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근함에 맛이 있다면 그것은 엄마 품, 그리고 우럭젖국
언뜻 북어국을 닮았으나 담백하고 시원한 국물 맛과 적당한 탄력을 유지한 우럭살은 쉽게 만날 수 없는 특별한 맛을 선물한다.
태안우체국에서 만리포를 향해가는 길. 불과 몇 미터 못 가 나지막한 고개를 넘으면 나타나는 ‘토담집’. 토담은 없지만 겉모습에서 따스한 고향집의 정서가 묻어난다. 입간판에도 이집의 대표메뉴인 우럭젖국과 꽃게장이 눈에 띈다.
식당에 들어서니 주방에서 저녁 손님들을 위한 음식 재료들을 손질하는 것인지 분주하게 움직이는 주인아주머니의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벽에는 메뉴판이 걸렸는데 큰 메뉴판에 큰 글씨로 단 3줄이 전부인 단촐한 메뉴다. 큰 욕심 없이 잘하는 메뉴 몇 가지에 집중하는 모습에서 맛집의 풍모가 느껴졌다.
태안은 본래 꽃게가 많이 나 꽃게장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우럭젖국은 너무도 생소한 메뉴다. 우럭을 주재료로 한 탕국일 것이란 생각이 당장 들기는 했지만 ‘젖국’에서 쉽게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것은 다른 곳에서 접하기 힘든 음식임에 분명했다.
혹시 젖국에 젓갈이 들어가는지 물었으나 젓갈은 들어가지 않는단다. 일단 음식과 대면한 후 생각을 이어가기로 했다. 주문한 음식은 식객의 허기를 눈치 챘는지 서둘러 차려졌다. 한정식을 주문한 것도 아닌데 10첩 상이라니. 인심 좋은 주인장의 마음이 전해져와 초겨울 식은 맘까지도 따뜻하게 데워주는 듯하다.
갈치속젓, 가지무침, 말린 고등어조림 등 반찬의 역할은 조연이라지만 그 면면이 얼마나 화려한지 잠시 우럭젖국을 잊게 만들 정도였다. 각각의 반찬이 선사하는 맛의 깊이에 엄지를 치켜세웠다.
젖국은 뜨겁게 맛보라고 가스버너 위 큰 냄비에 담겨져 나왔다. 뽀얀 국물 사이로 담뿍 담긴 우럭살과 깍둑썰기로 썰어진 부드러운 하얀 두부가 입맛을 다시기에 부족함이 없다. 우윳빛처럼 하얀 국물과 송송 썬 파, 빨간 고추가 곁들어지니 눈으로 먹는 맛도 제법 좋다. 식탐을 버리려 한들 ‘음식 앞에 장사 없다’는 옛말처럼 첫 술부터 푸짐하게 담겨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가장 비슷한 음식을 찾으라면 아마도 북어국일 게다. 우럭이 많이 잡히는 서해에서는 우럭을 말려 우럭포를 만들어 각종 요리를 해 먹었는데 이 우럭포로 국을 끓인 것이 우럭젖국인 것이다. 국물 맛은 무척 담백하고 시원한데 무엇보다 살집이 제법 통통하고 쫄깃한 식감의 우럭을 씹는 맛이 북어국의 그것보다 한수 위라 하겠다. 국물에 아주 풀어헤쳐지지도 않고 적당한 탄력을 유지한 우럭살은 분명 쉽게 만날 수 없는 특별한 맛을 선물하고 있었다.
우럭젖국은 왜 ‘젖국’일까?
우럭젖국이 태안 지방의 토속음식인 것은 주인장이 얘기하는 이 지역의 제사문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태안에서는 제사를 지내고 술안주로 우럭포를 많이 먹었어요. 그때 살은 다 발라먹고 남은 머리, 뼈 등 다른 부위를 버리지 않고 잘 모아 두었다가, 다음 날 집안 어르신이 젖국 쪄오라고 하면 쌀뜨물에 고추, 두부, 육쪽마늘을 넣고 끓여 올렸어요.”
우럭포는 말릴 때 소금 간을 하기 때문에 우럭젖국을 끓일 때는 젓갈이나 소금 등 간을 하지 않는다. 때문에 젓갈을 넣어서 ‘젓국’이라는 말은 맞지 않다. 왜 우럭젖국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뽀얀 국물이 우유빛과 닮았기에 지어지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 있었다.
우럭젖국과 함께 토담집의 인기메뉴는 꽃게장. 주인장이 직접 양봉하는 벌집을 함께 넣어 만든 양념간장으로 만든다.
