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주대첩 「서울지역」
강감찬
姜邯贊
강감찬의 어렸을 때 이름은 은천이었다. 키가 작고 못생겨서 놀림을 받을 만 했지만 통솔력이 대단했고 학문과 무예도 뛰어났다. 강감찬이 태어난 곳이 지금의 서울 낙성대다. 낙성대는 강감찬이 태어날 때 별이 떨어졌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018년 12월 겨울, 거란족의 요는 성종의 사위인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했다. 요의 기마부대는 천하무적이었다. 하지만 압록강에 있는 흥화진에서 수공으로 참패하고, 개경까지 오는 동안 자주와 마탄 등에서 고려의 복병을 만나 참패를 거듭했다. 소배압이 개경에 왔으나 정복에 실패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귀주에서 대부분의 군사들이 죽임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 전체 전쟁을 수행한 장군이 강감찬이다.
살아서는 명재상이며 장수였고, 죽어서는 호환(虎患)을 없앤 설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행주대첩 「경인지역」
권율
權慄
조선의 여인네들이 앞치마에 돌을 날라 몰려오는 왜군을 물리쳤다는 행주산성. 이후부터 앞치마를 행주치마라고 했다는 민간어원설이 생길 정도다. 권율은 금산군 이치에서 고바야키와 다카카게의 부대를 무찌르는 공적을 세우고, 수원 독왕산성에서 일본의 보급로를 끊었다. 이 싸움으로 왜군은 한양에 고립되는 어려움에 처하게 됐다. 이후 권율은 관군 2,300명과 승병 500명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주둔했다. 이때 왜장 우키다가 3만의 병력을 이끌고 행주산성을 들이닥쳤으나 조선의 여인들까지 나선 전투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이때 몰살 당한 왜군 수가 무려 2만 4000명에 이른다. 파락호①처럼 지내던 권율이 과거시험을 친 건 그의 나이 마흔여섯 살 때였다. 그 역시 늦깎이였던 것이다.
마흔여섯 늦은 나이에 출사한 문신이었지만, 멸망할 뻔한 나라를 구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구국의 명장이었다.
각주 ① 재산이나 세력이 있는 집안의 자손으로서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을 이르는 말
홍의장군 「부산(경남)지역」
곽재우
郭再祐
일러스트. 서영원
곽재우는 임진왜란 때 홍의장군이라 하면 왜군이 벌벌 떨었다는 남명 문하의 의병장이다. 곽재우는 이황과 더불어 당대 학행의 사표(師表)가 되었던 남명 조식의 외손사위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켜 파죽지세로 조선을 짓밟았으나 조선은 딱히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관군은 연전연패를 당하고 선조는 한양을 떠나 피난길에 나섰다. 곽재우는 이 소식을 듣고 의령에서 분연히 일어나 사재를 털어 2,000명의 의병을 모아 낙동강 일대의 왜군을 무찔렀다. 의병들의 게릴라 활동으로 일본군의 호남 진격을 저지하는 동시에, 일본 보급선을 기습하여 보급을 차단했다. 김시민의 진주성 싸움에 원군을 보내 승리로 이끄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끝나서는 모든 관직을 마다하고 초야에 묻혀 살았다.
임진왜란 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홍의(紅衣)를 입고 전장을 지휘했던 곽재우는 마지막까지 용맹하고 고결한 의병장이었다.
충무공 「전남지역」
이순신
李舜臣
이순신 장군은 세계 해전사에도 길이 남은 전략가로 지장(智將)이고 용장(勇將)이었다. 70년대만 해도 가장 존경하는 인물 순위에 이순신은 1, 2위를 다투던 위인이었다. 중세의 해전은 함상 육박전이었다. 또한 무폭약 포탄(쇠공)을 단발로 날려 적함을 격파하는 것이 당시의 전술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달랐다. 적병의 승선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갑판 위에 쇠못을 박아 보호막을 만들었다. 또 전 함대가 일시에 발포해 집중 화망을 형성하는 전술을 택했다. 한산도대첩에서 학익진을 펼쳐 한가운데 있는 왜군의 함대에 집중적으로 수백 기의 철환과 대장군전을 날려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전투 양상은 근대해전의 효시가 돼 지금도 쓰이고 있다. 세계 해전사에서도 이순신의 한산도대첩은 지금도 살아 있는 신화다.
이순신 장군이 성웅으로 추앙받는 것은 수많은 역경과 난관을 치열한 노력으로 돌파해 냈기 때문이다. 필사즉생 필즉생사, 자신과 나라의 역경을 극복한 역사의 명장이다.
개국공신 「경북지역」
신숭겸
申崇謙
신숭겸은 군주를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긴 장군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공격할 때 대구 공산전투에서 후백제군 견훤의 군사에 포위돼 위험에 처하자 신숭겸은 왕건의 말을 타고 왕건의 옷을 입고 후백제 군사들을 유인했다. 결국 신숭겸은 그곳에서 죽고, 군졸 복장을 한 왕건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왕건이 사면초가에 이르렀던 대구인지라 왕건과 관련된 지명이 대구에는 많다. 왕건의 군사가 패했다는 곳이 파군재다. 반야월은 왕건이 탈출할 때 새벽달이 빛났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왕건이 머물고 갔다는 왕산, 왕건이 포위망을 뚫고 노한 얼굴을 풀었다는 해안, 고려와 후백제의 군사들 화살이 내를 이루었다고 해서 살내라는 이름이 남았다. 팔공산은 원래 공산인데, 신숭겸 등 여덟 명의 장수가 백제군에 죽어 이후부터 팔공산이 되었다고 한다.
