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더위가 더욱 혹독하여 그리움이 간절하던 차에 지금 정감 어린 편지를 받으니, 다시 만나 뵙는 것 같아 위로와 기쁨이 말할 수 없습니다. 고애孤哀는 요즘 더위를 먹고 명나라 장수가 있는 곳에 분주하게 다니며, 게다가 설사병이 나서 몹시 걱정입니다. 어제 유격遊擊이 “백진사白進士가 나에게 사람을 보내 정성을 표하여, 매우 감사하다. 조선의 유림儒林이 믿음직하고 인정이 두터우며 정중한 것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기쁨과 영예로움을 감당하지 못하여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국가를 위해서도 역시 빛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왜적의 일이 비록 혼란스럽기는 하나, 존尊께서는 움직이지 않으셔도 되니 천만 다행입니다. 진도독陳都督이 내일쯤 진陣에 당도한다고 하여, 고애孤哀와 계야季爺가 함께 강진에 갑니다. 이 달 보름쯤에 왕림하여 진도독의 위풍을 보시는 것이 어떠한지요? 보내주신 갖가지 선물은 모두 이곳의 물건이 아니라, 거듭 감사드립니다. 나머지 사연은 이만 줄이니, 존尊께서 헤아리시기 바라며 삼가 답장을 올립니다.
1598년 7월 8일 고애자孤哀子 이순신李舜臣 올림.
老炎倍酷 方懸思想 今承情翰 如復對床 慰沃可言 孤哀近患暑 奔走唐將處 兼得水痢 爲悶爲悶 昨日遊擊曰
白進士爲送人致情 多謝多謝 乃知朝鮮儒林信厚鄭重也 不勝佳譽 欽嘆不已 爲國家亦有光焉 賊事 雖曰紛
尊可勿動 千萬幸甚 陳都督明日間當到陣 孤哀與季爺偕往康津 月望間枉見都督威風 如何 惠及各色 皆非此處之物 謝謝感感 餘不盡 伏唯尊照 謹奉答狀上 / 戊戌七月初八日 孤哀子 李舜臣 狀上
그림.정윤미
충무공과 백진사
충무공이 1598년 7월 8일 백진사白進士에게 보낸 편지다. 같은 해 11월 충무공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했으니, 죽기 4개월 전에 쓴 것이다. 바로 전해인 1597년 1월 왜군이 재침한 상황〔정유재란〕에서, 그는 억울하게 체포되었다가 사면되어 백의종군하던 중 4월에는 어머니 상을 당했다. 이 편지에 그가 자신을 칭한 ‘고애孤哀’, 또는 ‘고애자孤哀子’는 어머니 상중의 호칭이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원균元均이 패배하여 사망하자, 그에게 다시 기회가 왔다. 1597년 8월 그는 다시 삼도수군통제가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던 것이다. 그 동안 흐트러진 전열을 가다듬으며, 그는 왜군의 서진西進을 철저히 막았다. 1598년 2월 진영을 고금도古今島로 옮긴 그는 백성을 모아 경작하고 군비를 강화하며 결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일본과의 화의和議가 결렬되자, 명明도 즉시 군대를 다시 파견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이 편지에 ‘유격遊擊’, 또는 ‘계야季爺’로 나오는 명明 수병유격장군水兵游擊將軍 ‘계금季金’이다. 그는 수군 3천2백 명을 이끌고 1597년 10월에 바닷길을 통해 고금도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어서 이 편지에 ‘진도독陳都督’이라는 명칭으로 나오는 명나라 수병제독水兵提督 진린陳璘이 수군 5천 명을 이끌고 도착할 것이었다. 바야흐로 결전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바로 이 편지의 배경이다.전력이 달리는 조선에게는 명군明軍의 적극적인 도움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도우기는 커녕 그들은 안하무인으로 위세를 부리며 무리한 요구를 하고 조선 장수에게 매질을 하거나 백성을 괴롭혔다. ‘그들의 전력을 십분 끌어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 끝에 충무공은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하나는 그들과 인간적으로 친해지는 것이고, 하나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함부로 해도 되는 미개국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사실 이것은 낯선 방법이 아니었다. 