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전통시장을 찾아가는 길
부산은 가까이 있는 일본부터 태평양 너머로 나아가는 항구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항구 도시 부산을 통해 이뤄졌다. 1876년 강화도조약에 의한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부산 중구 지역에 대거 이주해왔다. 그때부터 부산의 중심은 중구로 이동했다. 중구 부평동에 있는 부평시장은 1910년 우리나라 최초의 공설시장이 된다. 이웃해 있는 국제시장은 1945년부터 시작됐다. 국제시장은 해방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려던 일본인들이 가지고 온 물품을 공터에 내다 팔면서 생겼다. 일본인들이 떠난 후에는 귀국 동포들이 고향에 돌아갈 노자를 마련하기 위해 물품을 팔았고, 한국전쟁 때는 함락되지 않은 부산으로 수십만 명의 피란민들이 몰려들어 판을 열었다. 그래서 한때 ‘도떼기시장’이라고 불렸다. 베트남에 파병 가는 군인도, 최초의 브라질 이민 1세대도 부산을 거쳐 떠났다.
부산의 지리적 역사적 특성이 결합해 부산의 음식이 탄생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들여온 어묵은 해방 이후 부산의 대표 먹을거리로 자리매김했고 엄격한 품질관리를 거쳐 명품 어묵이 됐다. 또, 냉면은 부산에서 밀면으로 다시 태어났다. 부산깡통시장을 찾아가는 길은 음식을 통해 부산의 역사를 만나는 여정이었다.부산 중구에는 시장이 많다. 부산역에서 도시철도(지하철)를 타고 세 정거장만 가면 자갈치역이다. 자갈치역에 내리면 자갈치시장, 국제시장, 부평깡통시장에 갈 수 있다. 부평깡통시장은 자갈치역에서 도보로 7분 거리에 있다. 골목의 역사를 말해주듯 신식 건물 사이에 간혹 일제강점기 때 지은 건물이 섞여 있다. 시장 이름에 ‘깡통’이 들어가는 이유는 과거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통조림 캔 등을 쌓아 놓고 팔았기 때문이다. 원래는 부평시장이 있고, 그 옆이 깡통시장이었는데 지금은 부평깡통시장이라는 이름으로 합쳐졌다.
국제시장과 부평깡통시장은 길 하나를 사이로 마주 보고 있다. 몇몇 신문 기사와 책에서는 이 일대 상권을 통칭해 ‘국제시장’이라 부른다고 적어 놓았다. 시장 입구에서 노점 상인에게 말을 걸었다. “부산 사람들은 부평깡통시장을 포함한 국제시장 주변 상권을 다 합쳐서 국제시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면서요?” 노점 상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지, 국제시장은 저쪽이고 여기는 부평깡통시장이지. 저기 쓰여 있잖아”라며 시장 간판을 가리켰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부평깡통시장 상인회 홍보이사 정재기 씨도 같은 말을 했다.
부평깡통시장 info
찾아가는 길
부산 도시철도 1호선 자갈치역 3, 5번 출구에서 도보 7분
운영시간 09:00 ~ 24:00 / 야시장 매일 19:30 ~ 24:00
주차 부평공영주차장(85면, 10분당 500원)이 있으나 대중교통 이용 권장
문의 부평깡통시장 상인회 051-243-1128
시장 주변 관광지 보수동 책방골목, 자갈치시장, 감천문화마을
없는 게 없는 부평깡통시장
길 건너 부평깡통시장으로 넘어왔다. 평일 낮이지만 오가는 사람들이 많다. 시장은 역시 사람이 많아야 흥이 난다. 특히 수입 과자를 파는 상점 앞에 사람이 많았다. 상점에는 일본, 미국 등에서 들여온 수많은 수입 과자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만화 <짱구는 못 말려>에 나왔던 과자도 있고 일본산 컵라면도 보인다. 실제 맥주가 담긴 미니어처 맥주 캔도 귀엽다. 수입 잡화점에는 토토로나 페코 등 캐릭터가 그려진 파우치나 우산 등이 눈에 띄었다. 술이나 담배, 화장품, 인테리어 소품을 파는 가게도 많이 보였다. 가게들은 섞여 있다. 옷가게와 신발가게 사이에 반찬가게가 있는가 하면 오래되어 보이는 가게도 있고 멋진 인테리어에 조명까지 잘 꾸며 놓은 가게도 있다. 과자 천 원, 인테리어 소품 이천 원, 가방 한 개 만 원. 적은 돈으로도 살 수 있는 게 많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파는 물건들이 모두 싼 제품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고급 제품을 파는 곳도 있다. ‘은지명품관’은 수입 명품 그릇을 도매로 판다. 비싼 그릇 세트는 수십만 원씩 한다. 은지명품관 박국원 대표는 부평깡통시장에서 장사를 한 지 30년 됐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그릇은 ‘포트메리온’입니다. 요즘에는 폴란드그릇도 많이 찾아요. 여기가 포트메리온 부산 경남 총판입니다.” 포트메리온은 영국 본차이나의 대표 브랜드로 주부들이 선호한다. 매장에서 만난 손님은 “그릇 종류도 많고 백화점보다 값이 저렴해 찾아온다”고 했다.