신숭겸은 태조왕건이 자신을 대신해 목숨을 바친 신숭겸을 위해 황금머리를 만들어 장례를 치러줬을 정도로 군주를 감동시킨 충절의 표상이었다.
황산벌 「충청지역」
계백
階伯
백제 성왕이 관산성에서 전사한 뒤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극히 나빠졌다. 신라는 당과 연합해 백제를 협공했다. 660년 김유신과 소정방의 나당연합군이 백제 땅을 짓밟았다. 계백은 결사대 5,000명을 이끌고 황산벌로 나가 5만여 신라군을 맞이하였다. 황산벌은 지금의 논산시 연산면 일대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계백은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다. 내 처자가 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욕을 보는 것보다 죽어서 쾌(快)함만 같지 못하다.” 하고 식솔들을 다 죽이고 황산벌에 나왔다고 한다. 계백의 5,000명 결사대는 신라군을 네 차례나 물리쳤으나 결국 수적인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패했다. 계백도 전사했다. 계백 장군 묘는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에 있다.
나라의 끝과 함께 맞이한 계백의 죽음에 대한 평가는 극을 달린다. 처자를 죽이고 죽음을 맞이했던 대목이 있어서다. 하지만 장군의 충절에 대해 이견을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명장 「전북지역」
최호
崔湖
최호 장군은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했다. 무인 집안의 피를 타고난 것이다. 선조가 한양, 평양, 의주로 피난길에 나섰을 때 언제 뒤로 돌아올 지 모르는 왜군으로부터 선조를 호위해 지킨 사람이 바로 최호 장군이다. 선조 일행이 의주에 도착한 이후에는 함경남도 병마절도사가 돼 전장에 나갔다. 이순신이 이끄는 해전에서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육지에서는 참패를 당하던 조선이었던지라 병력도, 무기도 마땅찮은 상황에서 최호 장군은 왜군 정예부대 가토오군의 서진을 막아냈다. 최호는 병력이 그리 많지 않아 유격전술을 구사해 지리에 밝지 않은 왜군을 괴롭혔다. 이후 최호 장군은 충청수사로 임명돼 해전에 참여했으나 그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그만 전사하고 말았다.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에서 태어난 최호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과 연합해 북상하는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군산시에서는 매년 5월 최호 장군 순국 시민추모제가 열리고 있다.
무인 「강원지역」
김응하
金應河
철원 출신의 조선시대 무인으로 광해군 10년(1618)에 만주에서 누루하치가 후금을 세우고 명나라를 침범하자 명에서는 건주위를 공격하기 위하여 조선에 원군을 청했다. 김응하는 이듬해 2월 도원수 강홍립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 명과 함께 후금정벌에 나섰다. 하지만 후금의 전력은 막강했다. 명나라 군사를 격파한 후금의 6만 군사를 상대로 3,000명의 병력을 지휘해 대적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 전쟁에서 그도 전사했다. 이듬해 명나라 신종은 그의 장렬한 죽음에 대한 보답으로 그를 요동백에 봉하고 가족들에게 백금을 하사했다. 조선에서도 영의정을 추증했다. 시호는 충무이다.
김응하 장군은 맨손으로 범을 때려잡을 정도로 힘이 장사였고, 한 번의 활시위로 셋을 쓰러뜨렸으며(一矢三殺:일시삼살), 죽어서도 칼자루를 놓지 않았다고 전해질 정도로 진정한 무인이었다.
청렴결백 「제주지역」
무장 최영
崔瑩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던 청렴결백한 고려의 무장이다. 1359년 홍건적이 서경을 함락하자 이를 물리쳤다. 이후에도 흥왕사의 변을 진압했다. 제주도에서는 제주목사를 죽이는 커다란 반란이 일어났다. 최영은 전함 300여 척과 2만 5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제주도 원정에 나섰다. 제주도로 가는 도중 풍랑을 만나 잠시 추자도에 대피했는데, 그때 최영이 주민들에게 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쳤다. 그 은덕을 기리기 위하여 이 지방 사람들이 사당을 지어 매년 제사를 지낸다. 1376년에는 왜구가 삼남지방을 휩쓸자 홍산에서 왜구를 격파했다. 무장으로서 백성들에게 고기잡이를 가르쳐 편안케 한 장군이 또 어디 있을까? 이 시대의 사표(師表)로 삼을 만한 인물이다.
최영 장군을 향한 민초들의 감사하는 마음은 장군을 신으로 부활시키기에 이르고 조선시대부터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널리 숭배 받는 장군신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한반도 최고의 장군신으로 군림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 5월 단옷날 ‘최영장군제’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