평상시에 중국에서 외교사절이 오면 글 잘하는 조정의 고관이 접반사接伴使로 붙어 그들과 어울려 시를 주고받음으로써 그들과 친밀해지고 조선의 문화수준을 각인시켜 왔던 것이다. 그러나 전시에 그럴 여유가 어디 있으며, 서울과 아득히 멀리 떨어진 시골에 그만한 문장가가 어디 있겠는가? 그때 충무공의 눈에 들어온 사람이 백진사였다. 그는 전라도 남해안 어느 고을에 산 유력한 명사名士였음이 분명하다. ‘진사進士’라면 명나라 장군과는 시를 화답하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편지의 사연으로 추측건대, 충무공이 계금을 위하여 베푼 연회에 초대된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고, 민간외교를 충실히 수행했다. 게다가 그는 계금에게 선물까지 보냈다. 그리하여 계금으로 하여금 “조선의 유림儒林이 믿음직하고 인정이 두터우며 정중한 것을 알았다.”고까지 말하게 했던 것이다. 기대 이상의 역할을 해준 백진사가 충무공에게는 얼마나 고마웠을까. 충무공이 편지의 뒷부분에 “진도독陳都督이 내일쯤 진陣에 당도한다고 하여, 고애孤哀와 계야季爺가 함께 강진에 갑니다. 이달 보름쯤에 왕림하여 진도독의 위풍을 보시는 것이 어떠한지요?”라고 써서 강진의 진도독 진영으로 백진사를 초대한 것은 그에게 민간외교의 역할을 한번 더 해주기를 부탁하는 말이다. 《난중일기》에 의하면, 백진사의 이름은 백진남白振男이었다. 충무공의 진영이 벽파진碧波津에 있을 때인 1597년 10월에 네번이나 방문하는 것으로 보아, 그가 나주 아니면 영암쯤에 살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이순신 장군이 1598년 백진사(백진남)에게 보낸 서신
충무공의 친화력
《난중일기》는 1598년 1월 5일부터 9월 14일까지의 일기가 빠져 있다. 그런데 그 빠진 부분에 명나라 무관들에게 충무공이 받은 선물의 명세를 써 놓았다. 예컨대 첫 줄에는 “명明 유격遊擊 계금季金이 준 물품. 4월 26일”이라고 쓰고 그 아래 계금이 준 비단을 비롯한 10가지 선물의 품목이 나온다. 여기를 보면 충무공은 14명의 명나라 무관으로부터 다양한 선물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왜 충무공에게 그런 선물을 했을까? 더욱이 고자세인 그들이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충무공의 친화력을 엿볼 수 있다. 《난중일기》에 충무공이 진린과 술을 마시는 장면이 이따금 나온다. 1598년 11월의 다음 기사를 보면 충무공이 왜 진린과 술을 마셨는지 알 수 있다.
초8일 명나라 도독부를 방문하여 위로연을 베풀고 어두워져서야 돌아왔다. 조금 있다가 도독이 보자고 청하기에 바로 갔더니, 도독이 말하기를, “순천의 왜교倭橋의 적들이 초10일 사이에 철수하여 도망한다는 기별이 육지로부터 왔으니, 급히 진군하여 돌아가는 길을 끊어 막자.”고 하였다. 초9일 도독과 함께 일제히 군대를 움직여서 백서량에 이르러 진을 쳤다.
진린이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바로 충무공의 친화력, 즉 외교력 덕분이었다. 그는 뛰어난 외교가였던 것이다. 그의 외교력은 명군明軍을 전투에 적극적으로 임하게 만들었다. 풍신수길의 죽음으로 퇴각하다가 퇴로를 차단당하고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왜적을 섬멸할 수 있었던 것도 이순신의 이러한 ‘전장외교’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충무공의 이러한 면도 전투력과 함께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