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지에서 정약용은 아비, 신하, 동생, 스승으로서 많은 편지를 썼다. 지인들에게 보낸 세 통의 편지와 초기 신하 시절의 상소문을 통해 다산의 사람됨과 세상을 보는 관점 등을 짐작할 수 있다. 첫 번째 편지는 선비이자 공직자로서 다산의 세계관이 잘 드러난 상소문이다. 28세에 문과 급제로 관리가 된 다산은 암행어사로 경기지역을 살펴봤다. 그 결과를 보고한 후에도 처벌받아야 하는 자들이 처벌받지 않자, 격분한 다산은 정조에게 상소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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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임금의 최측근부터 적용해야 합니다
“그가 범했던 것이 부정한 재물을 탐하고 가혹하게 세금을 많이 징수함이 아니었다면 왕실에 대한 그들의 공을 생각하여 죄를 용서함이 불가하다고 말할 수 없으나, 지금 이 두 사람의 죄는 목민관이라는 제도가 생긴 이래로 아직 들어 본 적이 없는 짓이었습니다. 그러니 백성을 무겁게 여기고 법을 지켜야 한다는 도리로 보더라도, (그들에게 전혀 죄를 묻지 않고 용서하여 그가 손해 보는 일이 없게 된다면) 형정의 집행 원칙에 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참으로 옳은 일을 했다면 전하께서 무엇 때문에 신을 보내셨겠습니까. 이들이 임금의 총애와 비호함을 빙자하여 그처럼 방자했으니, (만약 암행어사의 보고에도 아무 일 없이 지나간다면) 장차 날개를 펴고 꼬리를 치며 의기양양하여 다시는 자중함이 없을 것입니다. 대체로 법을 적용할 때는 마땅히 임금의 최측근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이 두 사람을 속히 의금부로 하여금 면밀히 취조하고 법에 따라 처벌하여 민생을 소중하게 여기고 국법을 존엄하게 해 준다면, 못내 다행스럽겠습니다.”
법은 모든 사람에게 고르게 적용되어야 하고, 특히 임금의 측근들일수록 더욱 엄격하게 다스려야 한다며 정조를 압박했다. 공직자는 공정하고 청렴하게 공직생활을 해야 한다는 원칙에 입각하여 정약용은 상대가 임금이어도 예를 갖추되 해야 할 말은 단호하게 써냈다. 정조는 약용*의 상소에 따라 그들을 처벌했는데, 그 근원에는 옳고 그름에 대한 다산의 명확한 분별과 그를 향한 학자로서의 존중도 깔려있다. “널리 백가(百家)를 인용하여 문장으로 표현한 바가 무궁하니, 참으로 평소 학문이 축적되어 해박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처럼 훌륭한 결과가 나왔겠는가?” 조선 최고의 학자이자 군주인 정조가 내린 다산에 대한 평가다.
아들아, 오직 독서만이 살 길이다
모든 영광은 불행의 씨앗을 품고 있다. 1801년 2월 8일 새벽에 천주교 문제로 정약용은 구속되어 27일 동안 문초를 받고 28일째 되던 날 귀양길에 올랐다. 40세부터 57세까지 겪게 될 유배 생활의 시작이었다. 최초 유배지인 경상도 장기(현 경북 포항시)에서 보낸 4통의 편지는 아들들에게 어미와 가족의 건강을 잘 살피라는 당부, 특히 독서의 중요성을 이르는 내용이다.
“내가 밤낮으로 빌고 원하는 것은 오직 문장(둘째 아들 학유의 아명)이 열심히 독서하는 일뿐이다. 문장이 능한 선비의 마음씨를 갖게 된다면야 내가 다시 무슨 한이 있겠느냐?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부지런히 책을 읽어 이 아비의 간절한 소망을 저버리지 말아다오.”
*조선시대의 글에서는 상대를 이름만으로 지칭한 경우가 많다.
