 있는 시골마을이다. ‘도배’는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절을 하는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합동세배인 셈인데, 위촌리 도배식은 조선 중기 율곡이 만든 서원향약(1571년 율곡이 청주목사로 부임하여 제정한 것으로 유교적 예절과 풍속을 향촌사회에 보급하기 위한 규약)에서 비롯됐다. 삼사십 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의 어느 시골이나 도배의 미풍이 남아 있는 곳이 많았는데, 요즘은 도통 찾아볼 수 없다.
신사임당길은 송양초등학교에서부터 출발해 간촌산길, 카페 ‘구름 위의 산책’, 죽헌저수지, 오죽헌, 선교장, 시루봉를 경유해 경포호로 끝을 맺는다. 총 16.4km 거리로 6시간쯤 소요된다. 무리하지 않고 슬슬 걷기에 좋은 정도다. 다행이라는 여겨지는데, 그것은 단지 이 시점에서 안도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 옛날 지아비를 만나기 위해 어린 율곡을 업고 한양으로 걸어가야 했던 신사임당을 생각하면 조그만 언덕마저 너무 아프게 느껴진다. 비록 신사임당을 오늘날 직접 만날 수는 없지만, 이 길에서는 또 다른 신사임당들과 조우한다. 논과 밭 그리고 누추하지만 포근한 집에서 만나는 이 시대의 어머니들, 자식과 남편 걱정이 인생의 전부인 그들과의 만남이 즐겁다.
신사임당이 율곡 이이를 업고 지아비를 만나러 가던 길. 신사임당과 이이는 없어도 그 길엔 애틋한 어미의 마음이 남아 있다.
강릉우체국 원상호 집배원
쉬어가라 챙겨주는 길 위의 신사임당들
간촌산길을 넘어 죽헌저수지 가는 길에 만난 어머니는 참 따뜻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유천동, 사람들끼리 부르기로는 아랫느릅내의 어머니 이순녀 씨. 바깥양반을 떠나보낸 지 꽤 오래됐다는 그이는 아들손자와 산다고 했다. 옥수수며, 콩, 감자, 고구마 따위를 조금씩 심어 키우며 소일거리를 하는데 지나가는 낯선 이의 갈증이 염려되는지 물이나 마시고 가라 붙든다. 떡을 만들기 위해 삭힌 감자를 으깨어 채로 거르다 말고 손님을 대접하는 그이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두꺼운 가마솥 뚜껑을 번쩍 들어 올린다. 가마솥에 찐 옥수수야말로 최고라며 조금 기다렸다가 먹고 가라는 그 말에 벌써 배가 부르다. 이 특별한 경험들이 동행한 원상호 집배원에게는 늘 있는 일이었다. 그는 이미 신사임당길의 모든 어머니에게 아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길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때쯤 이상한 곳 하나를 지나게 된다. 카페 ‘구름 위의 산책’이다. 죽헌저수지를 끼고 앉은 이 카페는 추억을 파는 만물상이다. 15년 넘게 이 카페를 운영해왔다는 주인은 어디서 모았는지 수천 종류의 오래된 물건들을 수집해서 전시해 놓았다. 카페라기보다는 박물관에 가깝다. 벼루, 붓, 삼태기, 물펌프, 지게, 쟁기, 장독, 괘종시계…. 정오부터 문을 열지만 카페는 늘 열려 있고 불이 켜져 있다. 나그네들을 위한 주인의 배려다.
금강소나무가 품격을 높이는 길
죽헌저수지를 지나자 길은 오죽헌과 선교장으로 이어진다. 오죽헌은 신사임당과 율곡이 태어난 곳이다. 신사임당의 외증조부인 최치운이 지은 곳으로 국가보물 165호로 지정돼 있다. 규모는 크지 않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소박한 건물이다. 신사임당은 이곳에서 셋째아들 율곡 등 4남 3녀를 낳아 길렀다. 그는 시서화에 능한 천재였지만, 그것보다 율곡을 길러 낸 현명한 어머니로 칭송받았다. 자신을 버리고 남편과 자식을 위해 헌신한 신사임당의 이야기를 나누다가 원 집배원은 집에 계신 어머니를 떠올리며 울컥했다. 10년 전 암에 걸려 고통을 받으시다가 그러께 기적처럼 완치 판정을 받으신 어머니다. 어머니만 생각하면 늘 측은하고 한없이 죄송스럽다고.
사실 신사임당길의 풍경은 소소하다. 압도할 만한 그림은 없다. 그럼에도 이 길은 품격이 느껴진다. 금강소나무 때문이다. 숲길의 대부분에 금강소나무가 심어져 있다. 금강소나무는 춘양목 혹은 황장목이라고 하는 최고급 소나무다. 꼬불꼬불한 일반 소나무와 달리 줄기가 올바르며 마디가 길고 껍질이 유난히 붉다. 우리나라 최고의 전통가옥으로 선정된 선교장 뒤편으로 특히 아름드리 금강소나무들이 숲을 형성하고 있다. 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 5호에 이름을 올린 선교장은 효령대군의 11대 손인 이내번 때 처음 짓기 시작한 99칸의 사대부가다. 수많은 권세가들이 묵었고, 그중에는 흥선대원군도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신사임당길의 나머지인 경포대에서 풍류깨나 즐겼을 것이다. 하늘에 뜬 달, 호수에 뜬 달, 바다에 뜬 달, 술잔에도 비치어 뜬 달, 마지막으로 님의 눈 속에 뜬 달을 바라보며….
신사임당길을 포함한 강원 바우길. 그 길은 언제고 걷고 싶은 우리 모두의 강원도의 길이고 생명의 길이고, 어머니의 길이었다. 그곳에서 만나는 모든 어머니들은 신사임당이 되어 오가는 사람들에게 푸근한 정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신사임당길을 지나 강릉우체국에 들러 오죽헌 관광통신일부인을 찍었다. 강릉 신사임당길 여행을 더욱 특별하게 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