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의 편지
인사말은 생략하고〔省式〕 말씀드립니다. 저는 가문에 흉악한 화禍가 닥쳐 맏형이 이달 초사흘에 뜻밖에 돌아가셨습니다. 통곡하는 것밖에는 할 말을 모르겠습니다. 연말 추위에도 관찰사 업무 중의 안부가 평안하시리라 생각하니, 위로가 됩니다. 상주喪主인 조카 기인箕仁이 초겨울에 추노推奴 일로 귀 도의 거제, 김해, 인동 등지로 갔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슬프고 절박한 사정을 어떻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어디 가 있는지 몰라, 부음을 알릴 길도 없습니다. 부득이 부고 세 통을 써서 귀 감영에 보내니, 이러한 사정을 헤아리시어 편지를 세 고을에 나누어 보냄으로써 즉시 전달되도록 하고 중간에 없어지거나 지체되는 폐단이 없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정이 가슴 아프고 절박하여, 감히 이렇게 번거롭게 말씀드립니다. 나머지 사연은 상을 당하여 마음이 복잡하여 이만 줄이니, 헤아리시기 바라며 편지를 올립니다.
그림. 정윤미
1680년 이돈李 이 경상감사에게 보낸 편지다. 조카가 추노하러 가서 돌아오지 않고 있는데, 이돈의 형, 즉 추노하러 간 사람의 아버지가 죽었다. 상주喪主가 객지에 나가 아버지의 죽음을 모르고 있으니, 얼마나 딱한 일인가? 부고를 좀 전해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초겨울에 갔으니, 간 지 약 두 달이 지났다. 서울에서 거제, 김해, 인동 세 곳을 돌아오려면 오랜 시일이 걸렸을 것이다. 노비는 크게 두 부류로 구분된다. 주인집에 살거나 이웃에 살며 주인에게 노동력, 즉 ‘신역身役’을 바치는 솔거노비가 있었고, 주인과 멀리 떨어져 따로 생계를 꾸려 살며 신역 대신 구실, 즉 ‘신공身貢’을 바치는 외거노비가 있었다. 이 편지에 나오는 세 곳의 노비는 각기 터전을 마련하여 가족과 함께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소유주인 이돈의 조카도 그들의 소재를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기 소유의 노비들에게 신공을 징수하고 그들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지방에 갔을 것이다. 이 경우 ‘추노’라 함은 노비를 찾아가서 신공을 징수함을 뜻한다. 한편 자기 소유의 노비가 살고 있는 지방의 수령과 서로 아는 사이일 경우에는, 직접 먼 길을 가는 수고를 하는 대신 그 수령에게 추노를 부탁할 때도 있었다. 다음 편지가 추노를 부탁하는 사연인데, 노비의 신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도망노비를 잡아 현신現身(아랫사람이 윗사람 앞에 나타남)하게 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유철의 편지
초겨울에 행정 중에 존尊(특별한 관계가 없는 상대방을 높여 이르는 말)의 안부가 어떠하신지요? 매우 궁금합니다. 저는 병들고 쇠약한 몸으로 겨우 지내고 있으나, 일가의 상사喪事가 끊임없이 이어지니 늘그막의 심사를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말씀드리기 매우 죄송스럽지만, 죽은 형 집의 가노家奴 사동士同이라 부르는 놈이 휴가를 받아 집에 가서 돌아와 현신現身할 생각을 하지 않은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봄에 들으니, 존께서 이서장李書狀의 청에 의하여 죄를 다스려 보냈다고 하는데, 여태 그림자조차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완악함이 주인에게 반란하는 죄일 뿐만이 아닙니다. 이렇게 사나운 무리에게 만약 관가에서 엄격한 위엄을 보여주지 않으면, 외로운 과부의 집에서 완악한 노를 복종시킬 길이 없습니다. 존께서 반드시 특별히강하게 다스려그 형 효길孝吉의처를 잡아 가두고, 효길로 하여금 데리고 현신하도록 독촉하여 답을 받은 후 놓아주면, 그 감사함이 어떠하겠습니까? 법을 어긴 행위에대하여 여태고을의 관속官屬을 파견한 조치가 없었고, 혹 관속이 나간다고 해도 이것은 인족隣族(이웃이나 친족)을 가두고 추쇄하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니, 법으로도 무겁게 다스려야 마땅한 바입니다. 혹시 존께서 추노 중이라는 핑계로 특별히 엄하게 다스리지 않으면, 와서 현신할 리가 만무합니다. 과부 집에 사환이 부족하여 따로 심부름꾼을 보내지 못하며, 또 존께서 반드시 괄시하지 않을 것이라 믿기 때문에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나머지 사연은 이만 줄이니 존께서 헤아리시기 바라며 삼가 편지를 올립니다.
1664년 유철兪 이 지방 수령에게 보낸 편지다. 휴가를 받고 집에 돌아가 여러 해째 돌아오지 않는 노비를 추쇄推刷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문제의 노비 사동은 유철의 형수의 솔거노비다. 솔거노비가 자기 집에 가서 돌아오지 않고 거기서 살고 있다. 도망노비가 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도망노비의 소재를 파악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노비 신분으로 생소한 곳에 가서 살 수 없었고 피붙이에게 얹혀살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연고지만 알고 있으면 도망노비가 있는 곳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정작 소재를 파악한 다음이 문제였다. 잡으러 가더라도 저항하거나 숨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개인의 힘으로는 저항하는 노비를 제압하거나 숨은 노비를 찾을 길이 없었다. 강제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수령에게 부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수령도 도망노비를 다스리기가 쉽지 않았다. 이 편지에 ‘죄를 다스려 보냈다고 하는데, 여태 그림자조차나타나지 않습니다.’라고 쓴 사연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유철은 더욱 강력한 방법을 쓸 것을 수령에게 요구하며 ‘그 형 효길孝吉의 처를 잡아 가두고, 효길로 하여금 데리고 현신하도록 독촉하여 답을 받은 후 놓아주라.’고 했다. 그 이웃이나 친족을 잡아 가두고 도망노비나 범죄자를 잡는 것은 조선시대에 널리 행해진 방법이었다. 그때까지 소극적이었던 수령의 태도로 볼 때, 수령이 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요컨대, 추노는 외거노비의 신공을 받거나 도망간 솔거노비를 현신하게 하는 것을 말하는데, 어느 경우에도 쫓고 쫓기는 극적인 장면을 기대할 수 없다.
사실 조선시대에 국가는 노비제도에 소극적이었다. 그것은 추노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국가는 흉년과 농번기에 추노를 금지했고, 추노에 협력한 수령과 방백을 처벌한 사례가 《조선왕조실록》에 적잖이 보인다. 말하자면, 조선시대에 노비는 있었지만 노비제도가 강력한 법적인 뒷받침은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추노’라는 말에서 미국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의 도망가는 노예와 뒤쫓는 추격대의 박진감 넘치는 장면을 상상한다면, 그것은 조선시대의 실상과는 거리가 멀다. ‘도망노예법’의 강력한 뒷받침을 받은 미국의 노예제도와 조선의 노비제도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