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우체국
고경식 집배원과 함께 달리는 가을들녘
소나무보다 더 푸른 새벽안개
첫새벽 도착을 목적으로 길을 떠난다. 이맘때 보은으로 가는 길은 그래야 한다. 안개 때문이다. 절기상 찬 이슬이 맺힌다는 한로(10월9일)를 넘어서면서부터 일교차가 커지자 마치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안개가 새벽의 시간을 온전히 차지한다. 맑은 날이면 여지없다. 대청호에 물을 대는 보청천과 삼가천이 동서남북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데다가 곳곳에 크고 작은 저수지들도 있어서 안개발생 요건을 완벽히 충족시킨다. 안개는 밤사이 차가워진 공기가 따뜻한 수면과 만나면서 생긴다. 이 지역의 안개는 사실 생업자들에게는 골칫거리다. 자동차의 바퀴를 도로에 달라붙게 하다시피 만들고, 새벽일을 챙겨야 할 농부들의 시간도 그만큼 빼앗아 간다. 하지만 풍경에 초점을 맞추고 바라볼 때, 안개만큼 낭만적인 것도 없다.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렸다 지웠다 농(濃)과 담(淡)을 먹였다 풀었다 자유자재로 조절하며 관조자의 마음을 훔친다.
보은 어디나 안개로 뒤덮이지 않는 곳이 없지만, 그곳 중에서도 특히 탄부면 임한리로 먼저 향한다. 안개와 소나무가 그리는 수묵화를 감상하고 싶어서다. 임한리는 2007년 말 개통된 당진상주간고속국도 속리산나들목에서 동쪽으로 약 2km 떨어진 곳에 있다. 은하수를 안은 맑은 하늘은 임한리에 가까워오면서 갑자기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안개로 뒤덮인다. 그 안개속을 무동력 배를 타고 노저어 가듯 천천히 나아가다 보면, 왼쪽에 실루엣으로 잡히는 자그마한 숲이 나타난다. 250년 이상 된 노송 수백 그루가 모여 이룬 임한리 솔밭이다.
솔밭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역시 새벽안개에 젖었을 때다. 푸른색의 묵직한 안개가 숲을 휘감고 나무와 나무 사이의 여백을 모두 채운다. 소나무 너머로 보였던 난삽했던 풍경들이 안개에 밀려 모두 사라지고, 남는 것은 오로지 형극의 세월을 산 듯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거리는 소나무들뿐이다. 임한리의 솔숲은 규모면에서는 경주의 삼릉이나 공주의 곰나루솔숲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풍경은 규모로 논하는 게 아니다. 비록 작지만 이곳의 솔숲이 풍기는 운치만은 그 어느 것에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 많던 하늘의 별을 삼키고 삽시간에 솔숲 주위의 마을을 지우던 안개는 아침햇살에 사르르 녹아내리면서 끈끈한 장력을 풀어헤친다. 안개와 함께 새벽의 푸름이 밀려가고, 사방이 훤해지며 하늘이 열린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안개는 숲 사이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쏟아지는 빛에 희부연 줄을 잠시 그어대더니 이윽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태양이 떠오르자 고개를 숙였던 해바라기들이 일제히 잠에서 깨며 기지개를 켠다. 솔밭 주위로 수만 평의 밭에 해바라기가 심겨 있다. 여름꽃임에 분명하지만, 이 계절에 맞춰 심은 탓에 해바라기는 여전히 생생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보은군 임한리. 희뿌연 새벽안개에 새벽일 챙겨야 할 농부들은 불평스러워도 풍경에 초점을 맞추면 안개만큼 낭만적인 것도 없다. 선명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풍경, 마을은 아름답다.
메밀꽃 하얀 산촌의 아침
임한리의 안개는 보청천과 삼가천 중에서 후자가 피워 올린 것이다. 삼가천은 내속리면 비룡저수지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다. 임한리에서 북동쪽 속리산 방면으로 길을 달리면 이 저수지가 나온다. 그런데 비룡저수지를 염두에 두고 온 것은 아니다. 그 너머에 있는 구병리에 들고자 했기 때문에 이곳으로 길을 잡았다.
구병리는 속리산 천왕봉과 구병산에 가로 놓인 산촌이다. 비룡저수지를 왼쪽으로 돌아가면 이 마을에 닿게 되는데, 거의 오지를 방불케 한다. 그야말로 첩첩산중에 앉아 있다. 조선시대 정감록에 이곳을 조선 십승지 중 하나로 꼽았다고 한다. 정감록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19세기 중엽부터 모여들어 느진모기, 된모기, 웃멍에모기 등의 자연마을을 형성했고 1914년 이것들이 통폐합돼 구병리가 되었다. 마을이 위치한 지세가 소의 자궁처럼 생겼다고 해서 우복동(牛福洞)으로 불리기도 하는 구병리에는 약 25가구가 산다. 이삼십 년 전만 해도 그 배는 넘었다는데, 젊은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가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그래도 요즘은 팜스테이마을로 이름이 나면서 활기가 돈다. 집을 새로 짓거나 단장해서 손님을 맞는다. 비록 남루했지만 그래도 산촌의 정취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던 옛집들이 허물어지고, 번듯한 집들이 올려지는 것이 한편으로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구병리 팜스테이프로그램은 참 다양하다. 봄가을로 감자와 고구마캐기, 토마토와 고추따기 등 농사체험이 준비돼 있다. 두부만들기, 떡메치기, 메밀국수만들기 등의 전통먹거리 관련 체험은 상시 진행된다. 이곳에서는 매달 다른 술을 맛볼 수 있다. 1월에는 송로주, 2월에는 산사주, 3월에는 마가목주 이런 식이다. 11월에는 보리뚝주가 나온다. 보리수나무의 열매로 담은 술이다. 피로회복과 출혈성 질환에 좋은 약주다.