더 길게 말하고 싶은 욕구는 “어깨가 저려서 다 쓰지 못하고 이만 줄인다”로 물리친다. 강진으로 옮겨진 후의 편지에서 무엇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를 세부적으로 일러준다. 강진으로 유배지가 옮겨진 후에 쓴 편지에는 독서만이 살아나갈 길이라 강조한다.
“이제 너희들은 망한 집안의 자손이다. 폐족으로 잘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독서하는 것 한 가지밖에 없다. (독서는 누구나그 심오한 맛을 알 수 있는 것인데 특히 너희들은) 벼슬하는 집안의 자제로서 어려서부터 듣고 본 바도 있는데다 중간에 재난을 만난 너희 같은 젊은이들만이 진정한 독서를 하기에 가장 좋은 것이다.”
독서는 책에 쓰인 글자를 눈으로 좇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담고 있는 뜻을 깊이 헤아리고 자신에게 적용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다. 그래서 폐족은 출세를 위한 과거공부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니 큰 학자가 될 수도 있다며 공부를 포기하려는 아들들을 꾸짖는다. 준엄하게 말하고 있지만, 자신으로 인해 앞길이 막힌 아들들이 방황할까 염려하는 아비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하지만 다산은 현실 세계에서 선비로서의 이름이 높이 올라갔을 때 추락을 염려하여 몸가짐을 더욱 바르게 하고, 추락했을 때는 세상을 버리지 말고 훗날을
기약하며 준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독서를 하고 책 쓰기에 몰두하는 이유를 스스로 밝힌다.
“내가 저술에 마음을 두고 있음은 당장의 근심을 잊고자 해서만이 아니다. 사람의 아버지나 형이 되어 귀양살이하는 지경에 이르러서 저술이라도 남겨 나의 허물을 벗고자 하는 것”이라며 스스로 당당했던 그는 선비이자 지식인으로서 자신이 놓인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훗날 역사의 평가에 맡겼다. “너희들이 독서하는 것이 내 목숨을 살려주는 것”이고 “폐족이라 벼슬은 못하지만 성인(聖人)이야 되지 못하겠느냐, 문장가가 되지 못하겠느냐?”
우리 임금만은 형님을 알아주셨느니라
다산의 둘째 형 정약전은 다산과 같은 죄로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어패류와 조류 등에 관하여 쓴 어류학서 <자산어보>를 남겼고,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죽었다. “그 같은 큰 그릇, 큰 덕망, 심오한 학문과 정밀한 지식을 두루 갖춘 어른을 너희들이 알아 모시지 않았고 너무 이상만 높은 분, 낡은 사상가로만 여겨 한 가닥 흠모의 뜻을 보이지 않았다. 아들이나 조카들이 이 모양인데 남들이야 말해 무엇하랴. 이것이 가장 슬픈 일이지, 다른 것은 애통한 바가 없다.” 오로지 정조대왕만이 약전을 제대로 알아주셨다고 아들들에게 덧붙이며 형을 잃은 슬픔을 감추지 못한다. 다산과 약전은 가족이자 동료 학자로서 뜻을 같이하는 동지였다. 유배지에서도 둘은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주로 경전해석과 책 쓰기에 관한 의견 교환 및 유배생활의 고충을 토로하거나 서로의 건강을 염려하는 내용이었다. 특히 약전이 다산에게 짐승의 고기는 전혀 먹지 못한다고 쓰자, 다산은 개고기를 잡아서 삶는 방법까지 자세히 설명한다. “5일마다 한 마리를 삶으면 하루 이틀쯤이야 생선요리를 먹는다 해도 어찌 기운을 잃는 데까지야 이르겠습니까? 하늘이 흑산도를 선생의 탕목읍(사유영지)으로 지정하여 고기를 먹고 부귀를 누리게 하였는데도 오히려 스스로 고달픔과 괴로움을 택하다니(…) 들깨 한 말을 이편에 부쳐드리니 볶아서 가루로 만드십시오.” 형을 향한 동생의 지극한 마음이 절절하다.
