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직에 물든 것을 보내소
요사이 아이들 데리고 어찌 계시는고? 소식〔기별〕 몰라 걱정하네. 나는 지금〔당시當時〕 무사히 있네. 장모님 기운은 편하신가? 바빠 편지〔 이〕도 못 아뢰옵네. 이런 이유〔젼 〕로 이 뜻을 장모께 아뢰옵소. 의자〔교의交椅〕에 놓을 돗자리에 선 (방석의 가장자리에 덧대는 헝겊)을 두를 것을 못 구하여 나로 하여금 구하라고 하시니, 명주에 자줏빛 물든 것이나 아청鴉靑(검은 빛을 띤 푸른 빛) 색 물든 것이나 아무것이나 한 자 세 치만 보내소. 명주 없거든 교직交織(여러 종류의 실을 섞어 짠 천)에 물 든 것을 보내소. 온 폭幅이 없거든 비록 품을 짼 것이나마 보내소. 품을 짼 것이거든 다섯 자를 보내고, 품을 아니 째어 온 폭이거든 한 자 세 치만 와도 쓸 것이니 짐작하여 보내소. 돗자리 네 가장자리에 선을 두르되, 한 쪽〔녘〕에 한 자 세 치씩 들 것이니 품을 짼 것이면 다섯 자나 되어야 쓸 수 있을 것이고 품을 아니 째어 온 폭이면 한 자 세 치면 째어 쓸 것이로세. 너비는 한 치 닷 푼이 들 것이고 길이는 한 자 세 치가 들 것이니, 품 짼 것이 바로 있거든 품 짼 것을 다섯 자만 보내고, 없거든 온 폭 한 자 세치를 보내소. 자주색 실이나 다홍실이나 중에 아무 실이나 반반꾸리만 함께 보내소.
슉진이의 병은 어떤고? 자세히 알아 기별하소. 큰 말은 기침을 계속하는가? 자세히 보아 이전과 한가지로 기침하거든 곽샹이로 하여금 지렁이 사로잡아 날마다 먹이라고 하소. 곽샹이에게 날마다 들어와 말을 살펴보라고 하소. 스무날 제사에 쓸 식해젓을 미리 담그게 하소. 여드렛날 말 보낼 때 큰 말이 기침을 계속해서 하거든 큰 암말을 보내소. 말 보낼 때 풍난이와 옥쉬를 보내소. 풍난이가 일〔연고〕이 있거든 곽샹이와 옥쉬를 보내소. 옥쉬가 뽕을 따거든 어른 종 둘을 보내소. 여드렛날로 보내소.
-요란하여 이만. 즉일卽日.
그림. 정윤미
돗자리의 가장자리를 두를 천을 보내라는 간단한 사연이 이 편지의 골자다. 그런데 이 편지에는 ‘…하소’라고 하는명령형이 열여덟 번이나 나온다. 명령의 내용이 점점 잘아지는 것이 마치 목을 죄어 오는 것 같다. 상대방의 독자적인 판단력은 애초에 염두에도 없는 듯이. ‘돗자리의 한 변의 길이가 한 자 세 치인데, 가를 두를 천을 보내라.’고 하면 될 것을. 세상에 이렇게나 사연이 자잘한 편지가 있을까?
이 편지는 어느 잗다란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보낸 것이 아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보낸 것이다. 그것도 17세기 초 무렵 사대부가의 양반이 쓴 것이다. 같은 편지를 하나 더 보자.
대구국립박물관제공
차담상을 가장 좋게 차리게 하소
아주버님이 오늘 가실 길에 우리 집에 다녀가려 하시니, 진지도 옳게 차리려니와 다담상을 가장 좋게 차리게 하소. 내가 길에 다닐 때 가지고 다니는 발상에 놓아 잡숫게 하소. 차담상에 절육, 세실과, 모과, 정과, 홍시, 자잡채, 수정과에는 석류를 띄워 놓고, 곁상에는 율무죽과 녹두죽 두 가지를 쑤어 놓게 하소. 율무죽과 녹두죽을 놓는 반盤에 꿀을 종지에 놓아서 함께 놓게 하소. 안주로는 처음에 꿩고기를 구워 드리고, 두 번째는 대구를 구워 드리고, 세 번째는 청어를 구워 드리게 하소. 아주버님 자네를 보러 가시니, 머리를 꾸미고 가리매를 쓰도록 하소. 큰 아기도 뵙게 하소. 여느 잡수실 것은 보아가며 차리소. 잔대와 규화를 김참봉 댁이나 초계댁에서 얻도록 하소. 가서.
