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우체국
강신정 집배원과 떠나는 낭만 기차여행
안개의 결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찬란한 섬진강
“아, 거시기 남원 아래 구례 우에 있지라.”
몇 년 전만 해도 곡성이 어디쯤이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남도 사람이 이렇게 답했다. 사실 곡성에는 특별히 내세울만한 것들이 거의 없었다. 그 품 넓은 지리산에서도 제법 비켜서 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곡성에는 섬진강이 흘렀고 증기기관차가 다녔다. 전북 진안에서 발원한 섬진강은 제철소의 뜨거운 열기를 식히러 무려 212km를 달려 저 멀리 광양만으로 내려간다. 곡성에 빌려준 섬진강의 몸길이는 36km. 전체를 생각하면 작은 부분일 뿐이나 여기서 빚어내는 정취의 크기와 무게가 실로 어마어마하다. 특히 곡성에서는 오곡면 압록리에서 보성강을 받아들여 몸집을 불리는데, 이 일대의 겨울 아침이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뜨거운 입김처럼 섬진강이 물안개를 토해내면 근방은 점 하나 찍히지 않은 백지장처럼 모든 것이 지워진다. 동틀 무렵 물안개는 극에 달했다가 그 이후로 서서히 장력을 풀어헤친다. 갈대 우거진 습지와 올해도 잊지 않고 찾아온 철새들이 물안개의 결계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비로소 눈앞에 드러나는 순간, 누구라도 그 찬란함에 말을 잃는다.
폐선된 철로에 새로 다니는 미카형 기관차
때로 섬진강은 첫 기차가 출발하는 시간까지도 안개를 거둬들이지 않는다. 9시 30분 기차는 ‘구’곡성역을 떠나 섬진강변을 따라서 가정역으로 간다. 곡성역 앞에 ‘구’라는 글자가 붙은 이유는 KTX가 다니는 새로운 곡성역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이 기차의 일부 노선이 폐선되었기 때문이다. 전북 익산과 전남 여수를 잇는 전라선은 최근 복선전철화사업을 마무리하면서 필요 없어진 기존의 역사 여러 곳을 폐쇄하였다. 불행히도 새시대의 뒤안으로 밀려난 ‘구’ 곡성역에서 약 700m 북쪽에 ‘신’곡성역이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곡성역에는 사람들이 꾸준히 찾아온다. 기차도 다닌다. 관례대로라면 허물어 없어졌어야 당연한 이 역사는 문화재청으로부터 등록문화재 122호로 선정됐고, 옛 향수를 달래는 증기기관차가 매일 하루 너댓 차례 운행한다.
아주 오래 전 유물처럼 치부되지만, 증기기관차는 1967년까지 우리 땅을 누볐다. 섬진강의 증기기관차는 1919년 도입된 미카형을 본 따 만든 것이다. 실물보다 조금 작다. ‘구’곡성역에서 가정역까지는 왕복 20km의 거리다. 가정역에 30분 동안 정차하는 시간까지 1회 운행에 80분이 소요된다. 190명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이 있고, 150명의 입석 승객을 더 태울 수 있다.
다시금 증기기관차가 다니고 사람들은 그 기차를 타고 이 계절 낭만여행을 한다.
속도가 우선시 되는 요즘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끝없이 낭만을 이야기하며 곡성 기차마을을 찾는다.