선비다운 농업을 경영하라
“가난한 선비가 생업을 꾸려나갈 방도를 생각하는 것은 사세가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작은 너무 힘들고장사는 명예가 손상되니, 손수 과수원이나 채소밭을 가꾸고 희귀한 과일과 맛 좋은 채소를 심는다면 해될 것이 없을 것이다. 좋은 꽃과 기이한 대나무로 군색함을 가리는 것도 지혜로운 생각이다.”
고산 윤선도의 후손이자 다산이 아끼던 제자 윤종문에게 유배지에서 다산이 쓴 편지다. 뽕나무를 길러 누에를 치면 생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어떤 상황에서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위로는 성현을 뒤따라가 짝할 수 있고 아래로는 수많은 백성들을 깨우칠 수 있다”고 당부한다. 실학자 정약용의 현실주의적 세계관이 잘 드러나 있다.
<맹자>에 이르길, 하늘이 큰 사람을 내려면 갖은 고난을 먼저 준다고 했던가. 다산의 재능은 시대와 불화한 탓에 훅 꺼질 듯도 했지만, 지식과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헤쳐나간 다산을 가리켜 위당 정인보 선생은 ‘한자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대학자’라고 말했다. 왕의 총애를 받던 집안에서 폐족으로 내몰렸으나, 유배지와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 이룬 걸출한 업적으로 말미암아 다산 정약용은 조선 후기 최고의 학자로 꼽힌다.
참고서적
<다산 정약용 평전>(박석무 저, 민음사)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정약용 저, 박석무 편역, 창비 외 다수)
오늘의 편지 이야기
사랑하는 내 동생
2017 대한민국 편지쓰기 공모전
청소년부 <장려상> 김지영
동형아 안녕, 누나야. 천진난만한 웃음을 띠며 집 마당에서 뛰어놀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입학한 너의 모습을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네.
남들보다 좋지 못한 상황 속에서도 어긋나지 않고 예쁘게 자라줘서 고마워. 사소한 일에도 예민해지는 사춘기 시절도 잘 넘기고, 늦게 오는 누나를 대신해서 준비물도 사다주고. 부족한 잠 채운다고 아침밥도 거르면서 학교 가는 누나를 위해 도시락도 챙겨주는 동생이 있어서 든든하고 감사해. 시킨 일이면 군소리 없이 다 해주던 너의 행동을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이렇게도 모자란 누나는 이제야 고마움을 느껴. 갑작스러운 일로 인해 생긴 엄마의 빈자리를 누나라도 채워주고 싶었는데 오히려 누나로서의 역할조차도 제대로 해주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너무 아프네. 고맙다는 표현도 낯간지럽다는 핑계로 회피하고 사랑한다는 표현조차도 쑥스럽다는 핑계로 외면한지가 3년도 더 된 것 같은데 사랑한단 이 말 한마디를 하는 게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동형아 누난 이 세상 누구보다도 너를 제일 사랑해. 날마다 바르게 커가는 너의 모습을 보며 보람차고 뿌듯함을 느껴. 앞으로의 날들에 힘든 일도 있고 좋은 일도 있을 텐데 지금처럼 서로서로 의지하며, 힘들 때나 고민이 생겼을 때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대화하면서 같이 이겨내자! 네가 힘이 들 때 도와줄 수 있는 누나가 되도록 노력할게. 항상 옆에서 누나의 힘이 돼주어서 너무 고맙고,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자.
누나도 이제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날마다 표현할게. 중학교 입학해서 친구도 사귀고 적응한다고 많이 힘들지. 그래도 힘든 내색 안하고 방긋방긋 웃으면서 학교생활 재밌다고 하니까 천만다행이야. 누나가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걱정을 많이 했어. 우리 동형이 집에서 하는 것만큼 밖에서도 잘하니까 누나는 항상 널 믿고 있다는 거 잊지 말고 누가 괴롭히면 말해. 누나가 언제든지 찾아갈게! 네 옆에는 언제나 누나가 있다고 생각하고 당당하게 살아! 사랑한다 내 동생.
- 동형이를 사랑하는 누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