수입산 명품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명품도 있다. ‘운틴가마’에서는 무쇠로 만든 프라이팬, 냄비, 가마솥, 전골팬 등을 판다. ‘운틴’이란 이름은 ‘운이 틔다’라는 뜻이다. 일반적인 코팅 프라이팬은 코팅이 벗겨지면 해로운 중금속 성분을 같이 먹게 된다. 그러나 무쇠로 만든 프라이팬은 유해물질이 없다. 무쇠에서 나오는 철분은 우리 몸 안의 철분과 같은 성분이기 때문에 무쇠에 요리를 하면 조리가 빠르고 음식 맛도 훨씬 좋아진다고 한다. 운틴가마는 100% 선철을 사용한다. 운틴가마 유정혜 씨는 “3대째 장인정신을 갖고 만든다”고 자랑했다.
부평깡통시장의 맛집
부산을 대표하는 음식에는 돼지국밥, 밀면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부산어묵이다. 시장 한쪽 골목에는 미도어묵, 고래사, 환공어묵, 범표어묵 등 유명한 부산어묵 판매점들이 나란히 있다. 미도어묵은 밀가루 함량이 낮고 어육 함량이 높은 고급 수제어묵으로 유명한데 별도 건물에 ‘미도카페’라는 어묵베이커리도 운영하고 있다. 미도카페 안에 들어가면 1층에 다양한 어묵 제품을 진열해 놓은 곳이 있고, 2층에는 카페가 있다. 어묵면, 어묵고로케, 핫바 등을 사서 커피와 함께 마실 수 있다. 어묵고로케를 전자레인지에 살짝 데워 맛을 봤다. 탱탱한 어묵 살과 부드러운 고로케 속이 잘 어우러져 맛이 좋았다. 어묵 세트를 3만 원 이상 구입하면 택배로 보내준다. 2층 카페는 화요일에 쉰다.어묵이 들어간 음식 중에 아주 유명해진 것이 있다. ‘깡통할매 유부전골’이다. 간판도 제대로 없는 집인데 찾아오는 사람들은 엄청나게 많다. 유부전골을 주문하면 유부보따리와 어묵을 넘칠 정도로 한 그릇 가득 담아준다. 유부보따리란 유부 안에 당면과 각종 채소, 고기 등을 넣고 미나리로 묶어 만든 음식이다. 노점상을 하던 정선애 할머니가 개발했다. 약간 짭짤하게 간이 되어 있는 유부보따리와 미나리의 식감, 어묵의 조화가 훌륭하다. 가격은 4000원. 선불이다. 포장 판매도 한다.
비빔당면도 부평깡통시장이 원조다. 비빔당면을 주문하면 부드러운 당면과 고추장에 파를 다져 넣은 양념장, 연한 시금치, 채 썬 어묵과 단무지가 한 그릇 가득 담겨 나온다. 싹싹 비벼 먹으면 기름에 볶는 잡채와 달리 느끼하지 않아 좋다. 가격은 5,000원. 역시 선불이다. 물당면도 있다. ‘원조비빔당면’은 방송을 통해 많이 알려졌다. 입구부터 연예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 많이 붙어있다. 식당 안에 들어서면 인형, 낡은 카메라, 오래된 악기 같은 것들이벽에 가득 늘어서 있다. 예전에 화재가 난 적이 있는데 그을린벽을 가리기 위해 인형 몇 개를 가져다 놓기 시작했다. 오가는 사람들에게도 안 쓰는 물건 있으면 가져다 달라고 했는데 지금처럼 식당 벽면을 가득 채우게 됐다.