(우)곡성우체국 강신정 집배원
사철 어떤 풍경이 12월의 물안개에 비할까
첫 기차는 아침 9시 30분 출발한다. 이 시간에도 물안개가 펄
펄 끓는 날이 가끔 있다. 딱 강물 흐름만큼의 속력으로 달리는 기차를 타고 그 안갯속을 헤쳐가는 기분이란, 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철도공무원 정년퇴임 후 3년 전부터 이 기차를 운전하고 있는 장성만 기관사는 “부지불식간에 눈물이 주룩 날 정도로 고즈넉한 풍경”이라고 했다. 철쭉 피는 5월, 은빛으로 강물이 부서지는 8월, 황금으로 주위가 물드는 10월도 좋지만, 물안개 피는 12월에 비할 바 아니란다. 전날 눈이라도 내리면 더할 나위 없다고 그는 덧붙인다. 물안개와 밤새 내린 눈으로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든 가운데, 검은 두 줄 흔적을 남기며 미끄러져 가는 강변 기차 풍경. 그의 말을 듣노라니 그 그림이 절로 머리에 그려진다. 그는 이따금 “꽤애애액~” 기적을 울리곤 했다. 그 소리에 익숙한 노인들은 지그시 눈을 감았고, 아이들은 마냥 신이 나서 조잘거렸다. 기관차의 증기는 앞 유리창에 닿아 방울로 매달렸다가 바람에 미끄러졌다. 그가 마이크를 잡았다. “침곡, 침곡역 열차 접근합니다.” 침곡역은 레일바이크를 탈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가정역까지 편도 5.1km의 레일을 4륜 바이크를 타고 저어간다. 기차시간과 겹치지 않도록 시간이 잘 조정돼 있다. ‘구’곡성역에도 레일바이크가 있는데, 그것은 1.6km 길이의 순환형이다. 아무래도 섬진강을 오래 기억하기에는 침곡역의 레일바이크가 낫다.
강 따라 남북으로 난 자전거길
침곡역에서 가정역으로 내려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심청이야기마을이 나타난다. 옛 송정마을 터다. 기와 여섯 동과 초가 열두 동으로 구성된 테마마을이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주려는 효녀심청의 이야기를 마을에 담았다. 곡성은 판소리 심청가의 원류가 된 연기설화가 대대로 전해 내려온 고장이다. 현재 심청이야기마을 자리가 아닌 오산면 성덕산과 석곡면 덕망산 사이의 대흥마을 설화다. 맹인 원랑과 딸 홍장의 이야기는 심청전 그대로다.
기차는 이윽고 가정역에 닿으며 뜨거워진 기관을 식힌다. 풍광 좋기로 소문난 가정역 앞은 요즘 다리 공사가 한창이다. 이곳에서 만난 곡성우체국 강신정 집배원에 따르면 지난해 여름 발생했던 태풍 곤파스 여파로 다리가 무너졌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비를 뿌렸고, 사방에서 유입된 물의 힘을 못 이겨 교각이 유실되었다는 것이다. 올 연말 다리는 말짱히 단장을 마칠 예정이다. 매일 섬진강변을 달리며 우편배달을 하는 강 집배원은 증기기관차를 볼 때마다 어렸을 적 추억들이 떠오른다고 했다. 서울에 누나와 큰형이 있어서 방학이면 무궁화호나 통일호를 타고 올라가곤 했는데, 꼬박 하루 다 걸려 도착했지만 삶은 달걀이며 사이다를 사먹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하다고.
가정역 주변으로는 자전거하이킹코스가 잘 닦여 있다. 보통 가정역에서 기차마을 방향으로 가다가 돌다리를 건너 돌아오는 코스를 많이 선택하는데, 가정역에서부터 남쪽으로 압록역까지 다녀오는 왕복 6km 코스도 괜찮다. 압록역 주변은 보성강과 섬진강 두 줄기가 만나 하나가 되다보니 강폭도 넓어지고, 섬진강의 자랑인 모래도 드넓게 펼쳐져 있다. 이곳에서 보성강길을 타고 조금 달리다보면 태안사가 나오는데, 절보다도 숲길이 아주 일품이다. 바람에 낙엽이 비되어 내리는 길이다. 초입에는 조태일문학관이 있다. 태안사 대처승의 4남으로 태어나 실천주의문학인으로 살다 간 그의 시가 이 길에서 읊조리기에는 조금 센가. 그나마 여린 <겨울산>의 부분을 떠올려 본다. ‘야트막한 산등성이를/아침 안개가 기어오른다/눈이 안 덮인 산이지만/내 살결인 양 쓰다듬으며/안쓰러워라, 안쓰러워라/눈을 감으며 산을 오른다/눈을 뜨면서 산을 오른다’.
섬진강의 사계는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라는 탄성이 나온다. 겨울, 눈꽃으로 뒤덮이는 섬진강변 여행을 마치고 일부인 기록을 남겨보는 것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