꽃게가 꽃게인 것은 마음씀이 고와서다
토담집의 유명세에는 우럭젖국과 더불어 꽃게장의 혁혁한 공이 있었다. 제철 잡은 꽃게로 장을 담글 때 주인장이 직접 양봉하는 벌집을 함께 넣어 만든 양념간장을 쓰는데 이렇게 만든 꽃게장에는 비린 맛은 사라지고 게살과 향긋한 바다향 만이 남는다. 1인분을 시키면 꽃게장 한 마리가 나오는데 다리에까지 꽉 차오른 살과 알이 실해 부족한 느낌은 없다. 알이 담긴 게껍데기에 하얀 쌀밥을 슥슥 비벼 먹는 것은 기본이요, 비빈 밥을 찬으로 나오는 서해안 마른김에 싸먹으면 최고의 별미다.
겨우내 살을 찌우고 알을 품어 기막히게 행복한 맛을 선사하는 꽃게는 꽃처럼 예쁜 무늬뿐 아니라 마음씀이 꽃처럼 고와 꽃게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만리포해수욕장을 품고 있는 태안의 바다.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 살려낸 ‘기적의 바다’로 다시 태어나고있는 곳이다.
태안에서 다시 만나자
주인아주머니와 거부할 수 없는 폭식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나눈 후 만리포로 향했다. 기름유출사고 후 3년. 바다는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한 마음에 속도를 높였다. 똑딱선 기적소리가 젊은 꿈을 싣고 출항하던 만리포는 새로운 희망으로 가득 찼을 것 같은 기분에 조금은 들뜬 맘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정표를 따라 들어온 만리포 해변은 적막함마저 감도는 영락없이 쓸쓸한 겨울바다의 모습이었다.
태안우체국 곽성순 경영지도실장은 지금이 태안지역의 최고 비수기라고 했다. 바다는 이미 기름유출사고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각종 기념탑만이 아직도 아물지 않았을 태안 앞바다의 상처를 상기시키고 있었다. 김석중 태안우체국장의 말이 이어졌다.
“지난 여름 태안을 관통한 태풍 곤파스의 피해는 상상하시는 것보다 더 크다고 할 수 있어요. 대하양식장에 전기가 3일 동안 끊기면서 한 양식장은 3억 이상의 재산적 손실을 입었고, 정말 일부러 훑어간 듯 벼나락은 모두 땅으로 떨어졌죠. 조경수는 말할 것도 없고, 오시며 보셨겠지만 가로수 잎사귀마저 모두 훑고 가서 나무들은 때 아닌 새순을 피우기도 했어요. 많은 기자들이 가을에 피어난 파릇한 잎사귀를 찍으러 모여들었지만 웃지 못할 슬픈 광경이었어요.”
아직도 마무리되지 않은 기름유출사고 보상문제로 주민들의 사기가 떨어져있는 가운데 곤파스 피해까지 겹치면서 태안지역의 분위기는 많이 가라앉아 있다고 했다. 태안우체국에서는 주민들이 우체국에서 여유를 찾을 수 있도록 편안한 음악을 틀고 국화꽃과 화사한 장식들로 꾸민 쉼터를 만들어 언제든지 편하게 와서 쉴 수 있도록 배려했다.
3년 전 노란 방재복을 입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여들었던 태안이지만 이제 우리는 기름유출사고의 피해지로만 인식하고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태안에서 다시 만나자. 우리 힘을 합쳐 살려낸 그 바다를 만나서 기쁨을 함께 나누자. 그 곳에는 엄마 품처럼 포근한 우럭젖국과 이 겨울을 감동으로 물들일 아름다운 꽃게장이 반갑게 맞을 준비를 끝냈으니까.
Tip 토담집
따스한 고향집의 정서가 묻어나는 태안의 ‘토담집’. 서해에서 많이 잡히는 우럭으로 만든 우럭젖국과 제철에 잡아 만든 꽃게장의 맛이 일품인 곳이다.
메뉴 우럭젖국(1인 9천 원), 꽃게장(1인 2만 1천 원)
예약 041) 674-4561따스한 고향집의 정서가 묻어나는 태안의 ‘토담집’.서해에서 많이 잡히는 우럭으로 만든 우럭젖국과제철에 잡아 만든 꽃게장의 맛이 일품인 곳이다.
주차 주차가능
소재 충남 태안군 태안읍 남문리 468-6가는길 (태안우체국 - 남면사거리에서 직진 - 서산지원 태안군법원 맞은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