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이〔워늬〕 아버님께 상백上白〔상사리〕
자네 항상 날더러 이르되 “둘이 머리 세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시더니, 어찌하여 나를 두고 자네 먼저 가시나? 나하고 자식하며 누가 분부하여 어찌하여 살라 하여 다 던지고 자네 먼저 가시는고?
자네 날 향해 마음을 어찌 가지며 나는 자네 향해 마음을 어찌 가지던고?
매양 함께 누워서 자네더러 내가 이르되
“이 보소 남도 우리 같이 서로 어여삐 여겨 사랑할까? 남도 우리 같은가?” 하여 자네더러 이르더니,
어찌 그런 일을 생각지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고?
자네 여의고 아무래도 내 살 수 없으니, 수이 자네한테 가고저하니, 날 데려 가소.
자네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 없으니, 아무래도 서러운 뜻이 가이 없으니,
‘이내 맘은 어디다가 두고 자식 데리고 자네를 그려 살려뇨?’ 생각하나이다.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자세히 와서 이르소. 내 꿈에 이 편지 보신 말 자세히 듣고자 하여 이리 써 넣네.
자세히 보시고 날더러 이르소.
자네 내 밴 자식 나거든 ‘보고 살겠다.’ 하고 그리 가시되,
밴 자식 나거든 뉘를 ‘아빠’ 하라 하시는고? 아무러한들 내 마음 같을까?
이런 천지가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을까? 자네는 한갓 그리 가 계실 뿐이거니와, 아무러한들 내 마음 같이 서러울까? 끝도 없고 한도 없어 다 못 써 대강만 적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자세히 와 뵈고 자세히 이르소.
나는 꿈을 자네 보려 믿고 있나이다. 몰래 뵈소서. 하도 끝도 한도 없어 이만 적나이다.
병술 유월 초하룻날 집에서
그림. 정윤미
꿈에라도 만나보리라
옛날 경상도 안동 지방에 한 부부가 살았다. 그들은 “둘이 머리 세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맹세했다. ‘원이’라는 아이를 낳고 또 부인이 아이를 가졌다. 부부는 사랑의 행복을 맘껏 누렸다. 함께 누워 부인이 남편에게 “이 보소 남도 우리 같이 서로 어여삐 여겨 사랑할까? 남도 우리 같은가?”라고 물을 정도로 행복했다. 그러다가 귀신의 시샘이라도 받았던 것일까? 남편이 병에 걸려 서른 한 살의 나이에 저승으로 먼저 가버렸다. 낳아서 ‘보고 살겠다.’고 한 유복자까지 남긴 채 말이다. 산이 높으면 골짜기도 그만큼 깊은 법이다. 잊을 수 없는 꿈같은 세월과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부인은 “자네 여의고 아무래도 내 살 수 없으니, 수이 자네한테 가고저하니, 날 데려 가소.”라며 절규했다. “자네 내 밴 자식 나거든 ‘보고 살겠다.’ 하고 그리 가시되, 밴 자식 나거든 뉘를 ‘아빠’ 하라 하시는고? 아무러한들 내 마음 같을까?”라고 한 대목에서는 읽는 사람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초상 날부터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오던 울음이 장례 날이 되자 눈물은 마르고 말이 되었다. 부인은 그 말을 편지로 써서 남편 주검의 품속에 넣어 주었다. 보낼 수밖에 없는 남편이라면 꿈에라도 만나보리라. 꿈에 만나려면 길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그녀는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자세히 와서 이르소. 내 꿈에 이 편지 보신 말 자세히 듣고자 하여 이리 써 넣네. 자세히 보시고 날더러 이르소.”라고 하여, 꿈에 나타나 이 편지에 직접 답하라고 요구했다. 이 편지가 바로 그 꿈길인 것이다.
초상을 당한 여인네가 곡하는 것을 어릴 적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이 편지를 읽으며 자연스레 그 장면이 떠올랐다. 바닥에 퍼질러 앉아 손으로 바닥을 치며, 꺼이꺼이 곡하는 사이사이에 길게 빼어 읊조리는 사설이 끊어질 듯 이어지곤 했다. 가슴 속에 쌓인 한을 끊임없이 쏟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까무러칠 정도로 감정이 격앙되면, 주위 사람이 부축하여 방으로 옮기기도 했다. 이 편지의 사연이 바로 그 사설이다. 지은 글로는 이토록 진한 감동을 자아낼 수 없다. 사연이 하도 절절하여 행여 글맛이 상할까 가능한 한 원문을 살려 옮겼다.
원이 엄마의 편지 국립안동대학교박물관 제공
조선시대 부부의 사랑 보다
이 편지는 1998년 경북 안동시 정상동에서 택지조성을위해 이장한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함께 나온
자료로써 살펴본 결과 무덤의 주인, 즉 ‘원이 아버지’는 이응태(李應台1556~1586) 임이 밝혀졌다. 그런데 정작 이편지를 쓴 ‘원이 어머니’에 관해서는 알 수 있는 것이아무것도 없다. 족보에도 전혀 언급이 없어, 성마저도 알 길이 없다. 원이 어머니에 관한 단서라면 그녀가 남긴 편지뿐이다. 편지를 통하여 그녀에 관하여 한 번 생각해보자. 원이 어머니의 남편 이응태는 고성 이씨다. 고성 이씨는 안동 지역에서 대표적인 양반 중의 하나다. 따라서 그녀도 반가의 딸이었음이 분명하다. 당시 안동지방의 혼인은 양반끼리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또 이런 편지를 썼다는 사실도 그녀가 양반이었음을 말해준다. 대개 반가에서 어려서부터 교육을 받지 않고는 이런 글과 글씨를 쓸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편지의 사연을 보면 그녀는 감정이 풍부한 여자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남편과 같이 누워 “이 보소 남도 우리 같이 서로 어여삐 여겨 사랑할까? 남도 우리 같은가?”라고 한 것을 보면, 감정 표현에도 솔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그녀의 풍부하고 솔직한 감정은 편지의 글씨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편지의 글씨를 찬찬히 음미해 보면, 소박하면서도 건강한 자연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원이 어머니의 모습도 이 글씨처럼 소박하고 건강하지 않았을까? 예로부터 ‘추로지향鄒魯之鄕〔공자와 맹자의 고장〕’이라 불리어 온 안동. ‘안동’ 하면, 보통 점잖고 근엄한 고장이라고 생각한다. 가서 보면, 실제 그러한 면이 적지 않다. 그런데 만약 ‘16세기 말, 임진왜란 직전 안동지방의 부부사이가 어떠했을 것으로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혹자는 어떻게 대답할까? 이 편지를 읽기 전에는, 혹 ‘부부사이에 남존여비가 엄격히 지켜졌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이 편지의 사연까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시대 사회는 깊이 들여다보면, 정말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다. 그리고 그 아기자기한 재미는 이런 편지가 아니면 맛보기 어렵다.
이 보소
남도
우리 같이
서로
어여삐 여겨
사랑할까?
남도
우리
같은가?
이내 맘은
어디다가
두고
자식 데리고
자네를
그려
살려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