시아주버니가 방문하니 다담상과 진짓상을 차리라는 사연의 편지다. 역시 변함없이 ‘…하소’로 말을 맺는다. 식단을 완벽하게 정해주고 그것도 모자라 아내의 차림새까지 정해주고 있다. 무슨 내막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형님의 방문에 차리는 음식이 임금님 수라상과 방불하다. 손님상을 보는 것은 원래 주부의 몫이 아니던가? 그리고 시아주버니가 방문하는데, 안주인이 자기 매무새를 변변히 다듬을까?
대구국립박물관제공
조선 선비의 또다른 모습
1989년 경북 달성군 현풍면의 무덤에서 한 여성의 미라와 함께 편지 172점과 옷가지 81점이 발견되었다. 이 무덤의 주인은 진주 하씨(河氏, 1580~1652 이후)고, 여기 소개한 두 점을 포함한 편지 105점이 남편 곽주(郭澍, 1569~1617)가 하씨에게 쓴 것이다.
곽주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유명한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의 종질이다. 비록 급제는 못했지만, 그는 과거에 응시할 정도로 학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영남의 유림이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청하는 상소와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위한 변무소辨誣疏를 올릴 때 현풍현의 대표로 참여한 것으로 보아, 그는 영남에서는 꽤 이름난 학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그는 영남의 전형적인 양반 유학자였던 것이다. 그가 쓴 편지를 보면, 집안 살림, 가족의 안부, 의식주 생활, 농사, 관혼상제, 질병, 노비 관리 등 가정의 모든 일상생활에 대하여 위 두 편지에서 보는 것처럼 꼼꼼하게 지시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그리고 있는 양반과는 다른 모습이다. 양반은 가정은 안에만 맡기고 책을 보거나 벗과 어울려 놀며 현실과는 동떨어진 생활을 했다고 혹 생각해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곽주는 전혀 그렇지 않고 매우 가정적이고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이 오히려 양반의 전형에 가까운 모습임을 최근 발견되는 편지와 일기 등의 자료가 말해주고 있다. 혹시 우리가 조선시대 양반을 정자에 앉아 고담준론하고 음풍농월하는 ‘선비’로 피상적으로 파악해온 것은 아닐까?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곽주는 왜 부인과 같이 살지 않고 집을 떠나 있었던 것일까? 그의 편지는 이 문제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그의 외삼촌 박성(朴惺, 1549~1606)의 문집 《대암집大菴集》에 실린 다음 두 글에서 그 해답을 찾아볼 수 있다. 외삼촌이 곽주에게 쓴 편지에 “내 병은 조금도 낫지 않고 너는 한번 올 수 없으니, 다시는 네 얼굴을 보지 못하고 죽을까 걱정이다. 너를 한번 만나 부탁할 일이 있으니, 네 아버지께 잘 말씀 드리고 반드시 한번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란다.”고 한 구절이 있고, 또 곽주가 쓴 외삼촌 제문祭文에 “아버지 병이 오래 끌어 약시중하느라 겨를이 없다가 입산한 후에는 외삼촌을 가 뵐 수 없었기에, 편지하실 때마다 죽기 전에 한번 만나고 싶다고 하셨으나, 끝내 명령을 따르지 못했으니…”라고 썼다. 즉, 곽주는 아버지의 병간호 하느라, 그리고 아버지 돌아가신 후에는 공부하러 산에 들어가느라 부인과 떨어져 살았던 것이다.
그러니 더 세심하게 편지에 그의 마음을 전했던 것은 아닐까.
하영휘 / 고문서(古文書) 달인이라 불리는 하영휘는 선인들의 옛 편지를 통한 역사연구로 당시대의 생활상과 사회상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