사실 구병리의 변화를 가져온 가장 큰 힘은 메밀꽃에 있다. 해마다 가을이면 구병리에서는 메밀꽃축제를 연다. 메밀밭 하면 강원도 봉평이나 경북 봉화, 전북 고창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고즈넉한 산촌을 밝히는 구병리의 메밀밭도 그 유명한 곳들과 함께 여행지 목록에 이름을 올려도 좋을 만큼 아름답다. 척박한 산을 일궈 마련한 손바닥만한 밭들이 물고기 비늘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고, 거기 가득한 하얀 메밀꽃 풍경.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구병리는 알아주는 장수마을이기도 하다. 전혀 오염되지 않은 자연 덕분인지 팔구십 세는 기본이다. 백 세를 넘긴 노인들도 많다. 마을을 한 바퀴 휘돌고 나가려다 싸리비가 세워진 집이 하나 있어 그 마당으로 들었다. 13년 전 바깥어른을 보내고 홀로 사는 김치호 할머니 댁이다. 올해로 일흔일곱인 김 할머니는 장수마을 구병리에서 청년축에 든다. 아직 허리 하나 굽지 않은 김 할머니는 해마다 구병산에서 싸리나무를 꺾어와 빗자루를 삼는다고 했다. 싸리비가 눈 쓰는 데는 그만이라며, 작년에 한몫 단단히 했다고 자랑이다.
보은우체국 고경식, 김병철집배원
황금들녘과 안개와 느티나무의 하모니
때와 장소에 따라서 같은 것이라도 대접이 달라진다. 아무리 비싸고 귀할지라도 그것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곳에서는 돌멩이처럼 하찮은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보청천을 낀 마로면 원정리의 느티나무만큼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나무도 드물다. 이 나무는 수령 500년 된 것으로 둥치의 직경이 1m가 넘을 정도로 우람하다. 그런데 보은에는 이 나무 말고도 크고 오래된 느티나무가 많다. 수한면 차정리에는 720년, 회인면 오동리에는 600년 된 느티나무가 있다. 크기도 다들 원정리 것 이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정리 느티나무가 주목받는 이유는 그 주변 풍경 때문이다. 조각조각 모인 논들이 드넓은 평야를 이룬 가운데, 원정리 느티나무는 길게 뻗은 농로 바로 옆에 서 있다. 한가하고 평화롭고 풍요로운 들녘이 이 평범한 나무를 아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일대도 새벽부터 안개가 짙게 끼는 지역인데, 특히 벼수확기의 황금색 논과 느티나무와 안개가 어우러진 풍경이 기막히다. 그러나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그곳을 터전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안개는 반가운 존재가 아니다.
마로면과 장안면을 담당하는 고경식(58) 집배원은 아침마다 길을 나설 때면 늘 조심스럽다고 했다. 1974년 2월에 입사했으니 올해로 벌써 37년째 우편업무를 보지만, 안개에는 적응하기가 도통 쉽지 않다는 그다. 원정리의 안개는 특히 더 오래가서 오전 10시가 다 되어서야 말끔히 걷힌다고 한다. 안개가 걷힌 원정리의 논을 바라보며 그는 수확걱정을 했다. 집에서도 벼농사를 조금 한단다.
“농촌에서는 휴일에도 쉴 새가 없어요. 농사와 가사를 돌봐야 하거든요. 그래서 변변히 가족여행 한 번 못 갔어요. 우리 보은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곳들이 많은데 말이에요. 아무래도 이 가을에는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어서 가족들과 함께 미처 찾지 못했던 보은의 구석구석을 돌아봐야겠어요.”
임한리도 좋고 구병리도 아주 그만이었다고 이야기를 건네고 싶었으나 그것은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렴 이곳이 토박이인 사람이 그것도 모르랴. 그곳들에 더해 우리가 알지 못 하는 그만의 가을빛 여행지가 분명 있을 것이다. 여행지 정보를 들어야 할 것은 그가 아니라 바로 우리다.
충북 보은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속리산이다. 속리산 정이품송까지 둘러보고 보은우체국에 들러 일부인을 찍어보는 것도 좋은 추억을 남기는 방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