냉채족발도 부평깡통시장 근처 족발골목에서 시작했다. 냉채족발은 족발을 삶아 얇게 썰어낸 뒤 매콤달콤한 소스에 무쳐 해파리와 오이를 함께 내놓는 것이다. 부평족발골목에는 한양족발, 부산족발 등 이름난 족발집들이 포진해 있다.부평깡통시장에는 맛집이 참 많다. 방학 기간 이름난 맛집에 들어가려면 긴 줄 끝에 서서 기다리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거인통닭’ 은 부산발전연구원이 선정한 2015년 부산 10대 히트상품에도 이름을 올렸다. 거인통닭의 특징은 세 가지다. 닭이 크고, 소금에 절인 닭이 아닌 생닭에 직접 양념한다. 그리고 가마솥에 두 번 튀겨낸다. ‘이가네 떡볶이’는 SBS ‘백종원의 삼대천왕’ 방송에 출연해 우승한 뒤 간판도 ‘이가네 삼대천왕 떡볶이’로 바꿔 달았다. 흔히 보는 가는 떡이 아니라 굵은 가래떡을 사용한다. 가게 안에는 앉아서 먹을 수 있는 의자조차 없지만 늘 사람들로 붐빈다. 아쉽게도 명물이었던 단팥죽 노점은 만날 수 없었다. 아케이드 공사를 하며 노점을 철수시켰기 때문이다. 이젠 50년 전통의 노점 할머니가 만드는 단팥죽을 만날 수 없다. 그러나 아직 단팥죽을 파는 점포들이 남아 있고 국제시장 옆에도 단팥죽 거리가 따로 있다.
매일 밤 열리는 맛의 향연
매일 저녁 7시 30분이 되면 시장 골목을 따라 야시장이 열린다. 야시장 먹을거리는 좀 더 국제적이다. 인도네시아 볶음국수 미고랭, 베트남 만두 짜조, 중국 냉면구이 등등. 야시장이 유명세를 얻으면서 점포들도 변화가 생겼다. 부산 3대 빵집이라는 ‘겐츠 베이커리’가 야시장이 열리는 골목 안에 입점했다. 야시장이 열리지 않는 시간에도 시장 안과 주변 골목에선 국제적인 먹을거리를 찾아 볼 수 있다. 일본 할배 치즈케이크, 홍콩 에그와플 등등. 심지어 편의점에서 파는 벨기에 초코 아이스크림까지. 먹을거리가 주로 분식이나 간식 종류라 밥을 먹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걱정하지 마시라. 돼지국밥을 파는 ‘양산집’도 있으니까.
부산의 먹을거리에는 같이 나와야 하는 것들이 있다. 순대 먹을 때 막장이 있어야 하고 돼지국밥은 정구지(부추)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간짜장에는 계란프라이가 올라가야 하며 어묵 꼬치 파는 곳에 물떡이 없으면 허전하다. 부평깡통시장에서 배불리 먹은 뒤 뭔가 재미있는 것을 찾는다면 보수동 책방골목에도 들러보길 권한다. 시장에서 길 하나 건너면 있다.
Mini Interview
정재기 | 부평깡통시장 상인회 홍보이사
원조비빔당면의 대표이자 2년 전에는 가수로도 데뷔해 ‘잭키 정’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부평시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공설시장입니다. 역사가 100년도 넘었죠.
‘태평양에 없는 물고기도 부평시장에는 다 있다’라는 말이 있었어요. 부평시장에서 물건을 사면 따로 손질할 필요가 없어요. 그만큼 물건이 좋다는 이야기죠. 요즘은 체인점도 들어오고 야시장도 열리면서 시장의 모습도 변화하고 있습니다. 전통 음식 파는 곳이 사라지는 건 아쉬운 부분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